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연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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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8
후우우우우우우우.
창공의 대기는 지독히 차고 시리다. 대기의 매서운 날개가 스치고 지나가는 긴 휘파람 소리 이외에 창공은 그를 가득히 메우고 있는 비현실적인 빛처럼 오로지 침묵하고 있을 뿐이다. 어떠한 존재도 그 광경 앞에서는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대지를 굽어보는 창공 속에서 깨달은 자들의 선단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그 고요의 일부가 된 채로, 마치 법칙이 '위로 떠오를지라'로 바뀌기라도 한 듯이 놀라운 속도로 계속 상승하고 있다.
선단에는 죽음과도 같은 정적이 감돌고 있다- 아니, 정확하게는 죽음 그 자체가 감돌고 있다는 표현이 옳다. '최종전쟁'을 위해 분연히 창공으로 발을 내딛은 깨달은 자들 가운데 살아남은 자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비행정마다 가득히 실린 쓰러진 시체들은 그 자체만으로 지옥의 풍경인 것 같다. 여지없이 부서져 나간 벽 안쪽으로는 선실에서 미처 나오지 못한 깨달은 자들이 흡사 단번에 꿰여 휘둘러진 것처럼 박살나 피범벅이 되어있다. 잘려나가 기울어 건들거리는 갑판에는 가까스로 떨어지지 않는 시체들이 쌓여 바람에 흔들거린다. 선단의 모든 곳에 죽음과 정적이 가득할 뿐, 살아서 움직이는 것이 없다. 제어를 벗어난 부유력 때문에 선단은 오직 시체들만을 실은 채로 끝없이 상승해간다.
사내는 숨을 몰아쉬며 고통을 가누었다. 아무리 그의 운명이 어그러져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방황할 운명이라 해도, 그의 운명을 이렇게 어그러뜨린 자-신과 그의 의지를 따르는 천사들에게서 피해 갈 수는 없다. 목천사의 상징물인 막대가 흡사 투창처럼 사내의 왼쪽 옆구리를 꿰뚫었고-물론 천사는 그 대가를 축복받은 환희의 종국으로 치루었다- 또 하나가 오른쪽 갈비뼈를 뚫고 들어왔다. 온 몸은 거친 바람 속에서 노곤하고, 크고 작은 상처들에서 자꾸만 기력이 새어나간다.
이미 덮개가 반쯤 날아가버린 비행선의 최상층부는 사내의 존재로 인해 다른 곳과는 풍경이 달랐다. 위험스레 기울은 바닥을 구르는 시체들은 깨달은 자들의 것 뿐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천사들의 것이 더 많을 성 싶다. 방아쇠를 쥔 손가락은 감촉이 없었고 총신은 뜨겁게 달아올라서 탄창을 갈아낄 수가 없었다.
많은 피해를 입은 전초전 후, 깨달은 자들은 기습에 대비해 약간의 불침번을 남겨두었다. 그러나 이어진 공격은 기습의 개념을 한참 벗어나는 것이었다 - 온 하늘이 성스러운 서광으로 덮히고, 144만의 대군이 일제히 찬송가를 부르며 날아내려왔다.
찬송, 찬송, 주님의 이름으로 찬송. 만물을 빚으신 분의 이름으로 찬송.
만군의 주, 이기시는 분, 내리쳐 부수시는 분,
나는 주의 군병, 주께서는 나의 장수, 일만기의 적 앞에서도 나 오직 주를 따르리.
보소서, 널리운 시체와 넘쳐 흐르는 적의 피,
나의 검은 베어 무디어지고 나의 날개는 얼룩졌으니
높이 들린 주의 기치 아래 그를 찬송하리라
찬송, 주님꼐 나라와 권세와 능력과 영광과 승리가,
승리자, 구원자, 심판자, 처음이시며 또한 끝이신 분,
찬송, 찬송, 찬송.
어리운 광채에 밤은 대낮처럼 밝았고 그 빛의 아래에서 깨달은 자들은 일방적으로 학살당했다. 미친듯이 쏟아붓는 포화도, 144만이나 되는 천사들의 대군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사실 144만이라는 숫자는 천상의 군대 전체에서는 겨우 선봉대 수준에 지나지 않을 것이었지만, 천사들의 격류는 온 선단을 샅샅히 훑고 지나갔다.
운이 좋게도 소녀는 감히 나서지 못하고 사내의 등 뒤에서, 첫번째 공격에서 목숨을 잃은 깨달은 달의 시체에 겁에 질린 채 그저 웅크리고만 앉아 있었다. 그 덕택에 거의 대부분의 깨달은 자들이 죽으며 사냥감이 적어진 천사들의 지휘체계가 엉크러지고 천사들이 살육의 쾌락만을 즐기는 유희가 시작될 때에도 목숨을 부지 할 수 있었다. 아직 더 피를 흘릴 수 있는 살아있는 인간을 찾아 천사들이 떼를 이루어 몰려들었다 - 점차 선단의 비행정 들 일부에서 그나마 버티던 격렬한 저항히 수백의 천사들을 추락시킨 끝에 잠잠해지자, 천사들은 또 다른 저항을 찾아 자리를 옮겼다. 저항은 그들에게 있어서 유희에 당연히 따라야 하는 조건일 따름이다. 그 때문에 사내가 탄 비행정에서 사내와 소녀를 뺀 모든 깨달은 자들이 목숨을 잃었을 때, 소녀가 아닌 사내가 천사들의 표적이 되었던 것이다. 만일 소녀가 약간이라도 저항하려 들었더라면 눈 깜짝할 사이에 낚아채여서 까마득한 상공에서 수천의 천사들에 의해 갈기갈기 찢겼을 테지만, 소녀는 꼼짝도 하지 못했고 이것이 비행정의 최상층 외벽이 통째로 날아가는 전투에서도 소녀를 구했다.
그러나 시체 더미에 둘러싸여 피범벅이 된 소녀의 눈은 어딘지 모르게 초점이 흐렸다. 인간의 영혼은 섬세하고 가녀린 보석과도 같아서, 그가 감당해 낼 수 없는 현실에 직면했을 때 보석은 산산히 부서진다. 보석의 파편들은 저 아래의 심연으로, 아래로 떨어져 사라지고, 이제는 눈 앞에 어떤 것이 나타나도 그 영혼은 상처입지 않게 된다. 소녀의 쾌활한 천성은 가벼운 배가 거대한 파도 사이를 빠져나가는 것처럼 지옥과 같은 광경들을 피해나가려 했지만, 바다 전체가 거꾸로 뒤집혔을 때는 피할 곳이 없었다. 소녀의 영혼은 침몰해 버렸고, 누구도 깊숙히 가라앉은 영혼을 인양할 수 없게 되었다. 소녀는 그저 시체 무더기 한가운데에 피범벅이 되어 앉아서, 오스스 오르는 상공의 한기에 몸을 떨고 있을 뿐이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사내는 주위를 살폈다. 어디에도 움직임은 없었다. 모두가 죽어 버린 건가? 모두가... 그가 겨우 지켜낸 소녀는 정신이 죽어버렸다는 것 쯤은 알고 있었다. 이래서야 소녀는 시체나 다를 바가 없다. 아무도 없단 말인가? 그 모든 것들을, 진실을 알게 될 자, 그들 모두의 운명에 숨겨진 비밀을 알게 될 자는. 신이 자신들을 내어치려 한다는 사실을 알은 것만으로 진정 깨달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을 빼면 나머지는 믿고 있는 자들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인간다운 인간으로써 진실을 알아야만 했다. 그런데, 아무도 없다고? 사내는 웃음이 치밀어 올라오는 것을 느꼈지만 그 웃음은 폐부를 관통한 막대 때문에 쿨럭거리는 기침으로 잦아들었다. 사내는 자신이 지쳤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가 태어난 때로부터 지금 이 순간 말세에 이르기까지 그가 겪어온 모든 것들이 법칙의 사슬에 매여 위태롭게 시간의 격류 속에서 흔들리며 사내를 끌어들이려 하고 있었다. 그래, 때가 임박한 거야. 사내는 이제껏 몇천번, 아니 몇만번이고 되뇌어 왔던 말을 다시 중얼거렸다. 지난 세월 동안 사내가 환희에 차 그 말을 중얼거리던 때는 수없이 많았건만, 결국 때는 오늘에 이르러서야 왔다. 그토록 간구하던 과거와는 달리 이제 사내는 오히려 마음이 차갑게 가라앉고 냉철해지고 있었다. 때가 임박했어... 다시한번 폐부의 짜릿한 통증이 신음처럼 새어나왔다. 한기가 상처를 타고 흘러드는 것 같다.
사내는 이를 악물고 갈비뼈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막대를 잡아 뽑았다. 사내는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았지만 치솟는 피는 그가 보통 인간이라면 응당 내지를 비명처럼 붉다. 철거덩, 하고 막대가 떨어졌다. 금속성의 소리 때문인지, 피의 붉은 색깔 때문인지 소녀가 움찔한다. 사내는 방금 뽑아낸 창의 아래쪽에, 옆구리를 관통한 두번째 막대를 움켜쥐었다. 그에게 있어서 고통이란 것은 그저 그가 아직 죽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증거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피가 울컥 솟구치며 은빛 막대가 바닥에 구른다. 사내는 숨을 고르며 눈을 감고 생각했다. 내장이 상했을까? 보통 인간이나 야수, 사고, 재난 등에서라면 상해를 입지 않거나 혹은 입었더라도 급소는 '기적적'으로 피해갈 터이다(그리고 신의 의지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서 이는 물론 기적이다.) 그러나 신에게 다시 대항하고 있는 지금이라면? 신은 그의 운명을 어그러뜨려서, 세상이 끝나기 이전에는 죽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말세가 다 이르른 지금, 그가 끝내 신에게 죄를 묻지 못하고 죽게 된다면? 사내는 격렬한 부정과 증오로 몸을 부스스 떨었다. 그럴 수는 없어. 결코, 이대로 그의 뜻에 따라 휘둘리다가 사라질 수는 없어. 반드시, 나는 놈의 앞에 다시 나설 것이다.
들끓어오르는 감정으로 정신이 잠시 맑아졌지만, 그의 몸은 주인의 의지를 따르지 못했다. 역시 나는 놈의 뜻대로 이렇게 세상과 함께 사라지는 건가. 사내의 비통한 절규는 그의 내부에서만 감돌 뿐이다. 그는 아물아물해지는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살아나야 해. 살아나야 해. 여기서 죽을 수는 없어.
소녀의 멍한 시선은 움직이지 않는 사내의 뒷모습에 고정되어있다. 소녀의 영혼은 깊은 물 속같은 고요 아래 잠겨서, 고대의 어느 왕의 석상처럼 대지에 뿌리내린 듯 버티고 선 사내를 본다. 상공에서 거칠게 불청객을 훑고 지나가는 대기의 날개가 내는 휘파람 소리는 스산하기 그지없다. 현실같아 보이지 않는 주위의 풍경 속에서, 사내의 모습만은 유일하게 명확하게 비친다. 소녀의 영혼은 계속 깊히, 더 깊숙히 가라앉으면서 수면 너머에서 흔들리는 빛을 본다. 빛- 진실. 소녀의 영혼은 바스러진 손을 그 쪽으로 간구하듯 내 뻗었다. 실재하지 않는 손가락의 틈으로 빛을 등지고 선 사내의 뚜렷한 윤곽. 사내는 진실을 알고 있다. 무의미한 기억들이 공기방울처럼 소녀의 부수어진 영혼에서 빠져나와 수면으로 달아나듯 사라져버린다. 그가 죽었을까? 그가 죽을리가 없다는 확신이 미약한 영혼 속에서 의구심을 밀어냈다. 왜냐하면 진실이란 결코 죽지 않는 것이니까.
퍼득, 퍼득.
크게 홰를 치는 소리가 들리자, 사내는 눈을 떴다. 복부를 관통한 상처 말고도 온 몸에 가득한 크고 작은 상처들로 힘이 모두 빠져나가기라도 한 듯 몸이 잘 움직여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가만히 죽음을 기다릴 생각은 없다-그렇다면 애초에 여기에 오지도 않았을 터.
"안녕하십니까, 모든 인간들의 아버지시여. 꽤 지쳐 보이는데요?"
사내는 그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올렸다. 절그렁, 절그렁, 묵직하게 사슬들이 부딫히는 소리. 아직 재생력이 완전히 끊어지지 않은 한 천사의 육신이 마지막까지 남은 힘을 소진시키고 있을 때, 절그렁 거리는 소리가 잠시 멈추고 퍼억! 하는 고깃덩이 뜯겨나가는 소리가 들리자 그의 환희도 허무하게 점점히 붉은 피로 흩어진다. 가죽과 사슬과 못들로 이루어진 기묘한 구석구가 몸을 얽매고 있는, 날개 끝이 잘리워진 천사 둘이 방금 그들 중 하나가 목숨을 끊은 축복받은 육신에 뭉텅 떨어져나간 코를 대고 킁킁댄다. 굵직한 못이 박혀 눈물처럼 피가 흘러내린 자죽이 있는 눈이 바쁘게 주인의 눈치를 살폈다. 개가 조심스럽게 고깃덩어리에 접근하듯이 천사의 시체를 건드리던 두 천사는 그들의 목을 얽어맨 사슬을 쥔 주인이 자신들에게 별 관신이 없는 것을 알자 서로 다투어 게걸스럽게 시체를 먹기 시작한다.
"여전히 악취미로군, 릴리트."
사내의 조소어린 말에도 두 천사들의 목에 채워진 사슬을 쥐고 있는 여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콰직, 콱, 후루룩, 훌쩍 하는 시체 뜯어먹히는 소리. 그녀의 모습은 전형적인 요부이다 - 관능적인 아름다움, 그러나 그 육체에 매혹되어 접근하는 자들은 영혼마저 짓씹혀 삼키워지리라. 여인이 사내에게 대꾸했다.
"어련하시겠어요, 아버지 - 아니지- 사랑스러운 우리 자기라 해야하나?"
여인이 말 끝에 웃음을 흘렸다. 사내는 경멸어린 시선으로 지나칠 정도로 중요부위 만을 가린 복장의 여인과 그녀에게 복속된 두 천사의 모습을 본다. 눈 위를 가로지르는 가죽 띠와 그 위에 박힌 두꺼운 못으로 이미 천사는 앞을 볼 수 없을 터이나, 사내는 그의 고통과 정욕에 찬 눈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 너머로, 다른 인영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한 사람은 검고 넓은 옷을 차려입은 백발의 노신사이고, 한 사람은 키가 거의 보통 사람의 두배는 될만큼 크다. 그의 얼굴은 진물에 찌든 붕대가 감고 있다. 그 곁에 선 사람은 명확히 눈에 띄는 것은 없으나 허름한 복색에 비해 지나치게 큰 창을 든 것이 특이하다.
노신사가 코끝에 걸쳐진 안경을 들추어 올리며 말했다.
"어떻소, 아담? 진정한 깨달은 자들을 제외하고 살아남은 자들은 아무도 없소. 그들도 결국 저 무지한 속고 있는 자들과 다를 바 없는거요. 진실은 우리 안에서만 끝나게 되고, 이것만으로도 인간의 싸움이라고 할 만 하오."
"그런 말 하지 말게, 아스클레피오스. 진실이란 것은 무지를 몰아내는 빛이라네- 때로는 그 빛이 광원을 가려 버리는 일도 있지만."
사내는 그렇게 말하고 남은 두 사람 중 덩치가 큰 쪽에 고개를 돌렸다.
"그래, 이제 몸은 좀 괜찮느냐, 카인?"
"자식걱정은 어련히 하시는군 그래. 아아,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누가 뭐래도 자식에 대한 정은 소중한 법이니까, 그렇지 않느냐, 아들아?"
사내는 여인의 말을 무시했다. 거구의 젊은이가 나직하게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자 사내는 고개를 끄떡이고 남은 한 사람에게 물었다.
"창의 피는 아직도 떨어지고 있나?"
"그렇습니다. 놈의 피는 세상의 끝에서도 여전히 눈물을 흘리고 있을 모양입니다."
그의 앞에 선 세 사람-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너머로 여지껏 그가 인도했던 수많은 이들의 모습이 보인다. 더러는 서 있고, 더러는 날고 있다. 날개가 있으되 인간이고 천사이지 않다. 사내는 그들에게도 다가가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는 이를 악물고 숨을 들이마셨지만 곧 쿨럭이며 피를 토해냈다. 노신사가 단장을 짚은 채 언짢은 기색으로 말했다.
"무리할 필요는 없소. 어째서 불완전을 고집하는 거요? 빼았겼던 날개는 돌아왔소. 종말의 때는 다가왔소. 우리는 놈을 향해 날아올라갈 거요. 당신의 날개를 펼치시오, 아담. 증오와 분노에 굳이 고통을 더하겠다는 거요? 우리의 날개는 증오와 분노로도 충분하오."
"불완전하기에 우리는 인간이다, 우리는 저 빌어먹을 완전한 신 따위가 아니야. 나는 날개를 버릴 때 이미 다시는 날개로 날아오르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놈이 우리에게서 앗아간 것을 구차하게 되돌려 받으려 들 생각은 없어! 내게는 불완전한 인간이 있고, 그걸로 충분하다. 놈이 쉽게 주었다 빼었다 하는 것에 연연하지 않아."
여인이 과장 섞인 감탄을 했다. 사내가 쏘아보자, 여인이 이죽거렸다.
"흐-응, 아버지. 당신의 딸을 범할 때도 그렇게 무서우셨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버지께서 지상에서 찾은 인간으로써의 불완전함과 자유의지, 그리고 신이 빚은 욕망은 알 수 있었을텐데?"
사내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피범벅이 되어 너덜너덜해진 외투를 벗어던졌다. 그리고나서 손을 등 뒤로 돌려, 어깨 밑에서 자라나고 있는 아직은 작은 날개의 순을 잡아 떼어내 버렸다. 왈칵 솟는 피에 주위에 침묵이 돈다. 한참이 지나서야 뒤쪽에서 누군가가 외친다.
"그래서, 당신은 결국 그 길을 택했소? 허나, 이 조잡한 부유력으로 어떻게 신의 앞에 이르를 셈인가? 천궁의 돔을 박살내고 그 너머 암흑의 우주로 넘어가기라도 하겠다는 거요?"
"그만하면 되었다. 나는 네가 조잡하다고 말한 이 부유력으로 신에게 도달할 것이다. 이건 우리들만의 싸움이 아니다. 신이 지은 죄 - 그가 창조한 모든 피조물들이 그에게 합당히 내리는 심판이다. 인간들이 힘겹게 이루어낸, 신의 손을 빌리지 않고 겨우 그들이 밝혀낸 지식으로 놈에게 이르겠다. 모든 인간들과 함께, 이 비행정을 타고 끝까지 가겠다. 놈이 나를 자기 옥좌에 찧어 으깨버리려 행각한다면, 그게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줄테다."
"이 시체 무더기들이 진실을 들어주기라도 한답니까? 아버지, 당신은 인간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또 다른 누군가가 외쳤지만 사내는 고개를 젓고 옆의 소녀를 보았다.
"어머, 용케 살아남은 이브의 딸이 있었네. 그렇지만 보아하니 영혼은 산산히 부서져서 내 개들보다 나을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할 셈인가요? 이젠 좀 더 어린 것들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셨나봐-"
사내는 여인의 말을 무시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인간이다! 우리가 신에게 죄를 묻는 것은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직도 신의 뜻대로 놀아나는 천사 나부랭이가 아니다- 개중에는 날개를 잃었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하고 이제 다시 날개를 얻게 된 것에 기뻐하는 자도 있겠지. 그러나 우리가 복종이 아닌 자유의지를 택했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기억하라 - 우리는 인간이다! 진정 깨달은 자들, 진정한 인간이다!"
침묵. 사내는 몸을 돌려, 검고 긴 검을 꺼내든다. 침묵 위에 한 층의 침묵이 겹을 가했다. 검신부터 자루까지 칠흑처럼 검다. 광택도 없이 새까맣다. 사내는 검을 들어올렸다.
"나는 나의 날개를 뽑아내어 벼리었다. 나는 이것으로 놈을 치련다 - 이것이 나의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이다."
"당신은... 지나치게 인간답소, 아담."
누군가가 탄식처럼 내뱉는 소리. 사내는 돌아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선택이지. 그러나 신에게 대항해 싸우는데 그 어떤 무엇이 소용이 있을까? 결국 모든 것은 우리가 대항해 싸우려는 자의 손 안에 있다. 그럴바에야 나는 다시한번 더 내가 인간임을 드러내보이겠다."
창공의 대기는 지독히 차고 시리다. 대기의 매서운 날개가 스치고 지나가는 긴 휘파람 소리 이외에 창공은 그를 가득히 메우고 있는 비현실적인 빛처럼 오로지 침묵하고 있을 뿐이다. 어떠한 존재도 그 광경 앞에서는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대지를 굽어보는 창공 속에서 깨달은 자들의 선단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그 고요의 일부가 된 채로, 마치 법칙이 '위로 떠오를지라'로 바뀌기라도 한 듯이 놀라운 속도로 계속 상승하고 있다.
선단에는 죽음과도 같은 정적이 감돌고 있다- 아니, 정확하게는 죽음 그 자체가 감돌고 있다는 표현이 옳다. '최종전쟁'을 위해 분연히 창공으로 발을 내딛은 깨달은 자들 가운데 살아남은 자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비행정마다 가득히 실린 쓰러진 시체들은 그 자체만으로 지옥의 풍경인 것 같다. 여지없이 부서져 나간 벽 안쪽으로는 선실에서 미처 나오지 못한 깨달은 자들이 흡사 단번에 꿰여 휘둘러진 것처럼 박살나 피범벅이 되어있다. 잘려나가 기울어 건들거리는 갑판에는 가까스로 떨어지지 않는 시체들이 쌓여 바람에 흔들거린다. 선단의 모든 곳에 죽음과 정적이 가득할 뿐, 살아서 움직이는 것이 없다. 제어를 벗어난 부유력 때문에 선단은 오직 시체들만을 실은 채로 끝없이 상승해간다.
사내는 숨을 몰아쉬며 고통을 가누었다. 아무리 그의 운명이 어그러져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방황할 운명이라 해도, 그의 운명을 이렇게 어그러뜨린 자-신과 그의 의지를 따르는 천사들에게서 피해 갈 수는 없다. 목천사의 상징물인 막대가 흡사 투창처럼 사내의 왼쪽 옆구리를 꿰뚫었고-물론 천사는 그 대가를 축복받은 환희의 종국으로 치루었다- 또 하나가 오른쪽 갈비뼈를 뚫고 들어왔다. 온 몸은 거친 바람 속에서 노곤하고, 크고 작은 상처들에서 자꾸만 기력이 새어나간다.
이미 덮개가 반쯤 날아가버린 비행선의 최상층부는 사내의 존재로 인해 다른 곳과는 풍경이 달랐다. 위험스레 기울은 바닥을 구르는 시체들은 깨달은 자들의 것 뿐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천사들의 것이 더 많을 성 싶다. 방아쇠를 쥔 손가락은 감촉이 없었고 총신은 뜨겁게 달아올라서 탄창을 갈아낄 수가 없었다.
많은 피해를 입은 전초전 후, 깨달은 자들은 기습에 대비해 약간의 불침번을 남겨두었다. 그러나 이어진 공격은 기습의 개념을 한참 벗어나는 것이었다 - 온 하늘이 성스러운 서광으로 덮히고, 144만의 대군이 일제히 찬송가를 부르며 날아내려왔다.
찬송, 찬송, 주님의 이름으로 찬송. 만물을 빚으신 분의 이름으로 찬송.
만군의 주, 이기시는 분, 내리쳐 부수시는 분,
나는 주의 군병, 주께서는 나의 장수, 일만기의 적 앞에서도 나 오직 주를 따르리.
보소서, 널리운 시체와 넘쳐 흐르는 적의 피,
나의 검은 베어 무디어지고 나의 날개는 얼룩졌으니
높이 들린 주의 기치 아래 그를 찬송하리라
찬송, 주님꼐 나라와 권세와 능력과 영광과 승리가,
승리자, 구원자, 심판자, 처음이시며 또한 끝이신 분,
찬송, 찬송, 찬송.
어리운 광채에 밤은 대낮처럼 밝았고 그 빛의 아래에서 깨달은 자들은 일방적으로 학살당했다. 미친듯이 쏟아붓는 포화도, 144만이나 되는 천사들의 대군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사실 144만이라는 숫자는 천상의 군대 전체에서는 겨우 선봉대 수준에 지나지 않을 것이었지만, 천사들의 격류는 온 선단을 샅샅히 훑고 지나갔다.
운이 좋게도 소녀는 감히 나서지 못하고 사내의 등 뒤에서, 첫번째 공격에서 목숨을 잃은 깨달은 달의 시체에 겁에 질린 채 그저 웅크리고만 앉아 있었다. 그 덕택에 거의 대부분의 깨달은 자들이 죽으며 사냥감이 적어진 천사들의 지휘체계가 엉크러지고 천사들이 살육의 쾌락만을 즐기는 유희가 시작될 때에도 목숨을 부지 할 수 있었다. 아직 더 피를 흘릴 수 있는 살아있는 인간을 찾아 천사들이 떼를 이루어 몰려들었다 - 점차 선단의 비행정 들 일부에서 그나마 버티던 격렬한 저항히 수백의 천사들을 추락시킨 끝에 잠잠해지자, 천사들은 또 다른 저항을 찾아 자리를 옮겼다. 저항은 그들에게 있어서 유희에 당연히 따라야 하는 조건일 따름이다. 그 때문에 사내가 탄 비행정에서 사내와 소녀를 뺀 모든 깨달은 자들이 목숨을 잃었을 때, 소녀가 아닌 사내가 천사들의 표적이 되었던 것이다. 만일 소녀가 약간이라도 저항하려 들었더라면 눈 깜짝할 사이에 낚아채여서 까마득한 상공에서 수천의 천사들에 의해 갈기갈기 찢겼을 테지만, 소녀는 꼼짝도 하지 못했고 이것이 비행정의 최상층 외벽이 통째로 날아가는 전투에서도 소녀를 구했다.
그러나 시체 더미에 둘러싸여 피범벅이 된 소녀의 눈은 어딘지 모르게 초점이 흐렸다. 인간의 영혼은 섬세하고 가녀린 보석과도 같아서, 그가 감당해 낼 수 없는 현실에 직면했을 때 보석은 산산히 부서진다. 보석의 파편들은 저 아래의 심연으로, 아래로 떨어져 사라지고, 이제는 눈 앞에 어떤 것이 나타나도 그 영혼은 상처입지 않게 된다. 소녀의 쾌활한 천성은 가벼운 배가 거대한 파도 사이를 빠져나가는 것처럼 지옥과 같은 광경들을 피해나가려 했지만, 바다 전체가 거꾸로 뒤집혔을 때는 피할 곳이 없었다. 소녀의 영혼은 침몰해 버렸고, 누구도 깊숙히 가라앉은 영혼을 인양할 수 없게 되었다. 소녀는 그저 시체 무더기 한가운데에 피범벅이 되어 앉아서, 오스스 오르는 상공의 한기에 몸을 떨고 있을 뿐이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사내는 주위를 살폈다. 어디에도 움직임은 없었다. 모두가 죽어 버린 건가? 모두가... 그가 겨우 지켜낸 소녀는 정신이 죽어버렸다는 것 쯤은 알고 있었다. 이래서야 소녀는 시체나 다를 바가 없다. 아무도 없단 말인가? 그 모든 것들을, 진실을 알게 될 자, 그들 모두의 운명에 숨겨진 비밀을 알게 될 자는. 신이 자신들을 내어치려 한다는 사실을 알은 것만으로 진정 깨달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을 빼면 나머지는 믿고 있는 자들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인간다운 인간으로써 진실을 알아야만 했다. 그런데, 아무도 없다고? 사내는 웃음이 치밀어 올라오는 것을 느꼈지만 그 웃음은 폐부를 관통한 막대 때문에 쿨럭거리는 기침으로 잦아들었다. 사내는 자신이 지쳤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가 태어난 때로부터 지금 이 순간 말세에 이르기까지 그가 겪어온 모든 것들이 법칙의 사슬에 매여 위태롭게 시간의 격류 속에서 흔들리며 사내를 끌어들이려 하고 있었다. 그래, 때가 임박한 거야. 사내는 이제껏 몇천번, 아니 몇만번이고 되뇌어 왔던 말을 다시 중얼거렸다. 지난 세월 동안 사내가 환희에 차 그 말을 중얼거리던 때는 수없이 많았건만, 결국 때는 오늘에 이르러서야 왔다. 그토록 간구하던 과거와는 달리 이제 사내는 오히려 마음이 차갑게 가라앉고 냉철해지고 있었다. 때가 임박했어... 다시한번 폐부의 짜릿한 통증이 신음처럼 새어나왔다. 한기가 상처를 타고 흘러드는 것 같다.
사내는 이를 악물고 갈비뼈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막대를 잡아 뽑았다. 사내는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았지만 치솟는 피는 그가 보통 인간이라면 응당 내지를 비명처럼 붉다. 철거덩, 하고 막대가 떨어졌다. 금속성의 소리 때문인지, 피의 붉은 색깔 때문인지 소녀가 움찔한다. 사내는 방금 뽑아낸 창의 아래쪽에, 옆구리를 관통한 두번째 막대를 움켜쥐었다. 그에게 있어서 고통이란 것은 그저 그가 아직 죽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증거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피가 울컥 솟구치며 은빛 막대가 바닥에 구른다. 사내는 숨을 고르며 눈을 감고 생각했다. 내장이 상했을까? 보통 인간이나 야수, 사고, 재난 등에서라면 상해를 입지 않거나 혹은 입었더라도 급소는 '기적적'으로 피해갈 터이다(그리고 신의 의지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서 이는 물론 기적이다.) 그러나 신에게 다시 대항하고 있는 지금이라면? 신은 그의 운명을 어그러뜨려서, 세상이 끝나기 이전에는 죽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말세가 다 이르른 지금, 그가 끝내 신에게 죄를 묻지 못하고 죽게 된다면? 사내는 격렬한 부정과 증오로 몸을 부스스 떨었다. 그럴 수는 없어. 결코, 이대로 그의 뜻에 따라 휘둘리다가 사라질 수는 없어. 반드시, 나는 놈의 앞에 다시 나설 것이다.
들끓어오르는 감정으로 정신이 잠시 맑아졌지만, 그의 몸은 주인의 의지를 따르지 못했다. 역시 나는 놈의 뜻대로 이렇게 세상과 함께 사라지는 건가. 사내의 비통한 절규는 그의 내부에서만 감돌 뿐이다. 그는 아물아물해지는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살아나야 해. 살아나야 해. 여기서 죽을 수는 없어.
소녀의 멍한 시선은 움직이지 않는 사내의 뒷모습에 고정되어있다. 소녀의 영혼은 깊은 물 속같은 고요 아래 잠겨서, 고대의 어느 왕의 석상처럼 대지에 뿌리내린 듯 버티고 선 사내를 본다. 상공에서 거칠게 불청객을 훑고 지나가는 대기의 날개가 내는 휘파람 소리는 스산하기 그지없다. 현실같아 보이지 않는 주위의 풍경 속에서, 사내의 모습만은 유일하게 명확하게 비친다. 소녀의 영혼은 계속 깊히, 더 깊숙히 가라앉으면서 수면 너머에서 흔들리는 빛을 본다. 빛- 진실. 소녀의 영혼은 바스러진 손을 그 쪽으로 간구하듯 내 뻗었다. 실재하지 않는 손가락의 틈으로 빛을 등지고 선 사내의 뚜렷한 윤곽. 사내는 진실을 알고 있다. 무의미한 기억들이 공기방울처럼 소녀의 부수어진 영혼에서 빠져나와 수면으로 달아나듯 사라져버린다. 그가 죽었을까? 그가 죽을리가 없다는 확신이 미약한 영혼 속에서 의구심을 밀어냈다. 왜냐하면 진실이란 결코 죽지 않는 것이니까.
퍼득, 퍼득.
크게 홰를 치는 소리가 들리자, 사내는 눈을 떴다. 복부를 관통한 상처 말고도 온 몸에 가득한 크고 작은 상처들로 힘이 모두 빠져나가기라도 한 듯 몸이 잘 움직여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가만히 죽음을 기다릴 생각은 없다-그렇다면 애초에 여기에 오지도 않았을 터.
"안녕하십니까, 모든 인간들의 아버지시여. 꽤 지쳐 보이는데요?"
사내는 그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올렸다. 절그렁, 절그렁, 묵직하게 사슬들이 부딫히는 소리. 아직 재생력이 완전히 끊어지지 않은 한 천사의 육신이 마지막까지 남은 힘을 소진시키고 있을 때, 절그렁 거리는 소리가 잠시 멈추고 퍼억! 하는 고깃덩이 뜯겨나가는 소리가 들리자 그의 환희도 허무하게 점점히 붉은 피로 흩어진다. 가죽과 사슬과 못들로 이루어진 기묘한 구석구가 몸을 얽매고 있는, 날개 끝이 잘리워진 천사 둘이 방금 그들 중 하나가 목숨을 끊은 축복받은 육신에 뭉텅 떨어져나간 코를 대고 킁킁댄다. 굵직한 못이 박혀 눈물처럼 피가 흘러내린 자죽이 있는 눈이 바쁘게 주인의 눈치를 살폈다. 개가 조심스럽게 고깃덩어리에 접근하듯이 천사의 시체를 건드리던 두 천사는 그들의 목을 얽어맨 사슬을 쥔 주인이 자신들에게 별 관신이 없는 것을 알자 서로 다투어 게걸스럽게 시체를 먹기 시작한다.
"여전히 악취미로군, 릴리트."
사내의 조소어린 말에도 두 천사들의 목에 채워진 사슬을 쥐고 있는 여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콰직, 콱, 후루룩, 훌쩍 하는 시체 뜯어먹히는 소리. 그녀의 모습은 전형적인 요부이다 - 관능적인 아름다움, 그러나 그 육체에 매혹되어 접근하는 자들은 영혼마저 짓씹혀 삼키워지리라. 여인이 사내에게 대꾸했다.
"어련하시겠어요, 아버지 - 아니지- 사랑스러운 우리 자기라 해야하나?"
여인이 말 끝에 웃음을 흘렸다. 사내는 경멸어린 시선으로 지나칠 정도로 중요부위 만을 가린 복장의 여인과 그녀에게 복속된 두 천사의 모습을 본다. 눈 위를 가로지르는 가죽 띠와 그 위에 박힌 두꺼운 못으로 이미 천사는 앞을 볼 수 없을 터이나, 사내는 그의 고통과 정욕에 찬 눈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 너머로, 다른 인영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한 사람은 검고 넓은 옷을 차려입은 백발의 노신사이고, 한 사람은 키가 거의 보통 사람의 두배는 될만큼 크다. 그의 얼굴은 진물에 찌든 붕대가 감고 있다. 그 곁에 선 사람은 명확히 눈에 띄는 것은 없으나 허름한 복색에 비해 지나치게 큰 창을 든 것이 특이하다.
노신사가 코끝에 걸쳐진 안경을 들추어 올리며 말했다.
"어떻소, 아담? 진정한 깨달은 자들을 제외하고 살아남은 자들은 아무도 없소. 그들도 결국 저 무지한 속고 있는 자들과 다를 바 없는거요. 진실은 우리 안에서만 끝나게 되고, 이것만으로도 인간의 싸움이라고 할 만 하오."
"그런 말 하지 말게, 아스클레피오스. 진실이란 것은 무지를 몰아내는 빛이라네- 때로는 그 빛이 광원을 가려 버리는 일도 있지만."
사내는 그렇게 말하고 남은 두 사람 중 덩치가 큰 쪽에 고개를 돌렸다.
"그래, 이제 몸은 좀 괜찮느냐, 카인?"
"자식걱정은 어련히 하시는군 그래. 아아,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누가 뭐래도 자식에 대한 정은 소중한 법이니까, 그렇지 않느냐, 아들아?"
사내는 여인의 말을 무시했다. 거구의 젊은이가 나직하게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자 사내는 고개를 끄떡이고 남은 한 사람에게 물었다.
"창의 피는 아직도 떨어지고 있나?"
"그렇습니다. 놈의 피는 세상의 끝에서도 여전히 눈물을 흘리고 있을 모양입니다."
그의 앞에 선 세 사람-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너머로 여지껏 그가 인도했던 수많은 이들의 모습이 보인다. 더러는 서 있고, 더러는 날고 있다. 날개가 있으되 인간이고 천사이지 않다. 사내는 그들에게도 다가가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는 이를 악물고 숨을 들이마셨지만 곧 쿨럭이며 피를 토해냈다. 노신사가 단장을 짚은 채 언짢은 기색으로 말했다.
"무리할 필요는 없소. 어째서 불완전을 고집하는 거요? 빼았겼던 날개는 돌아왔소. 종말의 때는 다가왔소. 우리는 놈을 향해 날아올라갈 거요. 당신의 날개를 펼치시오, 아담. 증오와 분노에 굳이 고통을 더하겠다는 거요? 우리의 날개는 증오와 분노로도 충분하오."
"불완전하기에 우리는 인간이다, 우리는 저 빌어먹을 완전한 신 따위가 아니야. 나는 날개를 버릴 때 이미 다시는 날개로 날아오르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놈이 우리에게서 앗아간 것을 구차하게 되돌려 받으려 들 생각은 없어! 내게는 불완전한 인간이 있고, 그걸로 충분하다. 놈이 쉽게 주었다 빼었다 하는 것에 연연하지 않아."
여인이 과장 섞인 감탄을 했다. 사내가 쏘아보자, 여인이 이죽거렸다.
"흐-응, 아버지. 당신의 딸을 범할 때도 그렇게 무서우셨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버지께서 지상에서 찾은 인간으로써의 불완전함과 자유의지, 그리고 신이 빚은 욕망은 알 수 있었을텐데?"
사내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피범벅이 되어 너덜너덜해진 외투를 벗어던졌다. 그리고나서 손을 등 뒤로 돌려, 어깨 밑에서 자라나고 있는 아직은 작은 날개의 순을 잡아 떼어내 버렸다. 왈칵 솟는 피에 주위에 침묵이 돈다. 한참이 지나서야 뒤쪽에서 누군가가 외친다.
"그래서, 당신은 결국 그 길을 택했소? 허나, 이 조잡한 부유력으로 어떻게 신의 앞에 이르를 셈인가? 천궁의 돔을 박살내고 그 너머 암흑의 우주로 넘어가기라도 하겠다는 거요?"
"그만하면 되었다. 나는 네가 조잡하다고 말한 이 부유력으로 신에게 도달할 것이다. 이건 우리들만의 싸움이 아니다. 신이 지은 죄 - 그가 창조한 모든 피조물들이 그에게 합당히 내리는 심판이다. 인간들이 힘겹게 이루어낸, 신의 손을 빌리지 않고 겨우 그들이 밝혀낸 지식으로 놈에게 이르겠다. 모든 인간들과 함께, 이 비행정을 타고 끝까지 가겠다. 놈이 나를 자기 옥좌에 찧어 으깨버리려 행각한다면, 그게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줄테다."
"이 시체 무더기들이 진실을 들어주기라도 한답니까? 아버지, 당신은 인간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또 다른 누군가가 외쳤지만 사내는 고개를 젓고 옆의 소녀를 보았다.
"어머, 용케 살아남은 이브의 딸이 있었네. 그렇지만 보아하니 영혼은 산산히 부서져서 내 개들보다 나을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할 셈인가요? 이젠 좀 더 어린 것들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셨나봐-"
사내는 여인의 말을 무시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인간이다! 우리가 신에게 죄를 묻는 것은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직도 신의 뜻대로 놀아나는 천사 나부랭이가 아니다- 개중에는 날개를 잃었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하고 이제 다시 날개를 얻게 된 것에 기뻐하는 자도 있겠지. 그러나 우리가 복종이 아닌 자유의지를 택했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기억하라 - 우리는 인간이다! 진정 깨달은 자들, 진정한 인간이다!"
침묵. 사내는 몸을 돌려, 검고 긴 검을 꺼내든다. 침묵 위에 한 층의 침묵이 겹을 가했다. 검신부터 자루까지 칠흑처럼 검다. 광택도 없이 새까맣다. 사내는 검을 들어올렸다.
"나는 나의 날개를 뽑아내어 벼리었다. 나는 이것으로 놈을 치련다 - 이것이 나의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이다."
"당신은... 지나치게 인간답소, 아담."
누군가가 탄식처럼 내뱉는 소리. 사내는 돌아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선택이지. 그러나 신에게 대항해 싸우는데 그 어떤 무엇이 소용이 있을까? 결국 모든 것은 우리가 대항해 싸우려는 자의 손 안에 있다. 그럴바에야 나는 다시한번 더 내가 인간임을 드러내보이겠다."
티끌 같은 세상속에 작은 모래알 하나,
한바탕 미친 바람 불고 나면 그 간 곳을 모르온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