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어버렸죠?”
“그래.”

  랜서는 수화기 너머에는 이제 없을 것이다. 박사는 천천히 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그라면 약속을 어기지는 않을 거야. 내일 7시에 그는 반드시 올 거다.”

  나갈 때 켜뒀던 커피포트에서 흰색의 컵에 커피를 두 잔 따라내고는 테이블로 다가갔다. 푹신한 소파에 몸을 노곤한 듯이 푹 묻어두고 있던 젊은 청년, TSS 정보국 요원인 이준기는 커피 잔이 테이블 위에 닿으면서 내는 소리를 듣고 엉겨 붙듯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레이카테야를 치우듯이 휘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누구일 것 같나?”

  그는 고맙다는 인사도, 박사가 한 질문에 대한 대답 같은 것조차도 전혀 하지 않고 바로 잔에 손을 대었다. 박사는 굳이 책잡지 않고 바로 말을 이었다. 눈앞의 청년이 좀처럼 말을 꺼내지 않는 과묵한 성격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은 잘 끝냈나?”

  아버지 같이 물어오는 박사.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청년은 박사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다. 박사는 청년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다.
준기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 성공입니까?”
“내가 무슨 의도를 담고 이런 일을 벌였는지 추론해보게나. 이미 하고 있지 않았나?”

  박사가 대답을 회피하자 준기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는 컵의 가장자리를 만지작거렸다. 유리제품이라서 보온성은 제로에 가까웠지만 블랙커피의 따스함이 곧장 전해져왔고, 세라믹 제 컵과는 다른 의미로 마음에 들었다. 방금까지 얼어있었던 손이 그 열기에 녹으면서 약간은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미리 예상하고 있었겠지요.”
“뭘 말인가?”
“그들이 다시 습격당할 거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두 번째의 파상공격에는 당해내지 못할 거라는 기우도 함께, 목적은 속이고 2중대를 투입한겁니다.”
“무슨 목적으로?”
“보호겠지요.”
“… 반은 맞았네.”

  말을 마친 리글러스터 박사는 눈에 띌 정도로 침울해하고 있었다. 조금 느릿한 동작으로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그는 자신의 책상에서 연황색의 파일을 하나 집어 들었다. 기밀계획보고서라는 개성 없는 이름의 그 파일은 상당히 얇았다. 거친 손놀림으로 파일을 잡아들은 그는 다시 준기 앞의 소파에 몸을 묻었다. 지나치면서 쳐다본 레이카테야는 박사와 비슷하게 우울한 모습으로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녀는 제반 사정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 잊었던 사실을 다시금 떠올린 그녀는 힘없이 박사 옆으로 돌아와 소파 위에 주저앉았다. 당연히도 소파는 가라앉지 않는다.
  박사는 10년 치 피로를 한꺼번에 얻은 것 같은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테이블 위에, 컵에 닿지 않도록 힘을 가감해서 파일을 던져 건넨다. 준기는 잠시 굳은 표정을 지었다가 이윽고 파일을 들어 내용을 읽어본다.
박사의 자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완전히 보호가 목적이라면 차라리 낫겠지. 이건 위선일세. 그야말로 위선이고, 기만이지.”

  준기는 생각했다. 문서의 내용이 진정 사실이라면 이것이야말로 진정 잔인하다고. 파일의 내용을 속독하면서 그의 얼굴은 차츰 굳어지고 있었다. 그의 분위기는 눈에 띌 정도로 가라앉고 있었다. 평소에 풍기는 과묵한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우울함과, 거기에 섞인 분노 그리고 약간의 냉소가 입가에 머물렀다.
  하지만 정보부 요원은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기술을 먼저 배운다. 그는 비웃듯 피식거리면서 말했다.

“궤변입니까?”

박사는 순순히 수긍했다.

“맞아.”

  청년은 박사의 말에 비웃는 듯한 웃음을 머금고 이를 드러낸다. 웃는 것도 같은, 격노하는 것도 같은 판단하기 애매한 표정을 짓고 그가 씹어뱉듯 말한다.

“더 이상의 희생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니, 전 차라리 그들을 동정하겠습니다.”
“동정하게. 그건 결코 싸구려 감정이 아니니까. 하지만 그 내용은 사실일세.”

  준기는 알고 있었다. 타인의 희생을 보며 인도주의적으로 생각하는 자신의 머리와, 이해타산에서 길을 찾아내는 자신의 인생 구도의 역대칭을. 그는 이 상호모순적인 생활을 불쾌하게 여겼다.
  보고서의 내용은 간단하다. 어느 행위와 그것이 불러오는 결과. 그리고 막아낼 대안에 대하여 적혀있을 뿐. 그런 단편적인 사실에 대해 너무나 냉철하게 정의하고 있었기에, 단지 몇 자 적혀있을 뿐인 흰 색의 A4용지 몇 장은 더욱 잔인했다.
  한 인간의 업을 송두리째 빼앗기는 궁극의 강탈이자 인생의 박탈 자체를 의미하는 그 행위는 죽음보다도 더욱 잔인하다. 그 행위의 잔인성이 어느 정도인지 자각할 수 있었기 때문에 준기는 더 이상의 비난을 하지 않았다. 우울하다고 생각하며 뒤늦게 계획 입안자가 누구인지 알아보려고 첫 페이지를 펼쳤다.

“…….”

  그는 침을 삼켰다. 방금까지 커피가 들어가고 있었는데도 이상할 만큼 목은 바싹 말라 있었다. 그는 눈을 굴려 앞을 쳐다봤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건성으로 넘어간 보고서 첫 페이지 우측 하단에 적혀있는 계획 입안자의 이름은 ‘레이카테야’였다.
  그 내용 자체가 무미건조했기에 더욱 화가 났었던 것인데 돌이켜보니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 계획의 입안자인 그녀는 AI다. 지시한 바에 따라 최선의 결과를 도출해내는 컴퓨터. 최첨단 기술의 산물인 양자컴퓨터의 연산체에 불과하다. 그것에 불과한 만큼 그녀는 무력했다. 청년은 레이카테야를 비난할 수 없었다. 비난해선 안 되는 것이다.
  미안한 감정을 품고,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는 자조하고 있었다.
  아까전의 생각을 다시 떠올려본다. 뒤늦게나마 그녀의 행동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합리적으로 생각해볼까? 박사가 아나라는 여자아이에게 모질게 굴 이유는 이미 충분한거야.
준기의 생각대로 박사는 모질게 굴었다. 이후 들려온 그의 말은 동정심과 결의가 섞인, 이율배반의 정수와도 같은 느낌이 들었다.

“… 다른 누구도 아닌 그의 딸이기 때문에… 나로서는… 그의 딸을 차가운 11월의 빗속에 내동댕이쳐야 할 이유가 있었네.”

  말에는 자신감이 없었다.
  준기 역시 침울해진 기색으로 박사에게 묻는다.

“하지만 이해는 되지 않습니다. 아나라고 했던가요. 물론 그 소녀의 처지는 딱하지만 우리는 각박할 정도로 일을 처리해야 할 필요가 있을 텐데요.”
“아직까지 사상자는 나지 않았잖은가. 그리고 내가 그의 후원자라는 사실을 잊은 건가?”

  그 사실만이 유일하게 유쾌하다.

“언제가 되겠습니까. 그들이 이 사실을 아는 건.”
“내일이 한계일세. 그 정도면 가용 가능한 거의 모든 전력이 투입될 테니, 그들이 사실을 알아야 할 때는 그때고… 그리고 위선일지도 모르겠지만….”

  박사는 숨을 들이쉬었다. 그가 자신의 판단에 얼마나 중압을 받고 있는지에 대한 반증이나 다름없는 행동이었다. 잠시 흡연가가 부럽다는 생각을 한 박사는 피식 웃었다. 자조를 담아서.

“판단은 그 아이가 스스로 내려야 한다고 생각하네. 불가능하다고도 생각하지만.”



“좋지 않군. 정말로.”

  필사적인 도주. 필사적인 추격. 행해지고 있는 것은 도시의 어느 인적 드문 고가도로. 험머의 스티어링을 돌려 꺾으며 물웅덩이를 바스러뜨린다. 인수는 쓰게 내뱉었다.
  인수가 지나치는 길에는 생소한 광경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오가는 사람이 없었다. 늦은 밤이라곤 해도 오가는 택시 한 두어 대 정도는 지나쳐야 정상일 텐데 그런 통행조차 없었다. 무슨 짓을 저질러도 볼 사람이 없다는 건 나름대로 좋긴 했지만, 양날의 검이기도 하다.
  일례로, 놈들은 거리낌 없이 험머를 덮쳐들고 있었다.

“죽을 놈은 죽고 싶은 짓 다 하는 법이라고.”

  전방에 달려든 괴물을 그대로 갈아버린다. 튼튼하기 그지없는 범퍼에 부딪힌 부분부터 뼈와 살이 뭉개져서 믹스되어버린다. 이윽고 튕겨나가 버렸다.
  아나의 울음소리가 잦아든다. 그는 단지 듣고만 있을 뿐.
  멈추지 않고 차는 계속 나아간다.
  다시금 달려드는 괴물의 무리. 그는 사양하지 않는다. 옆에서도 뒤에서도. 들러붙은 괴물은 떨쳐 내버리고 달려드는 놈은 그대로 박아버린다. 인수의 손과 발은 과격하게 움직였고, 그 과격한 동작은 더욱 과격하게 변해서 달려드는 놈들을 짓밟고 뭉개버렸다.
  한 차례의 공격이 끝나고, 자루가 터져나가듯 흩뿌려진 피의 먼지 속에서 인수의 험머가 굴러 나와서는 잠시 멈춰 섰다. 차체의 외관은 가관이었다. 총탄에 얻어맞은 부분은 움푹 들어가 있었고 전면에는 붉은 핏물이 저며져 찢겨나간 살덩이와 함께 엉겨 붙어 있었다.
  흡사 지옥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모습으로 그것은 무심하게 움직였다. 내리는 비가 핏물을 조금씩 씻겨냈다. 인수는 무성의한 동작으로 와이퍼를 작동시켰다. 살점이 끼어서 삐걱거리는 소음이 이상할 정도로 크게 들린다. 소녀의 흐느끼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는 생각했다.
  지금 자신은 분노하고 있다.
  그랬기에, 마지막 하나도 용서하지 못했다.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는 데 익숙한 그는 거리낌 없이 차체를 가속시켰다. 남은 것은 하나. 표표하게 서서 오롯이 노려보는 괴물의 모습에, 비웃는 듯한 태도의 적에게 살의를 짜낸 그는 폭진하고 있었다.



  검은 도로 위에 검은 하늘 아래 검게 물든 검은 색 옷을 입은 어느 검은 남자. 그는 달려오는 험머를 마주하고 서 있었다. 칠흑을 제외하고 타를 배제하던 추악한 공간에 엷은 미소가 걸렸다.
  그 미소는, 누렇게 뜬 이가 비열하게 배어나는 잔인한 모양.



  17번 고가도로는 통제되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구역 전체가 통제되고 있었다. 인근 건물에 입주하고 있던 사람들이나 야근하고 있던 회사원 등의 가능한 모든 사람들이 근처의 대피소로 이동하게 되었고 입구 앞에서는 무장한 병사가 지키고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지키고 있다.
버몬트 크립턴 대령은 이 무자비한 통제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TSS의 힘이로군.”
“그렇다기보다는 경각심을 가지게 된 게 더 큰 이유겠지요.”

  정의 말에 대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렇군. 내가 예전에 주둔할 당시에는… 안전 불감증이라고 하던가?”
“많이 죽었지요.”
“… 그렇지.”

  대령은 우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6년 전 있었던 ‘피난처’에 의한 대규모 참사. 그때 이후로 한국인은 변했다. 물론 그 당시의 전역은 수도권에서 발생했고 직접적으로 피해를 본 민간인은 수도권에 체류하던 경우에 국한하지만 그래도 안전 불감증을 일깨워주기는 충분하리라.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서야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이 자신들의 주위에 대단히 가까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널려있는 시체로 밭을 일군, 황야가 되어버린 도시 구역을 바라보며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면 그 자는 진정 철혈의 자격이 있으리라. 그 기억을 지니고 있는 두 남자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철칙이 있다. 되새길 때마다 묵념하리. 가버린 이를 위해. 그리고 복수하리.

“자네도 전역 출신인가?”
“그렇습니다.”
“어디 소속이었나?”
“울티메이트 알파(Ultimate Alpha) 소속이었습니다.”

  대령은 기억을 더듬었고, 이윽고 초전투입공중강습사단 ‘울티메이트 알파‘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사단병 전원이 공중강하 및 후방고속침투와 동시에 적 주력 섬멸 임무를 이행할 수 있는 특수목적사단. 사단장은 전역 후반에 전사했고 부대는 급속도로 와해되었다고 전해지는,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사단이다.
  그리고 적이었기에 대령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분노의 업화에 불살라진 부대 출신인가. 놀랍군. 생존자가 있었나?”

  정은 대수롭잖은 듯 대답했다.

“제법 많습니다.”
“배신했군.”

  정은 정말 대수롭잖은 듯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몇이나 이탈했나.”
“제 중대뿐입니다. 그나마도 반수는 이탈 도중에 사망했습니다. 나머지는 현재 모두 2중대 소속입니다. 전역한 사람은 아무도 없군요.”
“후. 적에게 몸을 의탁한건가.”

  대령은 시가에 불을 붙였다. 일반 담배의 4배는 되어 보이는 굵기의 바짝 말라붙은 담뱃잎 뭉치가 붉게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입가에서 흰색의 옅은 연기와 함께 피식거리는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6년 전. 그는 정과는 반대편에 서서 맞서 싸웠다. 전역 이후 6년이 지나서 지금.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모니터를 주시한다.

“… 제대로 미친 녀석들이군 그래.”
“그렇군요.”
“자네도 제법 사연이 많은데. 올해로 나이 몇인가?”
“올해가 지나면 30줄까지 1년 남습니다.”

  그는 정을 향해 들고 있던 상자를 내밀었다. 곽 안에는 갈색 종이 껍질로 돌돌 말린 쿠바제 시가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저는 피워야 할 때를 따로 정해놓고 있습니다.”
“지금이 그 때네.”
“알겠습니다.”
“불 필요한가?”
“괜찮습니다.”

  그는 얌전히 시가를 꺼내들어 물고는 라이터를 사양했다. 그도 라이터 정도는 들고 다녔으므로, 검은색 바탕에 해골이 박힌 험악해 보이는 지포라이터를 꺼내들고 불을 붙였다. 언젠가 동남아에 갔을 때 맛봤던 시가 맛이 죽여줬었다는 것을 떠올리며 연기를 빨아들였고, 그 후 가슴속으로 대령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그런데 자네는 안 가고 뭐하고 있는 건가?”
“방과 후 자율 활동이라고 하면 이해하시겠습니까?”
“선생님이 혼낼지도 모르는데 말인가?”
“그 선생님도 이해해주실 겁니다.”

  분명 귀환 명령을 찜 쪄 먹듯 하고 이리로 달려온 그는 잘한 구석이라곤 눈곱만치도 없다. 하지만 리글러스터 박사는 언짢은 구석이 있을 것이다. 호감 부족으로 말미암은 사태는 아니고, 단지 그 본인이 한쪽 구석이 켕길 뿐. 2중대 대원들을 바보같이 부려먹었다는 걸 어렴풋이 눈치 채고 있는 정은 그 사실을 악용했고, 그러면서도 자신이 모범 군인이 못된다는 사실을 시인했다.

“말해보게.”

  예전에 어느 아가씨가 건네줬던 검은 가죽표지의 빛바랜 성경책을 덮으며 그는 안경 또한 벗어서 옆의 회색 사무실용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시가에서는 여전히 흰 연기가, 입가로는 피곤한 미소를 지었다. 갈색 시가를 입에서 떨어뜨리고는 얼마 타지도 않았는데도 무참하게 재떨이에 끝을 비벼버린다. 피곤한 듯 눈가를 손가락으로 쓸어내린 그가 다시금 말했다.

“묻고 싶은 게 있었던 거 아니었나?”
“… 예. 맞습니다. 그런데 용하시군요. 돗자리 깔고 앉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정은 약간 뜸을 들였다. 담뱃불이 타들어가고, 잠깐의 시간을 보냈다. 돌려 말해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고 자신이 말재주가 없다는 사실까지도 자각한 후에야 입을 열었다.

“… 저보고 사연이 많다고 하셨지요.”

  거의 마지막 모금이라고 생각하고 베어 물 듯 시가를 입에 물고 빨아들였다. 폐부에 흰 연기가 가득 차고서야 상황을 정리할 수 있었다. 나는 지금 건드려선 안 될지도 모르는 진실에 손짓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자각과 함께.

“대령님보다 더 많을 것 같지는 않군요.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그 자, 랜서. 대체 뭐하는 남자입니까? 그리고 박사와 대령님은 어째서 저 아이를 방치해두고 있는 겁니까?”

말을 맺으며, 그는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빌딩 곳곳에, 고가도로 주변에 설치해 둔 카메라가 전파를 수신하고 모니터는 전파를 출력해낸다. 지옥에서 뛰쳐나온 듯 붉게 물든 험머가 피로 된 바퀴자국을 남기며 도로 중앙에 오롯이 선 한 남자에게 전력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그 전파는 TSS 본부 빌딩에도 닿고 있었다.
  작전실에는 메인 스크린만 켜져 있었다. 요전의 박사와 레이카테야가 대화를 나눌 때와 같은 식으로. 하지만 오늘은 멤버가 달랐다. 당직 오퍼레이터인 이진주 치프만이 오퍼레이터 역을 수행하고 있었지만 부족하진 않다.
  레이카테야는 오퍼레이터 보조를 하고 있었는데, 사실 그녀의 처리능력은 치프보다 월등히 앞선다. 하지만 레이카테야는 설계상의 제약으로 마더 컴퓨터가 공격당할 시 자동 복구하는 셀프 리페어와 자기보호기능의 일부 그리고 작전개요 작성 등의 몇몇 기밀사항에 해당하는 항목들을 제외하면 자기주도적인 작업과 처리가 불가능하게끔 설정되어 있었다.
  이것은 시스템적 락이 아닌, 레이카테야가 만들어질 당시 원본이 된 자아정체성 모델에 의도적으로 덧씌워져 재조합하여 형성된 것으로 이것을 어그러뜨리려고 하게 되면 정보 자체가 소실되어버릴 가능성이 존재했다. 인간 식으로는 자아정체성이 상실된다는 표현을 빌려올 수 있다.
  그녀를 인격체로 존중했던 박사는 레이카테야 내부에 존재하는 트라우마와 같은 락을(이 말은 비유가 아니고 말 그대로의 의미다.) 해제해버리기 위해서 접근한 경우가 있었지만, 이미 고도로 발달해버린 그녀의 정신세계에 간섭할 엄두가 나지 않아서 포기해버리고 말았다. 박사의 말마따나 그녀는 인격체였고,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인간의 정신이 불가해하다는 것을 반증해주는 또 다른 사례에 다름 아니었다.
  중앙 후방에는 지휘석이 있었고 그 자리에는 당연하게도 레만루스 리글러스터 박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예의 커피 잔을 들고 있었지만 화면을 보는 그의 모습은 평소와 같이 온화해보이지도, 평온해보이지도 않았다. 손에는 땀이 베여있었기에 잔은 미끄러져 떨어질 것만 같이 위태위태하게 그의 손에 잡혀 있었다. TSS 최고위의 명령권자는 긴장한 자세로 앉아서 메인 스크린을 그답지 않은 날카로운 눈매로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준기가 시립하고 서 있었다.

“… 불쌍하지 않습니까.”

  그가 지적했다.

“그렇군.”

  박사는 모호하게 대답했다. 잔을 내려놓고서.

“잘 버텨주길 바랄 뿐이지.”
“그 이상은?”
“없네.”

  험머는 가속을 시작했다. 진주는 건조하게 상황을 보고했고 레이카테야의 서포트까지 참조해서 예상 충돌시간까지 계산해냈다. 피하지 않는다면. 인간이라면 저 험머가 가로지르는 끝의 남자는 틀림없이 죽을 것이다.
  그럴 수가 없다는 생각으로, 박사는 오한에 떨었다.

“… 드디어 조우하는 건가!”



  추악하게 튀어 오르는 검은 핏물. 풍선에 담겨 있다가 터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것은 분명히 피어올랐다. 둔탁한 음향과 함께 험머가 들썩이고 그녀의 머리 위로는 유리창, 지붕을 타고 반쯤 구겨져서 시체 비슷하게 되어버린 괴물들이 넘어갔다. 하나씩 둘씩. 셋도 넷도 넘어갔다. 사실 차 안은 모호하게 바깥과 단절되어 있었다. 범퍼에 치여 날아가 버린 괴물도 차 위로 타고 넘어가 뒤로 굴러 떨어져 내린 괴물도 모두 차 내부와는 단절되어있었다.
  사람 같은 형체가 피를 뿌리며 돌에 치인 개구리마냥 이리저리 튕겨나가는 살육이란 이름의 비상식의 향연 속에서 그녀는 어지러워했다. 어지러웠다. 그 모호함이 너무나 어지러워서 마치 구토를 불러일으킬 것만 같았다. 차멀미와는 별개로, 그녀는 구역질했다.
  인수를 쳐다봤다. 처음에는 연민으로 인해 물기에 젖어 있던 눈이었지만 이제는 열기에 말라버린 눈가. 분노라는 이름의 불꽃이 튀기고 있었다. 아나는 그것이 신기했다. 사람 같은데 사람이 아닌 것들이 달려들고 가죽 북이 터지듯 피안개 자욱하게 박살나가는 인영들. 외부의 비상식과 소통하고 교감하며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내뿜으며 그는 달린다. 차체를 가속하며 있는 대로 화내며 그들을 죽여 나가는 모습. 그녀와는 너무도 다르다.
  모호함의 피보라. 붉게 깔린 먼지구름 같은 핏빛의 세계 때문에 그녀는 너무도 어지러웠다.
  스스로 몸을 가눌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차가 이윽고 멈춰 섰다.

“흐윽….”

  신음소리가 입 밖으로 새어나간다.
  무슨 수식어를 달아도 현실은 현실. 나는 이 잔인한 광경 속에서 고통스러워할 뿐이라고,  스스로 자각 할 수 있었다. 잠시 찾아온 고요함으로 모호함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바로 신음소리였다.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녀는 눈을 들어 인수를 바라본다. 눈물 맺힌 시야가 너무나 흐릿해서 그의 얼굴이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는 씹어뱉듯이 이를 악물었다. 차가 진동하는 소리, 빗소리가 섞인 세계는 고요하다. 그 속에서 이를 가는 소리는 너무나 크게 들린다. 아나는 뒤늦게 눈을 닦아낸다. 그가 험머를 가속시키고 그녀는 가스터빈 엔진으로 가속하는 힘에 밀리듯 시트에 몸을 박았다. 그가 화내고 있다. 그것만 알 수 있었다. 차가 다시 나아감과 함께 그녀는 다시 모호함에 떨어진다. 기실 그것은 모호함이 아닌, 단지 아픔일 뿐. 늪으로 빠져 들어간다. 조금씩 들어간다. 잠겨든다.
  고개 들어 정면을 보았을 때, 스스로 구역질 내던 광경인데도 어째서 눈을 앞으로 돌렸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매어둔 안전벨트가 자신을 구속하고 있다는 사실 따위는 조금도 눈치 채지 못하고 아나는 바보같이 몸을 일으키려 했다. 찬물을 뒤집어 쓴 것만 같이, 그녀는 모호함 속에서 빠져나왔다. 그런 사실 역시도 자각하지 못했다. 아나가 가지고 있는 모든 시간은 노란색 나트륨 등이 비추는 안쓰러운 불빛의 아래에서 얼굴을 드러내는 눈앞의 남자에게로 집중됐다. 그녀가 외쳤다.

“아빠…!”

  아나의 외침에 인수가 당황하며 스티어링을 꺾었다. 가랑비라곤 해도 계속 내렸기에 지면은 미끄러웠다. 차체가 놈을 향해 측면을 드러내며 미끄러졌다.

“뭐라고!”

  아무리 당황했다고 해도 이런 병신 같은 반응을 하다니! 관찰자들이 파견한 에이전트라는 명함까지 달고 있는 주제에 나는 대체 뭘 한거지! … 라고, 그렇게 자책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놈은 차체 측면에 달라붙어 전력을 다했다…!

“이런 바보 같은!”
“꺄아아아아아아악!”

  지금까지 놈들을 튕겨내며 전진했던 것처럼, 튕겨나가버린 험머는 하늘을 날고 있었다.



“맙소사…!”

  모니터를 보며 정은 황당함의 극의를 느낄 수 있었다. 타겟은 아무렇지도 않게 두 사람이 타고 있는 험머를 던져버렸다! 험머는 고가도로 밑으로 떨어지고, 화면 밖으로 벗어나버렸다. 저 정도로 말도 안되는 괴력이라면 전율에 앞서서 황당한 감정까지 들어버린다.

“옛날이야기는 나중에 해야겠군. 알파! 찰리! 제압사격 개시하라!”
“Roger!"
"Copy sir."

  이전에 기동보병소대와 샘플이라 불리던 타겟과 조우했을 때의 전투기록에서 그가 고도의 청력과 공간지각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파악해낼 수 있었고, 그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새로이 작전계획을 수립했다. 근거리에 센트리 건을 설치하고 음향이 감쇄되는 장거리에 대물저격라이플을 장비한 저격수를 배치한다는 단순한 계획을 세웠지만 당시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해보였다. 크립턴 대령이 지시하자 대물저격라이플의 총구가 불을 뿜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허무했다.

“Target lost!”
“이쪽에서도 안 보인다.”
“센트리 건이 먼저 사격을 시작해서 놈이 도주해버렸습니다.”

  들어오는 보고를 듣고는 책상에 주먹을 내려 꽂으며 대령이 외쳤다.

“미치겠군!”

  정이 그에게 조언했다.

“저번과는 다릅니다.”

  대령이 숨을 내쉴 때까지 그는 잠시 기다렸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기동보병 1개 소대가 무력화되었을 때에도 사망자는 없었는데, 지금은 험머를 맨손으로 뒤집어 날려버렸습니다. 보셨잖습니까? 작전 수립할 때 예상하던 괴물이 아닙니다.”
“제기랄. 보호 시도다! 가용 가능한 전력이 뭐가 남아있지!?”

  크립턴 대령이 빠르게 물어보자 갑작스러운 질문에 한순간 당황했던 부관이지만, 그 역시도 숙련된 군인이다. 그는 곧장 대답했다.

“매복지에 베타와 감마가 남아있습니다.”
“플랜 2를 발동한다. 알파하고 찰리까지 모두 털어서 험머가 떨어진 지점으로 보내!”



  준기도, 진주도, 레이카테야도 메인 스크린이 비추는 광경에 모두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도로 위의 저 괴물은 분명히 샘플이었다. 그가 보여준 엄청난 괴력에 모두는 질려버렸다. 냉정하게 사태를 파악하는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박사는 사태를 건조해진 입으로 건조하게 총평했다.

“개발했군.”
“개발이라니요?”

  뒤늦게 제 정신을 차린 준기가 박사에게 물어오자, 그가 대답했다.

“베인할프가 계획하던 슈퍼솔져플랜.”

  기억을 더듬으며 말을 잇는다.

“TSS 창립 이전부터 미 국방성에서 연구하고 있던 프로젝트가 하나 있지. 랜드워리어 프로젝트에서 출발해서 자그마치 20년을 끌었던 슈퍼솔저 양산 계획. 거기에는 생체공학도 선행하고 있었는데, 연구팀의 멤버 중 하나였던 베인할프는 인체의 육체적 능력 활용을 중점적으로 연구했다네. 그 연구 중 일부는 TSS로 넘어왔고, 지금은 폐기되었지만… 어쨌든. 내 요청으로 프로젝트는 파기 당했다네.”
“이럴 수가. 그렇다면, 그 파기당한 프로젝트가 음지에서 꾸준히 발전해왔고 그 결과가 저거란 말입니까?”

  준기의 말을 들은 박사는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그것까지는 모를 일이네. 하지만 내가 ‘개발했다’고 말한 건 그런 의미가 아니고… 샘플의 신체능력이라는 건 후천적으로 양성되는 능력이라는 거지.”  

  그렇지 않으면 설명이 되지 않는다. 예전 TSS 기동보병소대가 놈과 조우했을 때 놈이 TSS 대원들을 죽이지 않았던 이유는, 죽이지 않았다기보다는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의 근력은 미개발 상태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근력이 개발되자 놈은 말도 안 될 정도로 엄청나게 강력해졌다. 지금 상태로 다시 기동보병소대와 붙여보라면 부대원들은 아마 오체분시를 당할 것이다.

‘의문은, 하루 사이에 그런 비약적인 능력 개발이 가능하냐는 것이지만.’

  추론은 검증해봐야 할 필요성이 있다.

“레이카테야. 이전에 입수했던 샘플의 잠재능력보고 결과에서 분석 후 보고하게.”
- 분석 결과입니다.

  어린 소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는 레이카테야는 다시 마더 컴퓨터의 AI로 깃들어서 사무적인 어조의 문장을 출력했다. 분석 결과는 간단했다. 98% 확률로 불가능.

“나머지 2%는?”
- 외적 요인입니다. 생물학적으로 관련되는 변수가 너무 많기 때문에 정확한 예는 들 수 없습니다.
“크립턴 대령은 어떻게 하고 있나?”
“플랜 1을 파기하고 플랜 2안을 시행중입니다.”

  레이카테야가 플랜 개요도를 불러왔다. 플랜 2안은 샘플이 공격하는 대상을 우선적으로 보호하는 계획. 인수와 아나의 구출 및 보호를 말한다.

“… 확실해졌군요.”
“그래. 그들이 보인 반응으로는, 샘플은 프로페서 베인할프가 확실하다. 그 본인이 아니라도 적어도 그 본인의 피를 받아먹은 괴물 정도는 되겠지. 치프! 타겟의 명칭을 샘플에서 제 1안 ‘베인블러드(Vainblood)'로 변경하게.”

  예전에 알고 있었던 지인은 괴물로 탈바꿈해서 돌아왔다. 피를 송두리째 빼앗기고 그가 쌓아왔던 생의 모든 업까지도 고스란히 강탈해서 멋대로 유용하는, 최악의 괴물로 돌아왔다.
  메인 스크린에는 검은 후드를 젖히고 창백한 피부를 드러낸 사내가 있었다. 푸른 눈. 그것마저도 같다. 아나와 동일한 푸른 눈이다. 놓여 있는 사진과 비교해 본 박사는 그야말로 분노에 떨었다.
  저것이 바로 타인을 죽이는 것보다 더욱 잔인한 행위의 결정체다. 남의 생을 고스란히 강탈하고 아무런 책임도지지 않은 채 뻔뻔하게 서 있는 괴물.

“그에게는 빚이 있지. 하지만 네놈 따위 괴물에게 갚아줄 빚은 아무것도 없다.”

  박사는 씹어뱉듯 말했다. 살아생전에 그가 알고 지냈던 모든 사람들에게 저것은 무엇을 요구할 것인가. 소름끼치는 일이었다.

“적의 명칭을 샘플에서 제 1안 ‘베인블러드’로 변경했습니다. 서브 스크린 가동합니다. 전진부대의 카메라에 링크 되었습니다. 수신중입니다.”

  메인 스크린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화상이 좌상단에 떠올랐다. 화면은 형편없이 찌그러진 검은색 차체를 비추고 있었다. 핏물이 덕지덕지 발라진 채로 그대로 말라붙어서, 마치 부서진 후에 피를 흘리기라도 한 것처럼 흉측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헤드라이트를 비추자 운전석에는 아무도 없었다. 운전석 문짝이 통째로 날아간 비참한 몰골의 험머를 바라보며 박사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재주도 좋군.”
“목표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경로대로라면 얼마 후 크립턴 대령의 부대와 조우하게 됩니다!”
“이전에도 기동보병소대를 우습게 무력화시킨 괴물입니다. 조치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준기가 지적하자 리글러스터 박사는 대수롭잖은 듯 말했다.

“그래서 보험을 들어뒀잖은가.”
“… 아!”

  짧은 탄성을 뱉어내고서 준기는 박사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와 박사의 관계는 비즈니스 파트너와도 같은 이해할 수 없는 미묘한 관계지만.
  그래도 아직 그가 남아있다.



“- 주위로 튕겨나간 것도 아닙니다! 반복합니다. 좌석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귀신같군. 제길. 일단 귀환… 아니, 현 위치에서 대기하라.”

  약간 끊으며 말을 잇던 대령은 고개 돌려 지금은 오퍼레이터 대행을 맡고 있는 정에게 말했다.

“본부에 괴물 놈의 위치 추적을 요청하게.”
“이 전력으로 추적이라도 할 생각이십니까?”
“머리가 있는 놈이잖나. 귀도 밝고. 놈이 아나를 잘 찾겠나, 아니면 우리겠나?”

  그는 생각했다. 이진주 치프의 보고대로라면 놈은 분명히 그 아이를 쫓아갈 것이다. 애당초 여기에 나와서 그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부터가 명백히 그럴 의도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일 테니 말이다.

“제기랄. 사서 고생 시키네. 그래도 살아남았을 테니까 다행인가.”

  몇 초 후, 뭔가가 무참하게 박살나는 굉음이 그를 덮쳐왔다.



“… 멋진걸.”

  인수는 아나를 끌어안고는 허공에 매달린 채로 시니컬하게 뇌까렸다. 아나는 이미 기절해버린 상태였고, 그는 콘크리트 벽에 어떻게 박아 넣은 리퀴드 하드의 자루만을 믿고 있었다. 청승맞게 내쳐진 모습의 그는 쏟아지는 빗줄기에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을 뿐이었다.
  험머가 떨어질 때, 운전석 내에서 필사적으로 몸을 비튼 그는 100m를 4초 내에 주파하는 각력으로 문을 걷어차서 박살내고는 이미 기절한 상태의 아나를 잡아끌고는 낙하하는 차 밖으로 튀어나갔다. 차체를 발판삼아 도약한 그는 리퀴드 하드를 최대한도로 늘려서 고가도로의 기둥에다 날이 몸에 닿을지도 모를 정도로 아슬아슬한 각도로 칼을 박아 넣고서야 겨우 추락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 결과가 이 모양이다.

“제길. 저 치들에게 도와달라고 해봐야 방법도 없을 텐데.”

  크립턴 대령의 부대원들은 인수와는 좀 거리를 둔 아래편에 모여서 박살난 험머 구경을 하고 있었다. 칼자루를 쥐고 있는 손에 땀이 잡히고, 빗물까지 섞여서 미끌미끌했다. 죽을 지경에 처했다가 구사일생하고 보니 몸에 힘이 좀 풀려버린 느낌마저도 들었다.
  몸을 비틀자, 갑자기 내려가는 느낌과 함께 위치가 변해버렸다. 고가도로의 기둥을 파고 든 기다란 검신이 철근까지 포함해서 콘크리트채로 기둥을 잘라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빌어먹을 정도로 좋은 칼날이….”

  칭찬인지 욕인지 알 수 없는 한마디였다.

“타이밍 죽이는군. 복수해주마!”

  몸을 끌어올렸다. 칼날에 체중을 다했다.



  저벅저벅 울리는 발소리와 함께 잦아드는 총성. 이윽고 그들은 도착했다. 후방에 대기하던 예비대가 추락지점에 도달하고, 빌딩 위의 저격수는 스코프로 8배 확대된 세계를 본다. 보이는 것은 도로 위의 괴물. 한 사람이 무전기를 들어올린다.

“알파 리더에게 수신. 타겟이 그 쪽으로 이동중이다. 제압사격 개시하겠다.”
“- 카피.”
“대장. 추락지점 위에 뭔가가 있습니다.”
“알파 리더. 잠시 기다려라. 현 위치에서 고가도로 기둥을 확인하라.”
“- 라져. 치익- 이런 맙소사. 래빗과 에이전트를 발견했다…… 이런! 하지 마! 그만…! 치직. 칙. 모두…!”
“왜 그러나! 알파 리더! 알파! 반복한다! 알파! … 제기랄!”

  갑자기 먹통이 되어버린 상대방의 마이크. 저격수 중에서도 선임인 듯한 사내가 분통을 터뜨렸고, 그러면서 뇌까렸다.

“사격 개시.”

  강한 총성이 울린다. 램제트가 후방으로 배출되며 20mm 대물저격총의 탄환이 눈부신 궤적을 뒤로했다. 이미 발사되는 소리는 총성이 아니다. 투콰앙-! 투콰앙-! 대포가 발사되는 것처럼 굉음이 울렸고, 탄환은 닿은 부분 째로 헤집으며 대기든 콘크리트 벽이든 가리지 않고 박살냈다.
  하지만 놈은 예외였다.

“실패입니다!”
“말도 안 되는! 탄환을 눈으로 보고 피할 수 있을 정도란 말인가!”

  그 정도로 상대방은 유유자적했다. 대물저격 라이플에서 뿜어진 정확한 탄환의 조준은 놈이 반응을 보이면 어이없을 정도의 명중률을 보이며 크게 엇나가버린다.
  결코 그들이 못 쏴서가 아니다. 놈은 너무 기민하다…!

“괴물자식… 응? 뭔가 이상하다…?”
“뭔가가 떨어집니다!”

  놈이 다가오던 단 몇 초간을 집중하지 않았던 탓일까. 섬뜩할 정도로 빠른 섬광. 그것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마이크가 전체송신 상태로 켜져 있다는 건 확인조차 하지 않고서는 그대로 내뱉었다.

“다리가… 무너진다!?”

  덮쳐오는 거대한 굉음에 휩싸이는 것과 함께 그는 알파 리더가 뭘 하지 말라고 외쳤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굉음 속에 묻혀서 얕게 들리는 작은 소리이긴 했지만 인수는 캐치해낼 수 있었다. 그렇기에 위험한 도박도 서슴없이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리퀴드 하드의 자기첨예화를 통한 말도 안 될 정도의 절단력을 통해서 고가도로의 기둥 하나를 통째로 썰어버리면서 땅에 내려선 인수는 비 때문에 시야가 가려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무시하며, 빌딩 위에서 할리와 함께 떨어져 내리는 랜서에게 주먹을 쥐며 외쳤다.

“타이밍 죽인다고 말해줬다! 부숴버렷!”

  그리고 그는 몸을 돌려 아나를 데리고 뛰어갔다. 그가 남긴 말에 화답이라도 하듯, 흐릿한 달빛에 비춰진 3m가 넘는 포신이 보였다. 베인블러드는 꼿꼿하게 선 채로 그의 위에 떠올라 떨어지고 있는 2m 크기의 거한의 실루엣을 바라봤다. 등 뒤에 떠오른 달무리 진 흐릿한 달을 배경으로, 달아오른 감각은 세계를 느리게 만들었다. 떨어진다. 떨어진다. 떨어진다!
  얼마 후 레일건의 66mm 포탄이 대지를 조각냈다.
  고가도로 기둥이 지지력을 잃고 붕괴해버린 것과 더불어 포탄의 거대한 운동에너지가 다리를 두들겼다. 게다가 랜서가 선사한 포탄의 종류는 HE! 열기에 대기가 증발하며 생겨난 갑작스러운 기압 차가 주위에서 대기를 끌어들였다!
  대기가 끌어들여지고 파편이 비산했다. 주위의 건물에서 깨어져 나온 유리조각들이 폭심지로 모여들며 주위를 난도질했다.
  그리고 이윽고 다가왔다.
  잘못 짜 맞춰진 퍼즐이었던 것처럼, 도로는 갈라져나갔다. 이윽고 거대한 굉음이 울렸다. 한쪽 귀퉁이가 철근을 드러내며 흰 콘크리트 가루가 불길에 섞여 하늘로 튀어 오른다. 그 타닥거리는 소리는 이미 묻혀버렸다. 돌조각이 떨어졌다.
  베인블러드가 서 있던 곳은 레일건이 불러낸 업화 속에 통째로 매몰되어버렸다. 아무리 그가 기민하다고 해도 최대시속 14km/s 로 날아드는 포탄에 반응할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합의 따위 없이도 순식간에 이뤄지는 두 초인의 연수합격. 핀 포인트 어택이 통하지 않으면 거대한 파괴에 내몰아서 적을 분쇄하는 콤비네이션 킬! 인수는 내질렀던 오른 주먹을 왼손에 호쾌하게 내려치며 기쁜 듯이 외쳤다.

“멋진 자식!”
“… 미친 자식‘들’이겠지.”
“감사합니다!”

  옆에 서 있는 알파 리더의 평에 말 머리꼬리는 생략하고 칭찬으로 여기겠다는 말 한마디 없이 다짜고짜 감사를 건네는 인수였다. 그는 아나를 살펴보곤 다친 곳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돌렸다. 뒤늦게 둔탁한 음이 들려왔다. 뭔가가 지면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랜서가 지면에 내려앉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불길 뒤로 그가 아슬아슬하게 내려앉지 않은 교각 윗부분에 걸쳐있었다. 그것을 눈으로 확인한 인수. 그리고 알파 소대의 리더는 다시 인수에게 말을 건넸다.

“화끈한 친구를 두고 있군.”
“친구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랜서!”

  반가운 마음에 그는 손을 흔들었다. 물론 반응은 없었지만 애당초 대답은 기대하지도 않았다.
  TSS의 대원들은 순식간에 일어난 상식을 초월한 파괴를 보고 넋을 놓아버린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그들은 사건 사후 처리반에서 조달한 인원이기 때문에 이 사고를 조작 은폐하려면 얼마나 공을 들여야 할까 하는 생각을 하며 눈앞을 암담하게 물들였다.
  그리고 적은 그 정도로 허무하지는 않았다.

“조심해라…!”

  랜서의 외침. 그 직후에 미끄러지듯 내려오는 그의 모습. 인수는 리퀴드 하드와 데저트 이글을 들어올렸다. 그의 노호성에, 늘어졌던 부대원들조차도 바짝 일어섰다. 이윽고 적은 걸어 나왔다. 거의 다 타버린 검은 후드는 늘어지듯 벗겨졌고 창백한 얼굴에는 그을음이 묻어 있었지만 눈만은 푸르게 ‘타오르고 있었다.’

“저런 괴물딱지가!”
“Commence fire!"
  
  타타타타타타타타-!
  20여개의 총구가 9mm 파라블럼 탄을 내뿜었다. 일부는 빗맞고 일부는 착탄. 그러나 적은 동요도 하지 않는다! 탄환을 맞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데도, 몇 발 박혀든 탄환 따위 우습다는 듯이 놈은 철근을 집어 올려 콘크리트 조각 째로 던져버렸다! 타버린 시신경이 재생되지 않은 탓으로 형편없이 떨어진 곳에 내려 꽂히긴 했지만, 여전히 말도 안 되는 괴력이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인수는 쓰리게 내뱉었다.

“제기랄. 도움이 안 되는군. 당신들! 이 아이를 데리고 어서 도망가요!”
“웃기는 소리 하지 마! 20명으로 상대가 안 되는 괴물을 두 명이서 어떻게 상대하겠다는 거냐!”
“나는 못 해도 저 괴물딱지 인간은 하니까 걱정하지 말고 빨리 도망이나 가란 말야!”
“제길… 아니, 잠깐! 뭐라고!”
“예!?”

  시끄럽게 울리는 총소리 속에서 인수가 어이없다는 듯이 반문하자 그는 손을 드는 시늉을 하며 그를 가로막더니 헤드폰에 귀를 기울였다.

“이런 볼기짝을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고마워서 팔짝 뛸 자식들을 봤나! 미치겠네! 거기 당신! 도망치자고 했지?”
“그런데, 왜요!?”
“당신 친구를 믿으라는 말만 들었다! 제기랄!”

  그리고 놈이 덮쳐들었다.

“큭!”

  검으로 막아서며 총으로 견제한다. 데저트 이글의 탄환이 성실하게 쇄도했지만, 그 기민함은 어디 가는 게 아니다. 피하지 못할 위치까지 접근한다면 역시 육탄전!
  그리고 그것조차 쉬운 건 아니었다. 처음에 검이 닿자, 손이 처참할 정도로 떨려나갔다. 험머를 집어 던져버릴 정도의 엄청난 괴력에 맞설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놈의 주먹질에 리퀴드 하드는 애처로울 정도로 울려대며 튕겨나갔다.
  손아귀가 찢어질 것 같다.

“제기랄. 떨어져! 떨어져! 떨어져어엇!”

  그가 들고 있는 검은 액체금속 검! 자유자재로 성형이 가능한 것이 장점으로, 검신을 늘리며 놈과 거리를 두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랜서가 뛰어들었다!

“크허업!”

  초근접전에서 이렇다 할 필살의 수단은 없어 보이는 랜서를 대상으로, 자신에게 큰 타격은 가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베인블러드는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으며 그의 거리에 얽어 들어갔다.
  그것은 최악의 착각이었다. 랜서는 맨손으로 콘크리트 벽을 때려 부수는 초인이다. 놈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근력으로 머리통에 주먹을 후려갈겼다! 놈은 머리와 다리 위치가 정확하게 반전되며, 땅에 굴러버렸다.
  그리고 그는 건 케이스를 뒤집었다. 레일건 포신과 반대되는 부분. 손잡이를 끌어당겨 돌리자 팽팽하게 고정되면서 옆에서 스틱이 튀어나왔다. 튀어나오는 두 정의 12.7mm 3열 총신 개틀링의 총열. 6개의 총구가 놈을 노렸다! 가슴은 발로 짓밟고, 중간에 박힌 레이저 포인터는 비정한 붉은 선을 내뿜으며 베인블러드의 머리를 노렸다. 놈은 흉흉해 보일 정도로 빛이 짙은 푸른 눈으로, 빛이 짙다는 점만 제외하면 아나와 똑같은 눈으로 랜서를 노려봤다.
  그리고 그녀가 뛰어들었다.

“안돼!”
“아나야!”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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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10kb씩 끊어서 올리던 물건을 되도록 모아서 올리려고 하다 보니 이런 식이 되어버렸습니다..-_-;
이전에 쓴 11월 비 챕터의 분량이 1화에서 4화까지에 해당합니다.

게시판이나 얻을 수 있으면 10kb씩 끊어다 올려서 정리라도 할텐데 너무 난잡하군요(....)

얼마전에 집계해봤는데, 대략 260kb 정도. 책 한 권 분량이었습니다. 으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