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연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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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17
팟!
일레인 실배너스는 거짓말처럼 갑자기 현실로 돌아왔다.
"집에서는 가상 현실 같은 거에 빠져있지 말라고 했잖니. 쉬는 날마다 이런 거에 몰두하고 있으면 안돼.
좀 더 건전하게 운동 센터에라도 가렴."
갑자기 회선이 끊어져서 발생한 덤프 쇼크(dump shock) 때문에 머리가 어찔어찔한 가운데, 그녀는 어머니 라비스가 데이터 잭 케이블을 뽑아서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지금 일레인에게 그녀는 구세주처럼 보였다.
"으아앙! 엄마!"
"……?"
평소때라면 자기가 하는 일 방해했다고 화를 버럭 낼 딸이 악몽에서 깨어난 어린애처럼 엉엉 울면서 안겨들자 라비스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심장이 터져나갈 정도의 공포라도 느낀 것 처럼 말이다. 그녀는 보통때와는 달리 어른스럽게 굴려는 겉치레를 완전히 내팽겨치고 안전한 모성의 품을 필사적으로 바라고 있었다.
"우앙! 어…. 엄마…. 엄마아… 아앙…"
"그래. 괜찮아. 괜찮아. 그래. 아가야. 응? 무섭지 않아."
일레인은 아기처럼 몸을 웅크리고 거의 경련을 일으키듯이 떨면서 울어댓다. 입가에서 침과 거품이 흘러내렸지만 입을 다물 정신조차 없었다. 라비스는 그녀를 끌어안아 다정하게 다독거려주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지 이유가 궁금했지만 그보다 아이가 끔찍한 공포를 느끼고 있다는 직감으로 인한 모성 본능이 앞서나가고 있었다.
일레인이 울음을 그친 것은 목이 아파서 더 이상 울수 없게 되었을 때였다. 그리고 그렇게 되어서도 라비스의 품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떼어놓으려 하면 금새 또 경기를 일으키며 필사적으로 달라붙었다. 왜 이러냐고 물어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너무 울어서 빨갛게 된 눈으로 애원하듯이 바라보는 바람에 라비스는 도저히 그녀를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이대로는 아무래도 안되겠다고 생각한 그녀는 딸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이 노래를 불러주었다.
오래된 엘프어로 된 듯한 가사도 바람이 별에 스치는 듯한 음율도 일레인에게는 기억에 없는 노래였다. 하지만 그것은 전혀 낯설지 않고 어디선가 들은 것 처럼 익숙한 느낌이었다. 그것은 고대엘프의 주가(呪歌), 마력이 담긴 노래였으니 엘프의 피가 절반은 흐르는 그녀가 생리적인 친숙함을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노래에 깃든 마력은 일레인의 마음을 뒤덮고 있던 공포를 서서히 씻어냈다.
"어떻게 된 일이니? 무슨 일이 있었어?"
노래를 마친 라비스는 일레인의 눈물을 손으로 닦아주며 물었다. 일레인은 그 공포의 파편을 다시 떠올리고 도리질 쳤다.
"왜 그러니? 응?"
다시 한번 라비스가 다그치자 그녀는 생각했다.
'어머니는 마법이나 정령같은 것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는 것 같으니까 도움을 줄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막상 설명을 하려고 생각하니 난관에 부딧쳤다.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할 것인가?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악령을 만났다고? 그런 터무니 없는 말을 믿을 턱이 없지 않은가.
그리고 그것은 악령 같이 알기쉬운 것이 아니었다. 훨씬 끔찍하고 무서운… 지금 다시 생각하는 것 만으로도 공포가 다시 일어날 것 같은 존재였다. 완전히 미지의 존재였지만 그녀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두려운 것인지 알게 되어버렸다. 그런 끔찍한 것과 사랑하는 어머니를 접촉시킬수는 없었다.
일레인은 될수있는 한 침착하게 변명했다. 최신 호러물 심센스를 감상하다가 너무 심하게 감정이입을 해서 공포에 질려버렸다. 단지 그것 뿐이라고.
"그러니…. 그럼 다행이지만."
하지만 라비스는 왠지 석연찮은 느낌이 들었다. 심센스는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현대에 이르러서는 정말 리얼하게 하려고 하면 현실과 구분하기도 어려울 정도까지 발전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의 감각 기준에서 평가한 것이고 현혹이나 환각 마법마저도 잘 안걸릴 정도의 초감각적인 관찰력을 지닌 엘프가 그런 것에 그렇게 심각하게 감정이입이 될까?
'이 아이는 하프 엘프라서 감이 좀 떨어지고, 또 요즘에는 그런 기술도 많이 발달했다고 하니까….'
의구심이 들기는 했지만 심센스 해본 것을 써본 적이 없는 그녀로서는 알 수 없는 문제였다. 사용법이 간단한 가전제품 정도는 쓸 줄 알았지만 컴퓨터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으니까.
"아무튼 적당히 하도록 해라. 가상현실에 너무 빠져서 폐인이 된 인간도 있다고 하니까."
"응. 그럴께."
일레인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오후 늦은 시각, 다시 일레인과 만난 등용은 한나절 만에 변한 그녀의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렇게 활달하던 그녀가 하룻밤 사이에 완전히 사람이 바뀐 것 처럼 지나친 불안과 초조, 공포를 얼굴에서 감추지 못하며 신경질적으로 주위를 두리번 거리는 것이 아닌가.
'성폭력에 노출되면 공포증에 걸릴수도 있다는데 그런 건가? 아니아니, 그런 거면 어제는 멀쩡했는데 오늘은 왜 이래?'
갑자기 그녀가 커피숍으로 불러내서 횡재다 하고 좋아하고 있었던 그는 자신이 기대하던 것과는 달리 살랑살랑 꼬시기 좋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대신에 자뭇 심각한 분위기가 풍겨지자 영 거북해졌다. 일레인은 핸드백을 열고 조심스럽게 그 디스크를 꺼내서 탁자에 올려놓았다.
"이게 뭐야?"
등용은 물론 그 디스크의 일 따위는 까맣게 잊어먹고 있었다. 어제 먹은 페어리 가루를 뿌린 쿠키의 환각작용에 의해서 전날의 기억이 좀 희미해져버린 탓도 있었지만 애당초 그리 마음에 쓰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환각상태의 기억은 마치 꿈 처럼 느껴지게 된다. 그는 어제 일레인의 어머니가 나오는 아주 즐거운 꿈을 꿨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어제 주운 디스크. 이것 때문에 부른 거야."
"이게 왜?"
일레인은 설명을 시작했다. 그녀가 이것을 조사하면서 생긴 모든 일에 대해서 하나도 남김없이 그녀가 느낀 대로. 그러나 등용은 처음에는 진지하게 듣다가 곧 실소를 터트렸다.
"하하하!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심센스에 너무 빠져든거 아냐?"
"내가 하프 엘프라는걸 잊지마. 난 지금 나와있다는 가장 리얼리티가 높은 심센스에도 속지 않아."
"글세…. 하지만 너무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라서 말이야. 도대체가 가상 현실 속에서 악마를 만나다니."
"나도 믿기지 않아. 하지만 내 직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어."
직감이라는 말을 듣자 그는 더욱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휘적휘적 저었다. 그는 직감 같은 것은 전혀 신뢰하지 않았다. 직감 같은 것을 믿을수 있다면 세상에 증거를 찾아다닐 사람이 어디있겠나 말이야.
"그러지 말고 다시 한번 틀어서 봐봐. 혹시 알아. 착각한 걸지도 모르는데."
"그게… 안돼…."
"왜?"
"컴퓨터를 쓸수가 없어…."
그녀는 괴로운 얼굴로 대답했다.
"무서워서 도저히 다시 억세스 해볼 할 엄두가 나지 않아. 아니 가상공간에 들어갈수가 없어. 데이터 잭에 케이블을 연결할수도 없을것 같아…."
"무섭다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 참."
"정말이야! 너무 무서워서 케이블을 연결하려고 하면 손이 나도 모르게 마비되어 버린다니까! 억지로 하려고 하면 경련이 심하게 일어나서 도저히 연결할수가 없어."
등용은 짐작도 못했지만 그녀는 분명히 가상현실 공포증세를 일으키고 있었다. 가상공간에서 끔찍한 공포를 맛본 그녀의 무의식이 다시 가상공간에 들어가는 행위 자체를 차단하려 하는 것이다. 이것은 보통 사이버 성폭행을 당한 경우에나 발생하는 증상이었는데.
"그럼 날더러 어떻게 해달라는 거야? 이거 들고 어디 샤먼에게 가서 푸닥거리라도 해줄까?"
"아니, 그걸 나 대신 한번만 써줘. 그러기만 하면 돼."
"뭐야?"
"네 말대로 나도 내 직감을 완전히 믿는건 아니거든. 내가 착각한 걸지도 모르고…. 아니 차라리 그랬던
것이면 좋겠어. 그래서 확인해 달라는 거야. 나 이런 상태로는 일도 못한단 말이야."
"으음."
등용은 디스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겉으로 봐서는 평범한 복사용 디스크와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듣고나니 기분탓이겠지만 어딘가 섬찟한 빛을 발하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이야이 은나하 요그 소도스 히이-를겝 파이스로덕 우아아하."
그 때 일레인이 갑자기 그 주문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순간 그녀의 목소리는 본래 그녀의 목소리보다 한 단계 낮고 심연속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은 기괴한 목소리로 변해 있었다. 마치 그녀가 말했던 그 존재가 그녀의 입을 빌어서 말하는 것 처럼.
"가… 갑자기 뭐야?!"
"아? 이게 바로 그때 들은 주문이야. 다른건 생각하기도 무서운데 이것만은 똑똑히 기억되어 있어."
등용은 문득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많은 연구와 발견이 이루어 졌음에도 영이나 마법의 세계는 아직 미지의 영역이 많이 남아있는 분야였다. 학자들은 일반인들이 미지의 존재에 함부로 접촉하려 하는 것은 돌이킬수 없는 사고를 발생시킬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잘 모르는 영역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지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심리였다.
"그건 좀 생각해봐야겠는데…. 나도 완전히 믿는건 아니지만, 만에 하나 네 말대로 이게 그런 존재와 접촉하는 것이라면 나에게 피해가 가지 않겠어?"
"그럼 도와주지 않겠다는…."
"아냐. 그런건 아냐."
그렇다고 해서 그런 사소한 불안 때문에 발뺌을 한데서야 체면이 서지 않는다. 게다가 알수없는 미지의 것에 대해서는 공포만이 아니라 흥미도 느끼는 것이 인간이 아닌가. 알아보고 싶은 마음은 들었다. 하지만 역시 자기가 직접 뛰어드는 것은 불안했고.
"좋아. 내가 이런 걸 조사해볼 만한 사람을 하나 알고있어. 그를 찾아가 보도록 하지."
등용은 그녀를 아래 구역으로 데리고 내려갔다. 어제 그녀가 위험을 겪었던 환락가보다 더 아래에 있는 이 구역은 하층민들의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시장 거리였다. 이곳의 거의 모든 가게는 고물상에 가까운 잡화상이었으며, 더 많은 수의 상인들이 노점을 이루어 붐비고 있었다. 나와 있는 물건들의 대부분은 중고품이었고, 얼마 되지 않는 신품은 모두 장물이라는 이야기가 신빙성 있게 받아들여지는 곳이었다. 또한 너나할것 없이 불법도가 굉장히 높은 구역이라 제대로 훑어내고자 하면 이곳 전체를 교도소로 옮길수 있다는 이야기 까지 있는 곳이었다.
바로 전날 좋지 않은 경험을 한 뒤라 일레인은 이런 곳에 오니 불안하기 그지 없었다. 오크나 트롤, 고블린 같은 종족들이 매우 많이 돌아다니기도 했기 때문이다. 혹시 어제 그 무리들과 다시 마주치지는 않을까?
"걱정할거 없어."
등용은 그녀를 안심시켜주었다.
"여긴 이쪽에서 조심하기만 하면 별 문제없는 동네야. 게다가 이 근처에는 내 친구들도 많다고."
"하지만 어제 그 녀석들이 다시 오기라도 하면...."
"그런 녀석 들이라면 걱정할거 없어. 한번 두들겨 패주면 얼굴도 못 드는 놈들이야. 그리고 너 목에 뱀파이어가 찍었다는 표시가 남아있잖아. 그게 있으면 어지간히 배짱이 두둑한 놈이 아닌 이상 건드리지 않아."
"에? 그런가?"
틀림없이 일레인의 목에는 어제 게일이 물었던 장소에 두개의 송곳니 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었다.
"이런 거리에서도 꽤 날리는 뱀파이어들이 많으니까. 그런 상처가 있으면 그 중 누군가가 찍은 여자라고 생각해서 접근하려 하지 않을꺼야."
"으음."
이유를 들어보니 다행이기는 했지만 이런게 점찍힌 표시라니 약간 묘한 느낌이 들었다.
골목을 굽이굽이 돌아가자 '투린 박사의 컴퓨터와 가전제품'라는 간판이 달린 고물더미가 나왔다. 고물더미라고 표현한 것은 그 앞에 온갖 낡은 가전 제품이 어지럽게 쌓여 있어서 어디가 입구인지도 모를 정도였기 때문이다. 아니 그 간판 조차도 우연히 고물더미 위에 놓여있을 뿐인 것 처럼 보였다.
그는 그 고물더미 위의 것 중에서 현재는 거의 단종된 물건인 유선식 가정용 전화기의 수화기를 골라 들어 거기에 대고 말했다.
"투린 아저씨! 저 왔습니다. 문 좀 열어주세요."
'그럼 이게 가게야?!'
일레인이 어리둥절해 있을때 그 전화기 옆에 있는 냉장고의 문이 갑자기 확 열렸다. 냉장고 문 안쪽에 문을 열기위한 기계장치가 되어있었다. 본래 식료품이 담겨있어야 할 칸은 텅 비어있고 뒷쪽으로는 깊고 깊은 터널이 뚫려있었다.
"자. 들어가자."
등용은 허리를 굽혀서 너구리 굴처럼 좁은 그 곳으로 거의 기다시피 해서 들어갔다.
'대체 이런 곳에 사는건 어떤 인간이야?'
일레인은 황당한 표정으로 그 뒤를 따랏다.
-계속
ps)댓글 좀 에궁 에궁
일레인 실배너스는 거짓말처럼 갑자기 현실로 돌아왔다.
"집에서는 가상 현실 같은 거에 빠져있지 말라고 했잖니. 쉬는 날마다 이런 거에 몰두하고 있으면 안돼.
좀 더 건전하게 운동 센터에라도 가렴."
갑자기 회선이 끊어져서 발생한 덤프 쇼크(dump shock) 때문에 머리가 어찔어찔한 가운데, 그녀는 어머니 라비스가 데이터 잭 케이블을 뽑아서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지금 일레인에게 그녀는 구세주처럼 보였다.
"으아앙! 엄마!"
"……?"
평소때라면 자기가 하는 일 방해했다고 화를 버럭 낼 딸이 악몽에서 깨어난 어린애처럼 엉엉 울면서 안겨들자 라비스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심장이 터져나갈 정도의 공포라도 느낀 것 처럼 말이다. 그녀는 보통때와는 달리 어른스럽게 굴려는 겉치레를 완전히 내팽겨치고 안전한 모성의 품을 필사적으로 바라고 있었다.
"우앙! 어…. 엄마…. 엄마아… 아앙…"
"그래. 괜찮아. 괜찮아. 그래. 아가야. 응? 무섭지 않아."
일레인은 아기처럼 몸을 웅크리고 거의 경련을 일으키듯이 떨면서 울어댓다. 입가에서 침과 거품이 흘러내렸지만 입을 다물 정신조차 없었다. 라비스는 그녀를 끌어안아 다정하게 다독거려주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지 이유가 궁금했지만 그보다 아이가 끔찍한 공포를 느끼고 있다는 직감으로 인한 모성 본능이 앞서나가고 있었다.
일레인이 울음을 그친 것은 목이 아파서 더 이상 울수 없게 되었을 때였다. 그리고 그렇게 되어서도 라비스의 품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떼어놓으려 하면 금새 또 경기를 일으키며 필사적으로 달라붙었다. 왜 이러냐고 물어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너무 울어서 빨갛게 된 눈으로 애원하듯이 바라보는 바람에 라비스는 도저히 그녀를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이대로는 아무래도 안되겠다고 생각한 그녀는 딸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이 노래를 불러주었다.
오래된 엘프어로 된 듯한 가사도 바람이 별에 스치는 듯한 음율도 일레인에게는 기억에 없는 노래였다. 하지만 그것은 전혀 낯설지 않고 어디선가 들은 것 처럼 익숙한 느낌이었다. 그것은 고대엘프의 주가(呪歌), 마력이 담긴 노래였으니 엘프의 피가 절반은 흐르는 그녀가 생리적인 친숙함을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노래에 깃든 마력은 일레인의 마음을 뒤덮고 있던 공포를 서서히 씻어냈다.
"어떻게 된 일이니? 무슨 일이 있었어?"
노래를 마친 라비스는 일레인의 눈물을 손으로 닦아주며 물었다. 일레인은 그 공포의 파편을 다시 떠올리고 도리질 쳤다.
"왜 그러니? 응?"
다시 한번 라비스가 다그치자 그녀는 생각했다.
'어머니는 마법이나 정령같은 것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는 것 같으니까 도움을 줄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막상 설명을 하려고 생각하니 난관에 부딧쳤다.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할 것인가?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악령을 만났다고? 그런 터무니 없는 말을 믿을 턱이 없지 않은가.
그리고 그것은 악령 같이 알기쉬운 것이 아니었다. 훨씬 끔찍하고 무서운… 지금 다시 생각하는 것 만으로도 공포가 다시 일어날 것 같은 존재였다. 완전히 미지의 존재였지만 그녀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두려운 것인지 알게 되어버렸다. 그런 끔찍한 것과 사랑하는 어머니를 접촉시킬수는 없었다.
일레인은 될수있는 한 침착하게 변명했다. 최신 호러물 심센스를 감상하다가 너무 심하게 감정이입을 해서 공포에 질려버렸다. 단지 그것 뿐이라고.
"그러니…. 그럼 다행이지만."
하지만 라비스는 왠지 석연찮은 느낌이 들었다. 심센스는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현대에 이르러서는 정말 리얼하게 하려고 하면 현실과 구분하기도 어려울 정도까지 발전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의 감각 기준에서 평가한 것이고 현혹이나 환각 마법마저도 잘 안걸릴 정도의 초감각적인 관찰력을 지닌 엘프가 그런 것에 그렇게 심각하게 감정이입이 될까?
'이 아이는 하프 엘프라서 감이 좀 떨어지고, 또 요즘에는 그런 기술도 많이 발달했다고 하니까….'
의구심이 들기는 했지만 심센스 해본 것을 써본 적이 없는 그녀로서는 알 수 없는 문제였다. 사용법이 간단한 가전제품 정도는 쓸 줄 알았지만 컴퓨터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으니까.
"아무튼 적당히 하도록 해라. 가상현실에 너무 빠져서 폐인이 된 인간도 있다고 하니까."
"응. 그럴께."
일레인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오후 늦은 시각, 다시 일레인과 만난 등용은 한나절 만에 변한 그녀의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렇게 활달하던 그녀가 하룻밤 사이에 완전히 사람이 바뀐 것 처럼 지나친 불안과 초조, 공포를 얼굴에서 감추지 못하며 신경질적으로 주위를 두리번 거리는 것이 아닌가.
'성폭력에 노출되면 공포증에 걸릴수도 있다는데 그런 건가? 아니아니, 그런 거면 어제는 멀쩡했는데 오늘은 왜 이래?'
갑자기 그녀가 커피숍으로 불러내서 횡재다 하고 좋아하고 있었던 그는 자신이 기대하던 것과는 달리 살랑살랑 꼬시기 좋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대신에 자뭇 심각한 분위기가 풍겨지자 영 거북해졌다. 일레인은 핸드백을 열고 조심스럽게 그 디스크를 꺼내서 탁자에 올려놓았다.
"이게 뭐야?"
등용은 물론 그 디스크의 일 따위는 까맣게 잊어먹고 있었다. 어제 먹은 페어리 가루를 뿌린 쿠키의 환각작용에 의해서 전날의 기억이 좀 희미해져버린 탓도 있었지만 애당초 그리 마음에 쓰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환각상태의 기억은 마치 꿈 처럼 느껴지게 된다. 그는 어제 일레인의 어머니가 나오는 아주 즐거운 꿈을 꿨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어제 주운 디스크. 이것 때문에 부른 거야."
"이게 왜?"
일레인은 설명을 시작했다. 그녀가 이것을 조사하면서 생긴 모든 일에 대해서 하나도 남김없이 그녀가 느낀 대로. 그러나 등용은 처음에는 진지하게 듣다가 곧 실소를 터트렸다.
"하하하!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심센스에 너무 빠져든거 아냐?"
"내가 하프 엘프라는걸 잊지마. 난 지금 나와있다는 가장 리얼리티가 높은 심센스에도 속지 않아."
"글세…. 하지만 너무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라서 말이야. 도대체가 가상 현실 속에서 악마를 만나다니."
"나도 믿기지 않아. 하지만 내 직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어."
직감이라는 말을 듣자 그는 더욱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휘적휘적 저었다. 그는 직감 같은 것은 전혀 신뢰하지 않았다. 직감 같은 것을 믿을수 있다면 세상에 증거를 찾아다닐 사람이 어디있겠나 말이야.
"그러지 말고 다시 한번 틀어서 봐봐. 혹시 알아. 착각한 걸지도 모르는데."
"그게… 안돼…."
"왜?"
"컴퓨터를 쓸수가 없어…."
그녀는 괴로운 얼굴로 대답했다.
"무서워서 도저히 다시 억세스 해볼 할 엄두가 나지 않아. 아니 가상공간에 들어갈수가 없어. 데이터 잭에 케이블을 연결할수도 없을것 같아…."
"무섭다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 참."
"정말이야! 너무 무서워서 케이블을 연결하려고 하면 손이 나도 모르게 마비되어 버린다니까! 억지로 하려고 하면 경련이 심하게 일어나서 도저히 연결할수가 없어."
등용은 짐작도 못했지만 그녀는 분명히 가상현실 공포증세를 일으키고 있었다. 가상공간에서 끔찍한 공포를 맛본 그녀의 무의식이 다시 가상공간에 들어가는 행위 자체를 차단하려 하는 것이다. 이것은 보통 사이버 성폭행을 당한 경우에나 발생하는 증상이었는데.
"그럼 날더러 어떻게 해달라는 거야? 이거 들고 어디 샤먼에게 가서 푸닥거리라도 해줄까?"
"아니, 그걸 나 대신 한번만 써줘. 그러기만 하면 돼."
"뭐야?"
"네 말대로 나도 내 직감을 완전히 믿는건 아니거든. 내가 착각한 걸지도 모르고…. 아니 차라리 그랬던
것이면 좋겠어. 그래서 확인해 달라는 거야. 나 이런 상태로는 일도 못한단 말이야."
"으음."
등용은 디스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겉으로 봐서는 평범한 복사용 디스크와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듣고나니 기분탓이겠지만 어딘가 섬찟한 빛을 발하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이야이 은나하 요그 소도스 히이-를겝 파이스로덕 우아아하."
그 때 일레인이 갑자기 그 주문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순간 그녀의 목소리는 본래 그녀의 목소리보다 한 단계 낮고 심연속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은 기괴한 목소리로 변해 있었다. 마치 그녀가 말했던 그 존재가 그녀의 입을 빌어서 말하는 것 처럼.
"가… 갑자기 뭐야?!"
"아? 이게 바로 그때 들은 주문이야. 다른건 생각하기도 무서운데 이것만은 똑똑히 기억되어 있어."
등용은 문득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많은 연구와 발견이 이루어 졌음에도 영이나 마법의 세계는 아직 미지의 영역이 많이 남아있는 분야였다. 학자들은 일반인들이 미지의 존재에 함부로 접촉하려 하는 것은 돌이킬수 없는 사고를 발생시킬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잘 모르는 영역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지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심리였다.
"그건 좀 생각해봐야겠는데…. 나도 완전히 믿는건 아니지만, 만에 하나 네 말대로 이게 그런 존재와 접촉하는 것이라면 나에게 피해가 가지 않겠어?"
"그럼 도와주지 않겠다는…."
"아냐. 그런건 아냐."
그렇다고 해서 그런 사소한 불안 때문에 발뺌을 한데서야 체면이 서지 않는다. 게다가 알수없는 미지의 것에 대해서는 공포만이 아니라 흥미도 느끼는 것이 인간이 아닌가. 알아보고 싶은 마음은 들었다. 하지만 역시 자기가 직접 뛰어드는 것은 불안했고.
"좋아. 내가 이런 걸 조사해볼 만한 사람을 하나 알고있어. 그를 찾아가 보도록 하지."
등용은 그녀를 아래 구역으로 데리고 내려갔다. 어제 그녀가 위험을 겪었던 환락가보다 더 아래에 있는 이 구역은 하층민들의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시장 거리였다. 이곳의 거의 모든 가게는 고물상에 가까운 잡화상이었으며, 더 많은 수의 상인들이 노점을 이루어 붐비고 있었다. 나와 있는 물건들의 대부분은 중고품이었고, 얼마 되지 않는 신품은 모두 장물이라는 이야기가 신빙성 있게 받아들여지는 곳이었다. 또한 너나할것 없이 불법도가 굉장히 높은 구역이라 제대로 훑어내고자 하면 이곳 전체를 교도소로 옮길수 있다는 이야기 까지 있는 곳이었다.
바로 전날 좋지 않은 경험을 한 뒤라 일레인은 이런 곳에 오니 불안하기 그지 없었다. 오크나 트롤, 고블린 같은 종족들이 매우 많이 돌아다니기도 했기 때문이다. 혹시 어제 그 무리들과 다시 마주치지는 않을까?
"걱정할거 없어."
등용은 그녀를 안심시켜주었다.
"여긴 이쪽에서 조심하기만 하면 별 문제없는 동네야. 게다가 이 근처에는 내 친구들도 많다고."
"하지만 어제 그 녀석들이 다시 오기라도 하면...."
"그런 녀석 들이라면 걱정할거 없어. 한번 두들겨 패주면 얼굴도 못 드는 놈들이야. 그리고 너 목에 뱀파이어가 찍었다는 표시가 남아있잖아. 그게 있으면 어지간히 배짱이 두둑한 놈이 아닌 이상 건드리지 않아."
"에? 그런가?"
틀림없이 일레인의 목에는 어제 게일이 물었던 장소에 두개의 송곳니 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었다.
"이런 거리에서도 꽤 날리는 뱀파이어들이 많으니까. 그런 상처가 있으면 그 중 누군가가 찍은 여자라고 생각해서 접근하려 하지 않을꺼야."
"으음."
이유를 들어보니 다행이기는 했지만 이런게 점찍힌 표시라니 약간 묘한 느낌이 들었다.
골목을 굽이굽이 돌아가자 '투린 박사의 컴퓨터와 가전제품'라는 간판이 달린 고물더미가 나왔다. 고물더미라고 표현한 것은 그 앞에 온갖 낡은 가전 제품이 어지럽게 쌓여 있어서 어디가 입구인지도 모를 정도였기 때문이다. 아니 그 간판 조차도 우연히 고물더미 위에 놓여있을 뿐인 것 처럼 보였다.
그는 그 고물더미 위의 것 중에서 현재는 거의 단종된 물건인 유선식 가정용 전화기의 수화기를 골라 들어 거기에 대고 말했다.
"투린 아저씨! 저 왔습니다. 문 좀 열어주세요."
'그럼 이게 가게야?!'
일레인이 어리둥절해 있을때 그 전화기 옆에 있는 냉장고의 문이 갑자기 확 열렸다. 냉장고 문 안쪽에 문을 열기위한 기계장치가 되어있었다. 본래 식료품이 담겨있어야 할 칸은 텅 비어있고 뒷쪽으로는 깊고 깊은 터널이 뚫려있었다.
"자. 들어가자."
등용은 허리를 굽혀서 너구리 굴처럼 좁은 그 곳으로 거의 기다시피 해서 들어갔다.
'대체 이런 곳에 사는건 어떤 인간이야?'
일레인은 황당한 표정으로 그 뒤를 따랏다.
-계속
ps)댓글 좀 에궁 에궁
Igne Natura Renovatur Integ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