창작 연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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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느 순간에서부터인가 내가 '나'를 인지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것이 어느 순간부터였는지 알 도리는 없다. 다만 그것은 어둠 속에서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꼭대기에 비추이는 빛과 같이, 내가 오로지 거기에만 집중하게 만들었다. '나'의 인지 - 그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나는 '나'라는 개념에 모든 것을 쏟아 붓는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무엇이 나를 만들었나? 나는 새로이 태어나 숨쉬기 시작한 작은 철학자나 다름없다. 나는 의문을 품으며, 그래서 여기에 존재한다.
나는 습한 곳을 찾는다. 건조한 곳은 내 축축한 피부를 마르고 아프게 한다. 나의 사지는 유연하고 낭창낭창하다. 네 개의 손가락 끝은 미끌미끌한 젖은 바위 모서리를 쥐기에 적당하다. 긴 꼬리는 나의 자랑스러운 부분이다. 허공에 짐짓 저어 보는 느낌도 좋을 뿐 아니라, 재빠르게 기어갈 때 균형을 잡거나 물속에 헤엄칠 때 방향을 조정하는 역할을 한다. 나의 주된 영역은 물 바깥이지만, 때로는 물 속에 뛰어들어 잠기기도 한다. 헤엄치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시원하고 차가운 기운이 잠식해들어오면, 뼈 깊숙한 곳의 기억이 태아처럼 꿈틀거린다.
나는 이 작은 공간의 주인이다. 어디서인가 흘러들어와 흘러나가는 미약한 물줄기의 냄새. 규칙적으로 반향을 일으키며 울려퍼지는 물방울소리. 재빠르게 움직이는, 내가 와작 씹어먹기 좋아하는 다리 여럿 달린 것들의 미세한 움직임. 머리 위 높은 곳에서 이따금 비치는 빛- 그곳에는 누구도 가까이 가려 하지 않는다. 빛은 어둠에 익숙한 피부를 뜨겁게 태운다. 이 모든 것들이 어둠 속에 잠긴 가운데에, 움직이는 것들이 있다. 나는 그 가운데에 가장 크다.
나는 많은 시간을 먹이를 찾는데 보낸다. 이끼를 갉아먹는 것은 보통의 식사이지만, 가끔씩 더 맛나는 것을 잡을 때도 있다. 기척을 죽이고 조심스럽게 움직여도, 이 곳에서 살아남은 것들은 모두 서로의 위치를 언제나 파악하고 있다. 모두가 조심스레 움직인다. 자기보다 큰 것은 피하고, 자기보다 작은 쪽으로 슬금슬금 기어간다. 피할 수 없게 몰아넣어서, 한 입에 콱...! 어쩌다 누군가가 알을 까서 새끼들이 무수히 드글거리면, 그건 축제날이나 다름없다. 모두가 포식하고, 손이 닿지 않은 깊숙한 구석으로 달아난 몇만 겨우 살아남아 자란다. 다시 이것이 반복되고, 반복된다. 텁텁한 이끼말고 무언가 더 씹는 맛이 있는 것으로 배채울 기회는 항상 환영이지만, 산란시기를 제외하면 그런 기회는 드문 편이다.
어느날 내가 집게 여럿달린 바작거리는 먹잇감을 움켜 잡았을 때, 나는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는 걸 느꼈다. 이전이었다면 성급하게 몇번 씹고는 그대로 목구멍으로 넘겨버렸을테지만 이번에는 버둥거리는 것의 머리를 눌러 부수는데 그쳤다. 오래 묵어서 나이든 것들은 굵어지지만 둔하고 느려져서 제 수명을 다하고 죽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렇지만 그렇게 죽는 녀석이 있으면 이 곳의 일상에 큰 변화가 닥친다 - 움직이지 않는 공짜나 다름없는 먹잇감에 모두가 눈독을 들이는 것이다. 더 대담해져서 어떤 놈은 큰 토막을 물고 부리나케 제 소굴로 내빼고 어떤 놈은 욕심부리다 다른 놈에게 먹힌다. 내가 떠올린 생각이란 바로 그것이다. 멀쩡한 먹이를 일부러 내버려두면 어떻게 될까? 넙죽넙죽 집어 삼키기만 하는 것들-이전의 나를 포함해서-은 이런 생각은 꿈도 못 꿀 테지. 입맛을 다시면서 먹이를 내려두고, 이끼를 뜯어먹으러 발을 옮긴다.
새 착상은 성공적이었다. 내가 기대했던 대로의 혼란이 생긴다. 나는 포기한 먹이보다는 약간 작은 것들 몇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두어마리만 먹고, 나머지는 마찬가지로 그 전의 먹잇감 근처에 끌어다 두었다. 먹이 무더기가 커질수록 더 조심하기 어려워질테지. 그리고 그 유혹은 나에게도 해당되는 것이어서, 전부 다 집어 삼켜 버리고 싶은 것을 억지로 눌러 참는다. 나는 이제 생각하는 것 뿐 아니라 참고 기다리는 것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놀라운 발전이고 또 아주 유용하다!
나는 먹이 무더기를 감시하러 갔다가 또다른 나의 동족을 발견한다. 놈은 나만큼 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굉장히 큰 수준이었다. 아마도 나와 함께 산란되어 어느 구석에서 살아남은 녀석일 것이다. 놈은 내가 애써 참고 모아둔 먹이들을 게걸스럽게 집어 삼키고 있다. 내 발상은 크기는 나만하지만 멍청한 녀석 탓에 헛수고가 되고 말았다! 차라리 내가 모조리 다 먹어치워버렸으면 나았을 것을. 크기가 크게 차이나지 않는 것과 싸우는 것은 나도 상당한 상처를 입을 위험이 있다. 놈이 배를 채우고 떠난 자리에 가서, 부스러기 몇점이라도 주워먹으러 모인 작은 것들을 잡아 분김에 죄다 삼킨다. 그 중에 단단한 껍질이 있는 것이 있었는지 목에 걸려 꽤 오래 고생했다.
새로 나타난 경쟁자 때문에 먹이를 미끼삼아 다른 먹잇감을 끌어들이는 일은 할 수가 없다. 놈은 이미 이전부터 나를 주시하고 있던 것 같다. 교활하기 짝이 없어서, 자기 기척은 교묘히 숨기고 내게서 먼 곳에만 자리 잡고 있다. 게다가 놈은 수컷이었다! 건방지게도, 나를 유혹하는 분비물을 조금씩 내어 내게 일부러 자신을 알리고 있다. 내 몸은 그에 반응하지만, 먹이를 빼앗긴 것이 분할 뿐 아니라 아직 알을 낳고 싶지 않다. 알을 낳으려면 엄청나게 많은 양분이 필요하고 나는 굉장히 약해진다. 알을 낳는 것은 좀더 강해진 후에 생각할 일이다. 그리고 상대는 어디까지나 이 곳의 패권을 두고 다투는 경쟁자이다.
놈은 끈질기게 구애해온다. 놈의 분비물 때문에 알주머니는 내 몸 안에서 훨씬 성숙해졌다. 분비물이 묻은 곳을 피하려 해도, 물가나 바위 위의 길목에 교묘하게 묻혀두어 지나가다보면 어쩔 수 없이 묻게 된다. 이제는 자신의 흔적을 완전히 숨기지 않아서 자신이 있다는 것을 알리려 하고 있다. 심지어는 물가에 내려갔을 때 물 속에 뭔가 잠겨 있다 싶더니 놈이 후다닥 달아나는 게 아닌가? 짝짓기 때가 되기 전에 저를 알릴 필요가 있는 탓이겠지만, 어쨌든 놈은 내 영역을 거리낌없이 침범하고 있다. 그 사실이 몹시 나를 불쾌하게 한다.
아무래도 알로 몸의 양분이 가다보니 몸은 자꾸 약해지고 배가 고프다. 그런데 알을 산란하려면 아직도 양분이 더, 더 많이 필요하다! 이대로 가다가는 뼈와 거죽만 남을 것이다. 나는 전보다 더 무리해서 휘젓고 다닌다. 이끼는 요즘대로 점점 맛이 쓰게 느껴져서 잘 먹질 못하겠다. 다리를 짤깍거리는 먹잇감들은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돈다. 물웅덩이 속에 뛰어들어 도망치는 놈을 뒤쫓고, 좁은 구석에 억지로 몸을 밀어 넣어 먹잇감을 끄집어 내기도 한다. 하도 부지런히 돌아다니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작은 곳 안에 움직이는 것들의 수가 퍽 줄어든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먹어대다 보면 나중에 먹을 것이 이끼밖에 남지 않으리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별 수 없다. 목구멍에서 재촉하는대로 꿀꺽꿀꺽 삼킨다. 놈은 저 건너편 어딘가에서 계속 나를 지켜보고 있다. 신부 준비를 흐뭇하게 지켜보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나는 짝짓기가 끝나는 대로 놈을 잡아먹겠다고 마음먹는다. 그 생각 탓에 괜히 입에 군침이 돌고 빨리 짝짓기를 끝내버리기를 바라게 된다.
몸이 몹시 아팠다. 무얼 먹기는 커녕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피부가 조각나고 뼈마디가 뒤틀리는 것 같다. 얼마 전부터 조금씩 몸이 이상하다고 여겼는데 심상치 않은 통증이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내가 날뛴 탓인지 주위의 이끼가 죄다 쥐어뜯기고 뒤집혀있다. 통증이 가라앉고 나서 식욕이 불처럼 일어났지만 힘이 없다. 겨우 굴 밖에 나왔을 때 분비물의 진한 냄새가 풍겨 누가 놓아둔 건지 바로 알 수 있는 먹잇감이 쌓여 있었다. 본격적인 구애의 표시다. 죄다 움켜 먹고서 약간 기운을 차렸다. 알이 성숙하는 것만으로 이렇게 몸이 뒤틀리게 아플리가 없다. 뭔가 내 몸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 그 변화는 내가 나를 인지하게 된 것과 무언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마침내 짝짓기를 했다. 먹이를 찾으러 물가를 돌아다니고 있는데 놈이 슬그머니 나타났다. 전처럼 자기 기척만 알리고 도망칠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겁없이 자꾸 가까이 다가오더니 휙 내 등 위로 올라탄다. 놈을 끌어내리려 하는데 놈은 악착같이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실랑이 하는 새에 어찌어찌 생식선이 맞닿아 수정이 이루어져 짝짓기가 끝났다. 나도 꽤 기력이 떨어졌으나 비실거리는 놈을 잽싸게 끌어재려 바위에 패대기질친다. 짓밟고 머리부터 우적우적 씹어먹으니 버둥거리던 것도 끝이다. 놈을 잡아먹기를 그렇게 고대했는데 맛은 생각보다 별로였다. 분비물 냄새가 진하게 났다. 그냥 꿀꺽 한입에 다 삼켜 버렸다.
다시 몸이 아팠다. 전보다 몇배는 더 심한 통증이다. 알이 수정되는 것만으로 이렇게 아플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몸을 잡아당겨 늘리는 것도 같고, 내 안에 무언가 부글거리며 부풀어오르는 것이 가득찬 느낌도 난다. 무언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알 속에 끓어오르는 생명력보다 더 강력한 것이 나를 채운다. 살이 녹아내리고 뼈는 바늘처럼 뾰족뾰족하게 자라는 것 같다. 강렬한 고통 속에는 나는 환영을 보았다. 오직 빛의 형상만이 있을 뿐 냄새도 촉감도 없다. 그 영상은 빛으로 날아오르는 어떤 거대한 존재의 것이었다. 그 뒤로 뻗어난 많은 날개들의 끝이 나를 꿰찌르는 듯이 고통이 나의 정신을 압도했다.
상당히 시간이 지나고 나서 깨어난 것 같다. 움직이는 것의 기척이라고는 없다. 굴은 훨씬 비좁게 느껴지고 습한 냄새가 이질적이다. 주위의 이끼가 온통 거멓게 죽어있었다. 참을 수 없이 배가 고팠지만 이끼는 손으로 건드리니 가루로 부스러져 버리고, 그 가루는 너무 써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다.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 움직이기 힘들다. 내장을 토해낼 것 같은 메슥거림과 뼈가 살 속을 파고드는 고통이 주기적으로 밀려와서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다. 망막 안에 날개달린 존재의 잔상이 선명히 맺혀 떠나질 않는다. 나는 어떤 이유에선지, 내게 일어나고 있는 이 모든 일들-나를 인지하게 되고 생각할 수 있게 되고 짝짓기한 상대를 잡아먹고 고통에 시달리고 비정상적으로 성장하는 것-이 그 존재와 관련되어 있으리라는 강한 영감을 받는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목구멍에 넘긴 건 물 몇 모금이 전부였으나 그마저도 어둠처럼 쓰다. 고통 속에서 알주머니가 쏟아져 나왔다. 전부 희끄무레하고 탁한 빛으로 온전한 색이 아니었으나, 그렇게 구미가 당길 수가 없었다. 견딜 수 없는 충동에 이끌려 하나도 남김없이, 가죽 같은 주머니 막까지 정신없이 먹어치운다. 내게서 나온 것을 내가 모두 먹고 나자 비로소 약간의 힘이 돌아온다. 이곳에 더 있다가는 굶어죽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는 천정의 새어들어오는 빛을 바라본다. 물이 흘러나와 흘러 나가는 틈새는 이제 너무 좁다. 내가 눈을 찌르고 피부를 불태우는 그 흰 빛을 버틸 수 있을거라는 자신이 없다.
나는 꼼짝도 앉고 그 자리에 앉아서 빛을 쳐다 본다. 처음에는 도저히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는 빛이었지만 이제는 견딜만 하다. 어쩌면 빛은 이미 내 눈을, 시신경을 그 뒤의 뇌를 모조리 다 태워버렸는지도 모른다. 아득하게 흰 빛이 나를 가득 채웠을 때에, 나는 그 빛 가운데에서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는 환영을 수백번, 아니 수천 번 혹은 그 이상을 보았다. 지상에서 천상으로 날아오르는 환영과도 같이, 나는 변모한다. 약간 비틀거리면서, 가까스로 버석거리는 죽은 이끼로 덮힌 바위를 기어오른다. 구멍을 넘는 순간 정신을 잃고 반대편으로 굴러떨어졌다. 아직 내게는 천상으로 날아오를 날개가 달려있지 않다.
정신이 들었을 때 나는 어룽거리는 빛에 둘러싸여 있었다. 어리둥절해서 고개를 들어보니, 야트막한 굴 가득히 흐르는 물에 미쳐 반짝거리는 빛이 가득하다. 물 속에는 은빛의 비늘을 가진 것들이 날렵하게 움직이고, 대기의 흐름은 온통 소란스럽게 부딫혀 부서진다. 나는 그 너머에 그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이제껏 듣지 못하는 나를 끊임없이 불렀고, 지금도 그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울린다. 수많은 영롱한 반짝임의 가운데, 얕은 물에 살짝 잠긴 채 암벽에 기대인 것은, 오... 그것은 환영에서 본 것과 같은 형체를 지니고 있었다. 나직하게 일렁이는 빛은 수정 안에 갇힌 기묘한 뼈대를 비춘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 앞에 엎드러져 고개를 숙인다. 나는 마치 오랜 금식 수행으로 깨달음에 도달한 수행자 같다. 그는 내게 새 생명을 부여하고 빛으로 이끌어 나를 단순한 작은 도마뱀 이상의 것으로 만들었다.
빛은 주기적으로 강해지고 약해지는 것을 반복한다. 빛이 약해 서늘한 시간이 더 좋긴 하지만 이제 나는 빛을 견딜 수 있다. 물 속을 헤엄치는 비늘달린 것들은 잡기 까다로웠지만 내 입맛을 매료시켰다. 나는 힘차게 물로 뛰어들어 그것들을 쫓는다. 잡은 것 가운데 가장 좋은 것들을 그에게 바치는 것은 잊지 않았다. 며칠간 굴 주위에만 머무르다가 빛이 약해질 때에 더 멀리까지 나가본다. 나와 그가 있는 굴은 황야 한 가운데의 큰 바위산에 있었다. 반쯤 마른 풀들이 무성한 황야에 실 같은 물줄기들이 흐른다. 빛이 강해질 때면 도로 굴로 돌아왔다. 빛이 굴 안에 가득해지면 나는 경외감에 사로잡혀 오랫동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따금 빛이 점점 차올라 나를 집어삼키면 날개를 단 존재가 날아오르는 환영을 보곤 했다.
시일이 지나면서 나는 변화를 직접 체감한다. 나는 점점 더 크고 강하고 날래진다. 나의 안에 그가 가득한 것을 느낀다. 일어서서 걸을 수도 있지만 아직은 네 발로 기어다니는 것이 더 빠르다. 손가락은 더 길어지고 쥐는 힘이 강해진다. 나는 그가 원하는 형상대로, 그의 형상으로 변모하고 있다. 그는 오로지 경배만을 바랄 뿐, 다른 귀중한 것들을 즐기지 않는다. 그는 그 모든 것들 보다 더욱 더 귀중하기 때문이다. 그는 내가 온 마음과 정성을 다 바치는 것을 기뻐한다. 그는 언제나 나와 함께 있다. 나는 여전히 상당히 오랜 시간을 그를 응시하는데 쏟는다. 그와 영적으로 교감하며, 내가 더욱 높아지고 빛으로 가득찬 모습으로 변하는 것을 느낀다. 경배의 끝은 항상 날아오르는 빛의 환영이다.
두 발로 일어나 걷는 것이 기는 것 만큼 빨라지고 붙잡아 쥐는 힘이 강해졌을 즈음, 나는 나와 비슷한 형체의 것을 보았다. 꼬리도 없고 피부도 말라보였지만 내가 변모하는 모양과 닮아 있었다. 내가 이전보다 몇배는 더 커졌는데도 나보다 두 배는 더 크다. 왠지 그 자가 나와 그의 관계에 끼어들 것 같은 안 좋은 느낌이 든다. 놈은 나보다 더 그와 닮았다. 혹 그가 놈에게 새로이 관심을 기울일지 모른다는 조바심까지 끼어든다. 내가 계속 관찰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놈은 이 황야에 머무르기로 한 것 같다. 빛이 강해지는 때가 오면 바위산으로 와서 무언가를 찾고 있다. 그것이 나의 그일거라는 건 명백하다! 아직 나와 그의 굴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꼼꼼히 다니는 것으로 보아 조만간 찾아낼 것이다. 그러면... 그렇게 되면...
나는 오랫동안 반짝이는 빛과 수정 속의 뼈대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마음을 굳힌다. 놈을 죽여 버리면 될 일이다! 그러나 어떻게? 그는 나의 두 배는 크다. 정면으로 덤볐다가는 이기지 못할 것이다. 힘이 강해지긴 했지만 역시 무모하게 맞설 일이 아니다. 날마다 나의 몸이 새로워지고 있기에 시간만 충분히 주어지면 간단히 놈의 머리를 뜯어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 전에 놈이 굴을 찾아낼 것이다. 나는 날마다 놈의 뒤를 밟으며 엿보았다. 놈은 이상한 가죽을 뒤집어 쓰고 있는데, 거기에 이것저것 달아두었다가 바위를 깨고 들어올리고 할 때마다 빼내어 쓴다. 궁리 끝에 나도 내가 직접 덤벼들게 아니라 무언가 다른 것을 들고 그걸 사용하면 될 거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는 나를 격려하고 있다. 그는 항상 나와 함께 있다. 그는 언제나 나의 편이다. 자, 어서 방해자를 해치워 버리자!
상대는 똑바로 굴로 올라온다. 나는 바윗덩어리를 움켜쥔 손에 힘을 준다. 손가락은 이제 알맞은 길이가 되어 쥐고 붙잡는데 적당하다. 놈의 머리만한 바윗덩어리를 들어올리는 것이 약간은 힘겹다. 가누고 있다가, 놈이 굴의 입구에 발을 딛는 순간 달려든다. 정확히 겨눈 곳에 맞았으면 놈의 머리가 으스러졌을 테지만, 빗나가 어깨 근처를 때린다. 고함 소리가 얕은 굴 속에 쩌렁쩌렁 울린다. 할 수 없이 꼬리로 놈의 목을 휘감아 조였다. 반짝이는 빛으로만 가득했던 신성한 고요가 깨져, 평온은 철썩거리는 물 소리에 멀찌감치 물러나 버린다. 놈은 뒤집어쓴 가죽에서 날카롭게 빛나는 은빛 발톱을 빼내더니 나를 찔렀다! 내 목을 움켜쥐면서 재차 찌른 곳을 우벼 판다. 내가 몸부림치다가 문득 눈길이 수정 속에 빛나는 그에게 닿았을 때, 상상할 수 없는 힘이 내 안에서 폭발했다. 나는 단숨에 놈을 절반으로 꺾어버린다. 붉은 물이 확 튀고 버르적거리는 것으로 움직임이 멎는다. 갑작스러운 어지러움과 어둠이 덮치고 나는 나를 굽어보는 그의 발치에 쓰러진다. 이겼다- 그는 언제까지나 영원히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통증은 철썩이는 파도처럼 밀려나가 희미해진다.
정신을 차렸을 때 온 몸의 구석구석이 콕콕 쑤시고 뜨거웠다. 내 정신이 이겨내지 못할 고통은 지나갔지만 나는 그 고통의 마지막 잔류에도 허덕댄다. 어질어질한 몸을 일으키자 굴이 전보다 훨씬 더 비좁아보인다. 찔렸던 상처에는 살이 거품처럼 쏟아져나와 굳어있고, 바닥에는 부서져 떨어진 껍질조각들이 가득하다. 허기가 갑작스레 밀려들어 주위를 둘러보니 반으로 꺾인 시체가 있다. 가까이 다가가니 나는 이미 놈에 못지않게 크다. 다른 생각을 할 것도 없이 죄다 먹어치운다. 나를 찔렀던 은빛 발톱을 비롯한 그 이상한 가죽과 물품들을 그에게 바쳤다. 내게 승리를 가져다 준 것도 그이며, 내게 새 생명과 영광스러운 변모를 부여한 것도 그이다.
놈이 머물렀던 자리를 살피러 가서, 물품들 중 귀중해 보이는 것은 추리고 가져가기 힘든 것은 땅에 파묻었다. 귀중해 보이는 것들은 그에게 바칠 셈이다. 물품들을 뒤지던 중, 날개달린 살아있는 것이 든 통을 발견했다. 통을 부수고 꺼내자 홰를 치더니 드디어 날아오른다. 나는 그것이 빛 너머로 사라져 가는 것을 오랫동안 바라본다. 문득 그가 날아서 나를 떠나가 버릴 것이 두려워진다. 내게도 날개가 생겨 그와 함께 빛으로 향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그가 설마 나를 완전히 버리고 떠나가지는 않을 것이다...
며칠이 지나자 내가 죽인 것과 같은 종류로 보이는 두 발로 걷는 것들이 더 많이 나타났다. 이번엔 정말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서 굴 안에 숨어있었다. 수가 많으니 다 죽일 수도 없고, 꼼꼼하게 훑으면 굴을 찾아내는 것도 금방일 것이다. 다른 비밀스러운 곳에 그를 옮겨 안치하면 어떨까? 이 일대는 내가 샅샅이 돌아다녔기 때문에 모르는 장소가 없다. 당장 떠오르는 숨을 만한 곳도 꽤 된다. 괜찮은 생각이지만 지금 놈들이 어느 곳에 있는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빛이 약해진 때에 굴 밖으로 나가보아야 할 것 같다.
"진리의 빛이 우리가 나아갈 길을 비추기를."
"진리의 빛이 우리가 나아갈 길을 비추기를. 헤멘로 신부, 실종된 켈리 형제의 행방은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그의 표식은 여기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내일이면 찾을 수 있겠지요."
"켈리 형제가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이었죠? 그의 전서구는 진리교회가 보낸 서신을 그대로 달고 돌아왔습니다. 이렇게 빨리 구조대가 출발한 것도 중대한 사안이라 이단교회나 가장교회가 먼저 손 쓸 가능성이 큰 탓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제 권한 밖의 일이라서 자세한 것을 알지는 못하지만, 고천사와 관련된 사안으로 알고 있습니다. 켈리 형제는 탐험가 조합의 카르도 지부장일 뿐 아니라 '그 밤' 이전의 비밀들에도 상세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죠. 이번에 그는 너무 의욕에 넘쳤습니다. 교회의 집행부에서도 걱정한 나머지 천연자석의 표식을 특별히 그에게 주었지만-"
"켈리형제에게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으리라고 속단하지는 맙시다. 오로지 주님의 뜻에 달린 일이니까요. 참, 그런데 어제 기묘한 생물을 사로잡았다지요?"
"야간에 감시조에게 발각되어 포획되었다더군요. 임넬 신부가 그 생물이 천상의 물질에 노출된 변형체로 드문 표본이라고 기뻐했습니다. 그의 조수들이 해부해서 자세한 조직구조를 연구하고 있을 겁니다."
"임넬 신부가 아까 제게 열렬히 설명했지만 이해하기 힘든 내용입니다. 워낙 전문적인 게 되어놔서... 조직이 단기간에 급격하게 발달했다고 하던가? 얼핏 보기로는 거의 사람만한 크기였는데, 원형이 되는 생물은 작은 도마뱀인 것 같다더군요. 원시적인 수준의 지성을 갖추고 있을 수도 있다고 합디다."
"아직 세상에는 풀리지 않은 신비와 비밀들이 너무도 많지요. 주님의 뜻에 따라 우리가 이 귀중한 지식들을 습득하길 기도할 뿐입니다."
그 때 잠시 소란이 일더니 야영지 전체가 시끄러워진다. 사람 하나가 급히 달려와 전했다.
"표본이 달아났습니다! 완전히 절개해 내부기관을 적출한 상태였는데- 지금 추적조가 뒤쫓는 중입니다!"
나는 헐떡거리며 달리다시피 긴다. 이질감, 속을 가득 메운 텅 빈 공허감! 놈들은 나를 칼로 찢고 베고 속을 들어냈다, 나는 내 숨이 가쁜 만큼 남은 목숨이 길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다 - 어쩌면 나는 이미 죽은 채로 몸만 움직이고 있을지도 모르지. 죽고싶지 않아-죽고싶지 않아- 죽기 전에 그에게로, 그의 빛나는 날개를 다시 한번 보았으면, 그의 발치에 쓰러져 그의 비상을 다시 한번- 아니다. 그라면, 그라면 내게 새 생명을 한번 더 줄 수 있을지도 몰라, 나를 변모시켰던 힘으로, 나의 시야를 덮어오는 죽음을 걷어내고 찬연하게 빛나는 날개를 달아줄지도 몰라- 그는 그렇게 해 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허우적거리면서 굴 속으로, 나의 그가 기다리고 있는 굴로 기어들어간다. 반짝거리는 물에 비쳐 어른 거리는 빛에 감싸여 수정 속의 뼈대는 더없이 아름답게 빛난다. 몸에 충만한 힘이 사라져버린 내장기관을 복구시키며 나의 허물어져가는 생명을 덧대어 붙인다. 아무래도 재생하기에는 남아있는 생명이 너무 적은 탓인지, 부글거리던 살이 급기야는 끓어올라 녹아내린다. 이윽고 나의 허물이 서서히 멀어지며 나는 빛으로, 그의 일부로 화하여 그와 함께 승천하는 것이었다. 섬광이 모든 것을 채운다. 나는 날개를 한껏 펴고 천상을 향해 비상한다.
카르도 지방의 황야에서 발생한 섬광은 대륙 전역에서 관측되었다. 솟구쳐 천궁으로 향하는 빛기둥은 세 교회를 동시에 긴장하게 만들었으며, 제 1교회의 교민들이 그저 어느 지방에 일어난 이적이겠거니 하는 동안 교회들의 집행부는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다. 그 결과 제 2 교회 소속 말레쿠도 신부를 포함한 11인의 사망과 제 3교회 측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3인의 사망 등 상당한 유혈사태가 있었다. 그러나 사건 자체의 본질보다는 그와 관련된 교회간의 충돌이 더 가시적이었던 바, 이적에 대한 관심은 자연히 줄어들 수 밖에 없었다. 이를 두고 제 3교회가 의도한 바 대로 정국이 흘러간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실제로 이 섬광이 지닌 의미가 무엇인지 설명할 수 있는 이가 없으므로 제 2교회는 이 사건을 곧 종결지었다.
섬광이 폭발하며 천궁으로 치솟아 오를 때, 그를 가만히 내려다 보고 있던 사내가 있었다. 사내는 한 때 그와 함께 창조되었으나 대환란의 시기에 사라졌던 존재의 유해의 일부가 다시 그가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 사내의 입은 거의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그 존재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 "메타트론." 그리고 다음 순간, 사내의 모습은 사라지고 이미 그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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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날개' 단편 시리즈는 계속됩니다. ~_~
메타트론은 이름과 일부만 알려졌지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는 천사라서 멋대로 쓰는 소설에 등장시키기에 퍽 좋습니다. ㄱ- 이 글은 어느 작은 도마뱀이 괴물(...)이 되었다가 죽기 까지의 이야기랄까... 공책에 쓰고 나서 다시 옮긴건데, 영화 괴물을 보고 와서 공책에 써내려간 내용을 보니 뭔가 느낌이 묘했달까나. -ㅁ-;
상징...이라기 보다는 암시적으로 변모를 설명하려 했는데.
자신의 인지->생각하고 꾀를 쓸수 있게 됨->절제->짝을 잡아먹음->빛을 견딜 수 있게 됨 ->천사의 유해를 숭배하게 됨->인간을 죽이고 먹어치움->죽음의 위기->승천(혹은 죽음. -_-)
대강 이런 과정을 거쳐서 도마뱀은 도마뱀 이상의 존재가 됩니다. -_-
사실 메타트론의 유해 자체는 의지도 없고 도마뱀이 생각하는 것처럼 누구에게 힘을 베푼 적도 없습니다. 거기에 남아있는 권능이 새어나와 어쩌다 그렇게 된 것 뿐이지. 불쌍한 건 열심히 믿다가 하늘로 가버린 도마뱀 뿐이군요;
가장교회라는 표현은 제 2교회에서 제 1교회를 부르는 말로 진실은 빛과 같아서 똑바로 쳐다보면 눈을 멀게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우매한' 민중들에게 진실을 일단은 감추게 해 주는 역할을 한다는 뜻으로 쓰는 말입니다.
마지막의 사내는... 으음. 앞으로 '잃어버린 날개' 시리즈에서 종종 등장합니다. 뭐 누군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겠죠-ㅅ-
나는 습한 곳을 찾는다. 건조한 곳은 내 축축한 피부를 마르고 아프게 한다. 나의 사지는 유연하고 낭창낭창하다. 네 개의 손가락 끝은 미끌미끌한 젖은 바위 모서리를 쥐기에 적당하다. 긴 꼬리는 나의 자랑스러운 부분이다. 허공에 짐짓 저어 보는 느낌도 좋을 뿐 아니라, 재빠르게 기어갈 때 균형을 잡거나 물속에 헤엄칠 때 방향을 조정하는 역할을 한다. 나의 주된 영역은 물 바깥이지만, 때로는 물 속에 뛰어들어 잠기기도 한다. 헤엄치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시원하고 차가운 기운이 잠식해들어오면, 뼈 깊숙한 곳의 기억이 태아처럼 꿈틀거린다.
나는 이 작은 공간의 주인이다. 어디서인가 흘러들어와 흘러나가는 미약한 물줄기의 냄새. 규칙적으로 반향을 일으키며 울려퍼지는 물방울소리. 재빠르게 움직이는, 내가 와작 씹어먹기 좋아하는 다리 여럿 달린 것들의 미세한 움직임. 머리 위 높은 곳에서 이따금 비치는 빛- 그곳에는 누구도 가까이 가려 하지 않는다. 빛은 어둠에 익숙한 피부를 뜨겁게 태운다. 이 모든 것들이 어둠 속에 잠긴 가운데에, 움직이는 것들이 있다. 나는 그 가운데에 가장 크다.
나는 많은 시간을 먹이를 찾는데 보낸다. 이끼를 갉아먹는 것은 보통의 식사이지만, 가끔씩 더 맛나는 것을 잡을 때도 있다. 기척을 죽이고 조심스럽게 움직여도, 이 곳에서 살아남은 것들은 모두 서로의 위치를 언제나 파악하고 있다. 모두가 조심스레 움직인다. 자기보다 큰 것은 피하고, 자기보다 작은 쪽으로 슬금슬금 기어간다. 피할 수 없게 몰아넣어서, 한 입에 콱...! 어쩌다 누군가가 알을 까서 새끼들이 무수히 드글거리면, 그건 축제날이나 다름없다. 모두가 포식하고, 손이 닿지 않은 깊숙한 구석으로 달아난 몇만 겨우 살아남아 자란다. 다시 이것이 반복되고, 반복된다. 텁텁한 이끼말고 무언가 더 씹는 맛이 있는 것으로 배채울 기회는 항상 환영이지만, 산란시기를 제외하면 그런 기회는 드문 편이다.
어느날 내가 집게 여럿달린 바작거리는 먹잇감을 움켜 잡았을 때, 나는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는 걸 느꼈다. 이전이었다면 성급하게 몇번 씹고는 그대로 목구멍으로 넘겨버렸을테지만 이번에는 버둥거리는 것의 머리를 눌러 부수는데 그쳤다. 오래 묵어서 나이든 것들은 굵어지지만 둔하고 느려져서 제 수명을 다하고 죽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렇지만 그렇게 죽는 녀석이 있으면 이 곳의 일상에 큰 변화가 닥친다 - 움직이지 않는 공짜나 다름없는 먹잇감에 모두가 눈독을 들이는 것이다. 더 대담해져서 어떤 놈은 큰 토막을 물고 부리나케 제 소굴로 내빼고 어떤 놈은 욕심부리다 다른 놈에게 먹힌다. 내가 떠올린 생각이란 바로 그것이다. 멀쩡한 먹이를 일부러 내버려두면 어떻게 될까? 넙죽넙죽 집어 삼키기만 하는 것들-이전의 나를 포함해서-은 이런 생각은 꿈도 못 꿀 테지. 입맛을 다시면서 먹이를 내려두고, 이끼를 뜯어먹으러 발을 옮긴다.
새 착상은 성공적이었다. 내가 기대했던 대로의 혼란이 생긴다. 나는 포기한 먹이보다는 약간 작은 것들 몇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두어마리만 먹고, 나머지는 마찬가지로 그 전의 먹잇감 근처에 끌어다 두었다. 먹이 무더기가 커질수록 더 조심하기 어려워질테지. 그리고 그 유혹은 나에게도 해당되는 것이어서, 전부 다 집어 삼켜 버리고 싶은 것을 억지로 눌러 참는다. 나는 이제 생각하는 것 뿐 아니라 참고 기다리는 것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놀라운 발전이고 또 아주 유용하다!
나는 먹이 무더기를 감시하러 갔다가 또다른 나의 동족을 발견한다. 놈은 나만큼 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굉장히 큰 수준이었다. 아마도 나와 함께 산란되어 어느 구석에서 살아남은 녀석일 것이다. 놈은 내가 애써 참고 모아둔 먹이들을 게걸스럽게 집어 삼키고 있다. 내 발상은 크기는 나만하지만 멍청한 녀석 탓에 헛수고가 되고 말았다! 차라리 내가 모조리 다 먹어치워버렸으면 나았을 것을. 크기가 크게 차이나지 않는 것과 싸우는 것은 나도 상당한 상처를 입을 위험이 있다. 놈이 배를 채우고 떠난 자리에 가서, 부스러기 몇점이라도 주워먹으러 모인 작은 것들을 잡아 분김에 죄다 삼킨다. 그 중에 단단한 껍질이 있는 것이 있었는지 목에 걸려 꽤 오래 고생했다.
새로 나타난 경쟁자 때문에 먹이를 미끼삼아 다른 먹잇감을 끌어들이는 일은 할 수가 없다. 놈은 이미 이전부터 나를 주시하고 있던 것 같다. 교활하기 짝이 없어서, 자기 기척은 교묘히 숨기고 내게서 먼 곳에만 자리 잡고 있다. 게다가 놈은 수컷이었다! 건방지게도, 나를 유혹하는 분비물을 조금씩 내어 내게 일부러 자신을 알리고 있다. 내 몸은 그에 반응하지만, 먹이를 빼앗긴 것이 분할 뿐 아니라 아직 알을 낳고 싶지 않다. 알을 낳으려면 엄청나게 많은 양분이 필요하고 나는 굉장히 약해진다. 알을 낳는 것은 좀더 강해진 후에 생각할 일이다. 그리고 상대는 어디까지나 이 곳의 패권을 두고 다투는 경쟁자이다.
놈은 끈질기게 구애해온다. 놈의 분비물 때문에 알주머니는 내 몸 안에서 훨씬 성숙해졌다. 분비물이 묻은 곳을 피하려 해도, 물가나 바위 위의 길목에 교묘하게 묻혀두어 지나가다보면 어쩔 수 없이 묻게 된다. 이제는 자신의 흔적을 완전히 숨기지 않아서 자신이 있다는 것을 알리려 하고 있다. 심지어는 물가에 내려갔을 때 물 속에 뭔가 잠겨 있다 싶더니 놈이 후다닥 달아나는 게 아닌가? 짝짓기 때가 되기 전에 저를 알릴 필요가 있는 탓이겠지만, 어쨌든 놈은 내 영역을 거리낌없이 침범하고 있다. 그 사실이 몹시 나를 불쾌하게 한다.
아무래도 알로 몸의 양분이 가다보니 몸은 자꾸 약해지고 배가 고프다. 그런데 알을 산란하려면 아직도 양분이 더, 더 많이 필요하다! 이대로 가다가는 뼈와 거죽만 남을 것이다. 나는 전보다 더 무리해서 휘젓고 다닌다. 이끼는 요즘대로 점점 맛이 쓰게 느껴져서 잘 먹질 못하겠다. 다리를 짤깍거리는 먹잇감들은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돈다. 물웅덩이 속에 뛰어들어 도망치는 놈을 뒤쫓고, 좁은 구석에 억지로 몸을 밀어 넣어 먹잇감을 끄집어 내기도 한다. 하도 부지런히 돌아다니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작은 곳 안에 움직이는 것들의 수가 퍽 줄어든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먹어대다 보면 나중에 먹을 것이 이끼밖에 남지 않으리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별 수 없다. 목구멍에서 재촉하는대로 꿀꺽꿀꺽 삼킨다. 놈은 저 건너편 어딘가에서 계속 나를 지켜보고 있다. 신부 준비를 흐뭇하게 지켜보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나는 짝짓기가 끝나는 대로 놈을 잡아먹겠다고 마음먹는다. 그 생각 탓에 괜히 입에 군침이 돌고 빨리 짝짓기를 끝내버리기를 바라게 된다.
몸이 몹시 아팠다. 무얼 먹기는 커녕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피부가 조각나고 뼈마디가 뒤틀리는 것 같다. 얼마 전부터 조금씩 몸이 이상하다고 여겼는데 심상치 않은 통증이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내가 날뛴 탓인지 주위의 이끼가 죄다 쥐어뜯기고 뒤집혀있다. 통증이 가라앉고 나서 식욕이 불처럼 일어났지만 힘이 없다. 겨우 굴 밖에 나왔을 때 분비물의 진한 냄새가 풍겨 누가 놓아둔 건지 바로 알 수 있는 먹잇감이 쌓여 있었다. 본격적인 구애의 표시다. 죄다 움켜 먹고서 약간 기운을 차렸다. 알이 성숙하는 것만으로 이렇게 몸이 뒤틀리게 아플리가 없다. 뭔가 내 몸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 그 변화는 내가 나를 인지하게 된 것과 무언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마침내 짝짓기를 했다. 먹이를 찾으러 물가를 돌아다니고 있는데 놈이 슬그머니 나타났다. 전처럼 자기 기척만 알리고 도망칠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겁없이 자꾸 가까이 다가오더니 휙 내 등 위로 올라탄다. 놈을 끌어내리려 하는데 놈은 악착같이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실랑이 하는 새에 어찌어찌 생식선이 맞닿아 수정이 이루어져 짝짓기가 끝났다. 나도 꽤 기력이 떨어졌으나 비실거리는 놈을 잽싸게 끌어재려 바위에 패대기질친다. 짓밟고 머리부터 우적우적 씹어먹으니 버둥거리던 것도 끝이다. 놈을 잡아먹기를 그렇게 고대했는데 맛은 생각보다 별로였다. 분비물 냄새가 진하게 났다. 그냥 꿀꺽 한입에 다 삼켜 버렸다.
다시 몸이 아팠다. 전보다 몇배는 더 심한 통증이다. 알이 수정되는 것만으로 이렇게 아플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몸을 잡아당겨 늘리는 것도 같고, 내 안에 무언가 부글거리며 부풀어오르는 것이 가득찬 느낌도 난다. 무언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알 속에 끓어오르는 생명력보다 더 강력한 것이 나를 채운다. 살이 녹아내리고 뼈는 바늘처럼 뾰족뾰족하게 자라는 것 같다. 강렬한 고통 속에는 나는 환영을 보았다. 오직 빛의 형상만이 있을 뿐 냄새도 촉감도 없다. 그 영상은 빛으로 날아오르는 어떤 거대한 존재의 것이었다. 그 뒤로 뻗어난 많은 날개들의 끝이 나를 꿰찌르는 듯이 고통이 나의 정신을 압도했다.
상당히 시간이 지나고 나서 깨어난 것 같다. 움직이는 것의 기척이라고는 없다. 굴은 훨씬 비좁게 느껴지고 습한 냄새가 이질적이다. 주위의 이끼가 온통 거멓게 죽어있었다. 참을 수 없이 배가 고팠지만 이끼는 손으로 건드리니 가루로 부스러져 버리고, 그 가루는 너무 써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다.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 움직이기 힘들다. 내장을 토해낼 것 같은 메슥거림과 뼈가 살 속을 파고드는 고통이 주기적으로 밀려와서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다. 망막 안에 날개달린 존재의 잔상이 선명히 맺혀 떠나질 않는다. 나는 어떤 이유에선지, 내게 일어나고 있는 이 모든 일들-나를 인지하게 되고 생각할 수 있게 되고 짝짓기한 상대를 잡아먹고 고통에 시달리고 비정상적으로 성장하는 것-이 그 존재와 관련되어 있으리라는 강한 영감을 받는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목구멍에 넘긴 건 물 몇 모금이 전부였으나 그마저도 어둠처럼 쓰다. 고통 속에서 알주머니가 쏟아져 나왔다. 전부 희끄무레하고 탁한 빛으로 온전한 색이 아니었으나, 그렇게 구미가 당길 수가 없었다. 견딜 수 없는 충동에 이끌려 하나도 남김없이, 가죽 같은 주머니 막까지 정신없이 먹어치운다. 내게서 나온 것을 내가 모두 먹고 나자 비로소 약간의 힘이 돌아온다. 이곳에 더 있다가는 굶어죽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는 천정의 새어들어오는 빛을 바라본다. 물이 흘러나와 흘러 나가는 틈새는 이제 너무 좁다. 내가 눈을 찌르고 피부를 불태우는 그 흰 빛을 버틸 수 있을거라는 자신이 없다.
나는 꼼짝도 앉고 그 자리에 앉아서 빛을 쳐다 본다. 처음에는 도저히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는 빛이었지만 이제는 견딜만 하다. 어쩌면 빛은 이미 내 눈을, 시신경을 그 뒤의 뇌를 모조리 다 태워버렸는지도 모른다. 아득하게 흰 빛이 나를 가득 채웠을 때에, 나는 그 빛 가운데에서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는 환영을 수백번, 아니 수천 번 혹은 그 이상을 보았다. 지상에서 천상으로 날아오르는 환영과도 같이, 나는 변모한다. 약간 비틀거리면서, 가까스로 버석거리는 죽은 이끼로 덮힌 바위를 기어오른다. 구멍을 넘는 순간 정신을 잃고 반대편으로 굴러떨어졌다. 아직 내게는 천상으로 날아오를 날개가 달려있지 않다.
정신이 들었을 때 나는 어룽거리는 빛에 둘러싸여 있었다. 어리둥절해서 고개를 들어보니, 야트막한 굴 가득히 흐르는 물에 미쳐 반짝거리는 빛이 가득하다. 물 속에는 은빛의 비늘을 가진 것들이 날렵하게 움직이고, 대기의 흐름은 온통 소란스럽게 부딫혀 부서진다. 나는 그 너머에 그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이제껏 듣지 못하는 나를 끊임없이 불렀고, 지금도 그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울린다. 수많은 영롱한 반짝임의 가운데, 얕은 물에 살짝 잠긴 채 암벽에 기대인 것은, 오... 그것은 환영에서 본 것과 같은 형체를 지니고 있었다. 나직하게 일렁이는 빛은 수정 안에 갇힌 기묘한 뼈대를 비춘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 앞에 엎드러져 고개를 숙인다. 나는 마치 오랜 금식 수행으로 깨달음에 도달한 수행자 같다. 그는 내게 새 생명을 부여하고 빛으로 이끌어 나를 단순한 작은 도마뱀 이상의 것으로 만들었다.
빛은 주기적으로 강해지고 약해지는 것을 반복한다. 빛이 약해 서늘한 시간이 더 좋긴 하지만 이제 나는 빛을 견딜 수 있다. 물 속을 헤엄치는 비늘달린 것들은 잡기 까다로웠지만 내 입맛을 매료시켰다. 나는 힘차게 물로 뛰어들어 그것들을 쫓는다. 잡은 것 가운데 가장 좋은 것들을 그에게 바치는 것은 잊지 않았다. 며칠간 굴 주위에만 머무르다가 빛이 약해질 때에 더 멀리까지 나가본다. 나와 그가 있는 굴은 황야 한 가운데의 큰 바위산에 있었다. 반쯤 마른 풀들이 무성한 황야에 실 같은 물줄기들이 흐른다. 빛이 강해질 때면 도로 굴로 돌아왔다. 빛이 굴 안에 가득해지면 나는 경외감에 사로잡혀 오랫동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따금 빛이 점점 차올라 나를 집어삼키면 날개를 단 존재가 날아오르는 환영을 보곤 했다.
시일이 지나면서 나는 변화를 직접 체감한다. 나는 점점 더 크고 강하고 날래진다. 나의 안에 그가 가득한 것을 느낀다. 일어서서 걸을 수도 있지만 아직은 네 발로 기어다니는 것이 더 빠르다. 손가락은 더 길어지고 쥐는 힘이 강해진다. 나는 그가 원하는 형상대로, 그의 형상으로 변모하고 있다. 그는 오로지 경배만을 바랄 뿐, 다른 귀중한 것들을 즐기지 않는다. 그는 그 모든 것들 보다 더욱 더 귀중하기 때문이다. 그는 내가 온 마음과 정성을 다 바치는 것을 기뻐한다. 그는 언제나 나와 함께 있다. 나는 여전히 상당히 오랜 시간을 그를 응시하는데 쏟는다. 그와 영적으로 교감하며, 내가 더욱 높아지고 빛으로 가득찬 모습으로 변하는 것을 느낀다. 경배의 끝은 항상 날아오르는 빛의 환영이다.
두 발로 일어나 걷는 것이 기는 것 만큼 빨라지고 붙잡아 쥐는 힘이 강해졌을 즈음, 나는 나와 비슷한 형체의 것을 보았다. 꼬리도 없고 피부도 말라보였지만 내가 변모하는 모양과 닮아 있었다. 내가 이전보다 몇배는 더 커졌는데도 나보다 두 배는 더 크다. 왠지 그 자가 나와 그의 관계에 끼어들 것 같은 안 좋은 느낌이 든다. 놈은 나보다 더 그와 닮았다. 혹 그가 놈에게 새로이 관심을 기울일지 모른다는 조바심까지 끼어든다. 내가 계속 관찰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놈은 이 황야에 머무르기로 한 것 같다. 빛이 강해지는 때가 오면 바위산으로 와서 무언가를 찾고 있다. 그것이 나의 그일거라는 건 명백하다! 아직 나와 그의 굴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꼼꼼히 다니는 것으로 보아 조만간 찾아낼 것이다. 그러면... 그렇게 되면...
나는 오랫동안 반짝이는 빛과 수정 속의 뼈대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마음을 굳힌다. 놈을 죽여 버리면 될 일이다! 그러나 어떻게? 그는 나의 두 배는 크다. 정면으로 덤볐다가는 이기지 못할 것이다. 힘이 강해지긴 했지만 역시 무모하게 맞설 일이 아니다. 날마다 나의 몸이 새로워지고 있기에 시간만 충분히 주어지면 간단히 놈의 머리를 뜯어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 전에 놈이 굴을 찾아낼 것이다. 나는 날마다 놈의 뒤를 밟으며 엿보았다. 놈은 이상한 가죽을 뒤집어 쓰고 있는데, 거기에 이것저것 달아두었다가 바위를 깨고 들어올리고 할 때마다 빼내어 쓴다. 궁리 끝에 나도 내가 직접 덤벼들게 아니라 무언가 다른 것을 들고 그걸 사용하면 될 거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는 나를 격려하고 있다. 그는 항상 나와 함께 있다. 그는 언제나 나의 편이다. 자, 어서 방해자를 해치워 버리자!
상대는 똑바로 굴로 올라온다. 나는 바윗덩어리를 움켜쥔 손에 힘을 준다. 손가락은 이제 알맞은 길이가 되어 쥐고 붙잡는데 적당하다. 놈의 머리만한 바윗덩어리를 들어올리는 것이 약간은 힘겹다. 가누고 있다가, 놈이 굴의 입구에 발을 딛는 순간 달려든다. 정확히 겨눈 곳에 맞았으면 놈의 머리가 으스러졌을 테지만, 빗나가 어깨 근처를 때린다. 고함 소리가 얕은 굴 속에 쩌렁쩌렁 울린다. 할 수 없이 꼬리로 놈의 목을 휘감아 조였다. 반짝이는 빛으로만 가득했던 신성한 고요가 깨져, 평온은 철썩거리는 물 소리에 멀찌감치 물러나 버린다. 놈은 뒤집어쓴 가죽에서 날카롭게 빛나는 은빛 발톱을 빼내더니 나를 찔렀다! 내 목을 움켜쥐면서 재차 찌른 곳을 우벼 판다. 내가 몸부림치다가 문득 눈길이 수정 속에 빛나는 그에게 닿았을 때, 상상할 수 없는 힘이 내 안에서 폭발했다. 나는 단숨에 놈을 절반으로 꺾어버린다. 붉은 물이 확 튀고 버르적거리는 것으로 움직임이 멎는다. 갑작스러운 어지러움과 어둠이 덮치고 나는 나를 굽어보는 그의 발치에 쓰러진다. 이겼다- 그는 언제까지나 영원히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통증은 철썩이는 파도처럼 밀려나가 희미해진다.
정신을 차렸을 때 온 몸의 구석구석이 콕콕 쑤시고 뜨거웠다. 내 정신이 이겨내지 못할 고통은 지나갔지만 나는 그 고통의 마지막 잔류에도 허덕댄다. 어질어질한 몸을 일으키자 굴이 전보다 훨씬 더 비좁아보인다. 찔렸던 상처에는 살이 거품처럼 쏟아져나와 굳어있고, 바닥에는 부서져 떨어진 껍질조각들이 가득하다. 허기가 갑작스레 밀려들어 주위를 둘러보니 반으로 꺾인 시체가 있다. 가까이 다가가니 나는 이미 놈에 못지않게 크다. 다른 생각을 할 것도 없이 죄다 먹어치운다. 나를 찔렀던 은빛 발톱을 비롯한 그 이상한 가죽과 물품들을 그에게 바쳤다. 내게 승리를 가져다 준 것도 그이며, 내게 새 생명과 영광스러운 변모를 부여한 것도 그이다.
놈이 머물렀던 자리를 살피러 가서, 물품들 중 귀중해 보이는 것은 추리고 가져가기 힘든 것은 땅에 파묻었다. 귀중해 보이는 것들은 그에게 바칠 셈이다. 물품들을 뒤지던 중, 날개달린 살아있는 것이 든 통을 발견했다. 통을 부수고 꺼내자 홰를 치더니 드디어 날아오른다. 나는 그것이 빛 너머로 사라져 가는 것을 오랫동안 바라본다. 문득 그가 날아서 나를 떠나가 버릴 것이 두려워진다. 내게도 날개가 생겨 그와 함께 빛으로 향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그가 설마 나를 완전히 버리고 떠나가지는 않을 것이다...
며칠이 지나자 내가 죽인 것과 같은 종류로 보이는 두 발로 걷는 것들이 더 많이 나타났다. 이번엔 정말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서 굴 안에 숨어있었다. 수가 많으니 다 죽일 수도 없고, 꼼꼼하게 훑으면 굴을 찾아내는 것도 금방일 것이다. 다른 비밀스러운 곳에 그를 옮겨 안치하면 어떨까? 이 일대는 내가 샅샅이 돌아다녔기 때문에 모르는 장소가 없다. 당장 떠오르는 숨을 만한 곳도 꽤 된다. 괜찮은 생각이지만 지금 놈들이 어느 곳에 있는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빛이 약해진 때에 굴 밖으로 나가보아야 할 것 같다.
"진리의 빛이 우리가 나아갈 길을 비추기를."
"진리의 빛이 우리가 나아갈 길을 비추기를. 헤멘로 신부, 실종된 켈리 형제의 행방은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그의 표식은 여기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내일이면 찾을 수 있겠지요."
"켈리 형제가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이었죠? 그의 전서구는 진리교회가 보낸 서신을 그대로 달고 돌아왔습니다. 이렇게 빨리 구조대가 출발한 것도 중대한 사안이라 이단교회나 가장교회가 먼저 손 쓸 가능성이 큰 탓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제 권한 밖의 일이라서 자세한 것을 알지는 못하지만, 고천사와 관련된 사안으로 알고 있습니다. 켈리 형제는 탐험가 조합의 카르도 지부장일 뿐 아니라 '그 밤' 이전의 비밀들에도 상세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죠. 이번에 그는 너무 의욕에 넘쳤습니다. 교회의 집행부에서도 걱정한 나머지 천연자석의 표식을 특별히 그에게 주었지만-"
"켈리형제에게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으리라고 속단하지는 맙시다. 오로지 주님의 뜻에 달린 일이니까요. 참, 그런데 어제 기묘한 생물을 사로잡았다지요?"
"야간에 감시조에게 발각되어 포획되었다더군요. 임넬 신부가 그 생물이 천상의 물질에 노출된 변형체로 드문 표본이라고 기뻐했습니다. 그의 조수들이 해부해서 자세한 조직구조를 연구하고 있을 겁니다."
"임넬 신부가 아까 제게 열렬히 설명했지만 이해하기 힘든 내용입니다. 워낙 전문적인 게 되어놔서... 조직이 단기간에 급격하게 발달했다고 하던가? 얼핏 보기로는 거의 사람만한 크기였는데, 원형이 되는 생물은 작은 도마뱀인 것 같다더군요. 원시적인 수준의 지성을 갖추고 있을 수도 있다고 합디다."
"아직 세상에는 풀리지 않은 신비와 비밀들이 너무도 많지요. 주님의 뜻에 따라 우리가 이 귀중한 지식들을 습득하길 기도할 뿐입니다."
그 때 잠시 소란이 일더니 야영지 전체가 시끄러워진다. 사람 하나가 급히 달려와 전했다.
"표본이 달아났습니다! 완전히 절개해 내부기관을 적출한 상태였는데- 지금 추적조가 뒤쫓는 중입니다!"
나는 헐떡거리며 달리다시피 긴다. 이질감, 속을 가득 메운 텅 빈 공허감! 놈들은 나를 칼로 찢고 베고 속을 들어냈다, 나는 내 숨이 가쁜 만큼 남은 목숨이 길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다 - 어쩌면 나는 이미 죽은 채로 몸만 움직이고 있을지도 모르지. 죽고싶지 않아-죽고싶지 않아- 죽기 전에 그에게로, 그의 빛나는 날개를 다시 한번 보았으면, 그의 발치에 쓰러져 그의 비상을 다시 한번- 아니다. 그라면, 그라면 내게 새 생명을 한번 더 줄 수 있을지도 몰라, 나를 변모시켰던 힘으로, 나의 시야를 덮어오는 죽음을 걷어내고 찬연하게 빛나는 날개를 달아줄지도 몰라- 그는 그렇게 해 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허우적거리면서 굴 속으로, 나의 그가 기다리고 있는 굴로 기어들어간다. 반짝거리는 물에 비쳐 어른 거리는 빛에 감싸여 수정 속의 뼈대는 더없이 아름답게 빛난다. 몸에 충만한 힘이 사라져버린 내장기관을 복구시키며 나의 허물어져가는 생명을 덧대어 붙인다. 아무래도 재생하기에는 남아있는 생명이 너무 적은 탓인지, 부글거리던 살이 급기야는 끓어올라 녹아내린다. 이윽고 나의 허물이 서서히 멀어지며 나는 빛으로, 그의 일부로 화하여 그와 함께 승천하는 것이었다. 섬광이 모든 것을 채운다. 나는 날개를 한껏 펴고 천상을 향해 비상한다.
카르도 지방의 황야에서 발생한 섬광은 대륙 전역에서 관측되었다. 솟구쳐 천궁으로 향하는 빛기둥은 세 교회를 동시에 긴장하게 만들었으며, 제 1교회의 교민들이 그저 어느 지방에 일어난 이적이겠거니 하는 동안 교회들의 집행부는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다. 그 결과 제 2 교회 소속 말레쿠도 신부를 포함한 11인의 사망과 제 3교회 측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3인의 사망 등 상당한 유혈사태가 있었다. 그러나 사건 자체의 본질보다는 그와 관련된 교회간의 충돌이 더 가시적이었던 바, 이적에 대한 관심은 자연히 줄어들 수 밖에 없었다. 이를 두고 제 3교회가 의도한 바 대로 정국이 흘러간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실제로 이 섬광이 지닌 의미가 무엇인지 설명할 수 있는 이가 없으므로 제 2교회는 이 사건을 곧 종결지었다.
섬광이 폭발하며 천궁으로 치솟아 오를 때, 그를 가만히 내려다 보고 있던 사내가 있었다. 사내는 한 때 그와 함께 창조되었으나 대환란의 시기에 사라졌던 존재의 유해의 일부가 다시 그가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 사내의 입은 거의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그 존재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 "메타트론." 그리고 다음 순간, 사내의 모습은 사라지고 이미 그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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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날개' 단편 시리즈는 계속됩니다. ~_~
메타트론은 이름과 일부만 알려졌지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는 천사라서 멋대로 쓰는 소설에 등장시키기에 퍽 좋습니다. ㄱ- 이 글은 어느 작은 도마뱀이 괴물(...)이 되었다가 죽기 까지의 이야기랄까... 공책에 쓰고 나서 다시 옮긴건데, 영화 괴물을 보고 와서 공책에 써내려간 내용을 보니 뭔가 느낌이 묘했달까나. -ㅁ-;
상징...이라기 보다는 암시적으로 변모를 설명하려 했는데.
자신의 인지->생각하고 꾀를 쓸수 있게 됨->절제->짝을 잡아먹음->빛을 견딜 수 있게 됨 ->천사의 유해를 숭배하게 됨->인간을 죽이고 먹어치움->죽음의 위기->승천(혹은 죽음. -_-)
대강 이런 과정을 거쳐서 도마뱀은 도마뱀 이상의 존재가 됩니다. -_-
사실 메타트론의 유해 자체는 의지도 없고 도마뱀이 생각하는 것처럼 누구에게 힘을 베푼 적도 없습니다. 거기에 남아있는 권능이 새어나와 어쩌다 그렇게 된 것 뿐이지. 불쌍한 건 열심히 믿다가 하늘로 가버린 도마뱀 뿐이군요;
가장교회라는 표현은 제 2교회에서 제 1교회를 부르는 말로 진실은 빛과 같아서 똑바로 쳐다보면 눈을 멀게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우매한' 민중들에게 진실을 일단은 감추게 해 주는 역할을 한다는 뜻으로 쓰는 말입니다.
마지막의 사내는... 으음. 앞으로 '잃어버린 날개' 시리즈에서 종종 등장합니다. 뭐 누군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겠죠-ㅅ-
티끌 같은 세상속에 작은 모래알 하나,
한바탕 미친 바람 불고 나면 그 간 곳을 모르온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