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연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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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끼이익.
문이 열렸다. 얄리안으로 들어선 레비아탄은 한가운데로 성큼성큼 들어섰다. 방 한가운데. 커다란 방석위 그녀를 여기까지 불러들인 여자가 앉아있었다. 근육질의 긴 다리를 꼬고 앉은 전형적인 토라나 로챠나의 오른쪽 팔만 진홍빛이며 나머지는 남색일색인 스틸수트정복을 입은 여자. 그녀는 레비아탄과 동족여자였다. 동족이기 때문만은 아니어서 둘은 꽤나 닮은 구석이 많았다. 티한점 없는 해맑은 피부. 농염한 진홍빛 입술. 절색이라 불릴만한 수려한 이목구비. 꽉 짜여진 균형잡힌 골격. 차이가 있다면 어른과 아이란 정도? 아, 그래. 머리칼과 눈의 색이 조금 다르다는 정도랄까. 레비아탄이 백금빛의 머리칼을 가졌다면 이 여자는 진짜 순수한 유백색의 머리칼을 가지고 있었다. 레비아탄의 모성인 환한에선 흔히 볼 수 있는 빙하나 빙산에서 그대로 조각을 떠낸 것같은 옅은 잿빛눈을 가진 여자.
청춘의 방향을 물씬 풍기고 있는 당당한 카투스 Cattus족 여자다.
불같은 야성과 빙산의 냉혹한 지성.
이 대립되는 두 특성이 그녀에게 있어서 조화의 경지에 이르러 있다.
여자는 만족스럽다는 듯 느긋하게 웃으며 레비아탄을 반겼다.
같은 여자라도 유혹당하고도 남을 농염한 표정. 그러나 풍만한 가슴과 거친 스틸수트위로 드러난 얼굴은-그녀가 최상급 로챠나임을 의미하는 상징인 틸라크[* Tilak- 쥬에스타급 이상의 로챠나가 오른 쪽 얼굴 절반과 목 젖가슴까지에 걸쳐하는 문신 ]로 인해 오래보고 있노라면 왠지 심란한 느낌이 들곤했다.
[로챠나]라 불리우는 이마에 박힌 3개의 금속조각은 여자에게 어울리는 차가운 은빛이다.
흰색과 진홍색으로 문신한 구역을 제외한 피부는 눈처럼 뽀얗고 투명했다. 이목구비는 너무나 또렷하여 조각칼로 깍아낸듯 하다. 단지 그 미모는 카투스족 특유의 너무나 강한 눈빛때문에 지나치게 냉혹해 보였다. 그리고 사실을 말하자면 보이는 것 이상으로 무자비하며 냉혹한 여자이기도 했다.
분위기를 보나 외모를 보나 레비아탄이 성인이 된다면 저 비슷한 모습이 되지 않을까라는 상상이 드는 그런 모습이다.
사실 두 여자는 가까운 혈족이었다.
레비아탄과는 도제(徒弟)와 스승이라는 관계로 개인스승을 자처하고 있는 현 토라나에 존재하는 9명의 장로들 중 3번째 장로 3야, 바이샤카 토페트.
바로 그녀는 레비아탄 아버지의 친누나였으니까.
" 마에."
레비아탄이 스승에 대한 예를 표하자 토페트는 얼굴 한가득 미소를 떠올렸다. 그녀의 미소에 주변 일대가 온통 눈꽃과 빛무리에 휩싸인듯 했다.
레비아탄의 냉정한 유리눈엔 모처럼 감정이 떠올라 있다. 그 감정의 정체란 순수하게 벅찬 존경심이었다. 스승의 얼굴만 대해도 벅차오르는 흠모의 마음. 살라그라마교단의 최고위 성직자계급인 12성인들중 한명의 전속 로챠나이자 현존하는 암살력을 특화한 로챠나들 중 가장 교활한 살인자라 알려진 로챠나, 바이샤카 엘 토페트.
토라나역사상 최고명품 시리즈로 일컬어지는 바로 그 엘[El-빛의 고대어]시리즈 중 일인 말이다.
그것이 오만한 레비아탄이 토페트를 하늘처럼 존경하고 따르는 이유다. 상위 로챠나를 동경하는 생도라면 누구나 가지는 그 능력에 대한 흠모말이다.
" 마에. 오는 도중에 44연구실 방향으로 6명의 헤드헌터들과 상위 로챠나로 보이는 에너지장이 느껴지는 자 하나를 보았습니다."
" 음, 바이샤카 알하그를 보았구나."
스승의 맑은 금속성 목소리에 정색을 한 레비아탄은 의문의 시선을 던졌다.
" 그렇다는 것은......결국 확정된 것입니까?"
" 그런 셈이다. 장로회에서도 허가했고. 재단에서도 말이 이미 끝났다. 참으로 운이 좋은 녀석이다, 보진 못했지만. 늘 실실 웃음을 흘리고 다니긴해도 도제따윈 발바닥의 때만큼도 못한 존재로 취급해서 않 키우던 바이샤카 알하그다. 라이칸슬롭 꼬맹이를 도제로 삼겠다고 제발로 뛰어다니다니. 반해도 단단히 반한게지. 성질급하고 콧대높기론 토라나 최고인 녀석이 녀석의 후원인에다가 스승을 자청했다. 내일은 모래충이 로챠나가 되겠다고 대해에서 토라나를 찾아올 판이다."
토페트의 그윽한 눈이 가늘어지며 어딘지 동요를 보이고 있는 레비아탄의 모습을 찬찬히 훓어내렸다. 분할 테지. 당연히 분해야 해. 그래야 카투스특유의 호승심이 훨훨 불타오를 테니까! 그래야 네가 더 강한 로챠나로 자랄 수 있는게다라고 내심 흐뭇해하며 토페트는 만족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자신의 도제를 향해 입을 열었다. 마치 이 상황을 즐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 즉, 생도들 중 도제가 된 아이가 너이외에 하나가 더 늘은 셈이다. 나와 네가 도제와 스승의 관계인 것처럼 알하그의 도제는 그 아이가 된 게야. 알하그와 나는 동급의 같은 특화분야에 종사하고 있는 로챠나다. 동급 로챠나라곤 해봐야 허약해 빠진 라트리따위 나와 전투력을 비교한다는 자체가 웃기긴 하지만-. 힘이 약한 이상으로 교활한 잔머리의 대가였지. [검은 의혹]과 [모략]과 [원인불명의 급사]뒤엔 늘 엘 알하그가 있었다. 난 녀석의 그런 면을 존경한다. 원래 로챠나란 양심이나 인간애따위완 애시당초 거리가 먼 족속이니까. 속을 짐작하기 힘든 악마적 교활함과 음흉함이야말로 로챠나의 [ 힘 ]을 이루는 요소들 중 으뜸인 것이다."
" 소문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 그렇다한들 라트리가 묘족의 맞상대가 될 수는 없는 법! 이기는 것도 한두번이지 매번 일방적인 내 승리로 끝나니 시시해지더군. 훈련을 받아도 늘 따분하고 시들했다. 날 상대할 놈이 있어야 재미도 있지 않겠느냐? 그런 면에서 넌 운이 너무나 좋다, 레비아탄. 라이칸슬롭 정도라면 약간 부족한 감은 있다만 우리 묘족과는 좋은 호적수가 될 전투종족이랄 수 있지. 기쁘지 않느냐? 사실 너역시 대적상대가 될 만한 상대가 지금의 생도들중엔 없어서 지루한 참이 아니더냐?"
[ 모욕 ].
[ 모욕이다 ].
묘족은 자긍심이 드높은 종족. 전사라는 이름에 관한 한 그들은 자신들 이외의 종족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럴 자격이 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독보적일만큼 강인한 전사의 종족이며 칼과 같은 예리한 지능과 실력을 겸비한 뛰어난 사냥꾼들이었기에. 이들은 자긍심과 자아가 너무나 강한 자들이라 개인주의가 극에 달한 자들이다.
때문에 동족간에도 무리를 이루지 않는다.
여자와 남자사이의 사랑이란 문제에 직면하는 상황에서도. 심지어 스승과 제자 부모자식사이에서조차 예외가 아니다. 아이와 남자들조차 거칠고 자기주장 강한 여간 사나운 종족이 아니다. 그런 묘족의 아이인 레비아탄으로선 다른 종족과 호적수 운운하는 말을 다른 자에게도 아닌 바로 같은 일족인 스승에게 들어야하는 입장이라는 건 아무리 어리다하나 굴욕이라고 밖에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스승과 제자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팽팽히 그들의 사이를 떠돌았다. 그러나 긴장감은 어린 소녀의 냉랭한 대답에 의해 산산히 깨어졌다.
" 마에. 라이벌이 있든 없든 누가 보충으로 들어오든 말았든 저완 상관없는 일입니다. 레비아탄은 전투암살특화 로챠나들 중 최고를 뜻하는 << 하얀 이방인 >>이 되기 위해 토라나에 들어왔습니다. 그 목표를 위해 이제껏 해온 것처럼 최선을 다해 정진할 뿐입니다. 물론 라이벌이라 부를만한 존재가 제 동기를 중 없다는건 저도 불만이긴 합니다. 허나 그런 사소한 일에 연연한다면 마챠[로챠나 예비생도를 부르는 말]의 자격은 없다봐야겠죠."
어느 새 냉정을 되찾은 레비아탄은 담담한 어조로 스승의 도발어린 속내를 떠보는 말에 이렇게 대꾸했다. 방금까지의 동요는 마치 거짓이었다는 것처럼. 레비아탄의 표정은 도도함이 가득하여 거만하게까지 보였다. 새로 들어올 아이따윈 그가 누구의 도제가 되었든 누구든간에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오만한 말투.
토페트의 입에서 천장이 떠나갈듯 호방한 웃음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녀의 웃음은 무엇을 뜻하는가? 어린 나이에도 이렇듯 자제력이 뛰어난 제자의 모습이 흐뭇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 오만함이 마음에 든 것인가?
무표정한 얼굴로 레비아탄은 이렇게 말을 끝맺었다.
" 긍지높은 묘족인 제가 라이칸슬롭족따위를 전사의 일족이라 말하는 것이 좀 우습지만 라트리족이나 아라니야니족보다는 확실히 상대할 맛이 낫겠지요. 아무리 우리 묘족의 눈으로 본다면야 전사라는 말을 쓸 자격조차없는 2등종족, 가소로운 3류 전사들만 배출하는 라이칸슬롭이라지만 넘치는 체력 하나쯤은 인정할만한 족속이니 말입니다. 이번에 온다는 그 녀석이 조금은 쓸만한 애였으면 좋겠군요. 얼마나 대단한 애든 스승님께 사사받고 있는 이 레비아탄을 따라오려면 젖먹던 힘까지 짜내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 우후후후후후......하수구 며칠 헤맸다고 혀가 매끄러워졌구나. 이번 실습훈련에선 아부하는 법도 가르치더냐? 제법이구나. 이론 고문학시간이 끝나면 제 1훈련실로 나와라. 이번 실습훈련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을 낸 생도는 한가지 임무를 맡게된다는 말이 오가고 있지. 너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그러니 특훈이라도 받아두는 편이 좋지 않겠느냐? 각오를 단단히 하는 편이 좋다. 오늘은 이 스승이 땀을 흘리고 싶은 기분이니까."
아름다운 스승의 귀여워죽겠다는 애정어린 시선을 담뿍받으며 레비아탄은 이제 가봐도 좋다는 손짓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토페트의 옅은 회색눈이 뭔가 음모를 꾸미는양 가늘어졌다. 눈웃음을 짓는 모양새가 오늘 저녁 몸성히 자긴 글렀음을 의미했으나 레비아탄은 어떤 표정도 떠올리지 않았다.
그저 시선을 내리깔고 고개를 숙였을 뿐이다.
레비아탄은 존경하는 스승에게 감사의 예를 표한 후 뒷걸음질쳐 문까지 걸어간 후 천천히 문을 닫았다.
토라나의 바로 위 지상은 아마도 여전히 모래폭풍이 몰아쳐 지옥의 풍광을 연출하고 있을 것이다.찢어질듯 음속을 넘어가는 태풍이 이동하며 들리는 파공음으로 인해 아무것도 들을 수 없는 상황이리라. 아마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피의 안개와 같은 형상일 테지. 그러나 지하 깊은 곳에 위치한 토라나의 내부건물은 늘 그렇듯이 납골당을 연상시킬만큼 고요하다. 아니, 납골당은 좀 지나친 비유같군. 승려들이 머무는 수행실이나 성전에 가까울 정도의 정적과 고요함이다. 왠지 마음이 가라앉아 자신을 되돌아보기 딱 적당할 정도의 공간. 신을 믿거나 믿지않거나 성전을 찾은 자들은 모두 문밖을 나설때 만큼은 적어도 마음의 안정을 되찾을 수 있는 장소.
아무도 없는 복도. 당연한 일이다. 이 복도는 장로실들과 사감실혹은 각종 연구실들이 모여있는 중요한 곳이 연결된 복도기 때문이다. 이곳은 허가를 받은 특별한 존재나 관계자 이외에는 함부로 발을 디딜 수 없다.
생도들 중 이 곳을 허가없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자는 오직 그녀뿐이다.
[[ 아니 그녀뿐이었었다.]]
레비아탄의 잘생긴 어깨는 언제나처럼 당당하게 쫙 펴져 있었다. 등은 꼿꼿했고 걸음걸이도 어린 왕족이라도 되는 것처럼 품위가 넘쳤다. 비록 피곤해 죽을 정도라해도 잠을 자고 싶은 마음을 갖은 인내력으로 참아내야하는 이런 상황일지라도. 아무도 보는 자가 없다해도 몸가짐만은 자로 잰듯 바른 것이어야한다! 이것은 어린 레비아탄의 자존심이었다. 묘족에게 있어 목숨과 바꿔서라도 지켜야할 오직 단 한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명예와 자존심뿐이다.
설령 목에 칼이 박히는 순간이라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것은 치욕이다.
그녀는 한참을 아무도 지나감이 없는 복도를 걸어가다 어느 지점에서 멈추어섰다.
예의 후드를 쓴자들이 들어갔던 복도의 또다른 갈래길.
바이샤카 알하그. 헤드 헌터 그리고 장로회의 인사들. 빛마져 새어나오지 않는 머나먼 끝에 위치한 연구실에선 과연 무슨 비밀스런 회의가 진행되고 있는 것일까?
10살. 아이큐 350의 라이칸슬롭. 라이벌.
1만년에 한명 태어날까 말까하다는 분터킨트(신동).
암호해독능력을 특화할 아이.
그렇다는 것은 그녀와는 앞으로 받을 훈련과 배치될 분야가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 암살살상능력을 특화시킬 그녀와는 극과 극이 된다. 맞부딪힐 일은 드물테지만-
그러나......
머리위 등불은 반질반질 닦여진 흑적색 돌바닥의 표면위에 레비아탄의 모습을 거울처럼 비춰지고 있다. 아직 어린아이였으나 나이답지 않게 당당하며 위엄이 느껴지는 아이. 최고의 실력을 갖춘 장인이 일생의 역작을 만들려 작정하고 얼음을 깎아 소녀신을 조각한 듯 청명한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냉정한 소녀의 그림자를. 그녀는 무표정했으나 유리알같이 번쩍이는 두 눈엔 복잡한 감정이 그득 담겨있었다. 바닥에 비친 소녀의 환영은 지금 한 방향만을 집요하게 바라보고 있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은 암흑의 심연이다.
어딘가 묘한 느낌의 악기를 연주하는듯한 소리가 파동처럼 밀려들어왔다.
어둠속 저 너머. 집요하게 시선을 던지고 있는 생도 레비아탄의 뇌리엔 그 순간 한가지 생각만이 강박적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스승을 뵙던 때부터 시작된 그 생각은 거머리처럼 들러 붙어 레비아탄을 성가시게하는 솝톱밑에 박힌 일종의 작은 가시다. 레비아탄의 두 눈이 어둠속에서 횃불처럼 훨훨 불타고 있었다.
- 나, 레비아탄은 그 어떤 생도보다 강하다. 나는 최강의 전투능력을 가진 바이샤카 토페트의 도제임에 부끄럽지 않을 만큼 그 어떤 생도에 못지 않게 강한 생도다. 나,레비아탄은 바이샤카급 로챠나인 스승님의 도제가 되기 위해 5년을---그 분의 마음에 들기 위해 이 곳에서 뼈를 깎는 노력을 해왔다. 그러기위해 이 손에 얼마의 피를 묻혔는가? 얼마나 많은 나자신의 땀과 눈물과 피를 흘렸던가?
- 나는 엘리트다. 태어나자마자 토라나에 들어오기 위해 생도가 되기 위한 훈련을 시작했고 2만대 1의 경쟁율을 뚫고 시험을 쳐 오늘날 이 자리에 도달했다. 그런데......
그런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저 무저갱의 어디쯤 잠들었던 웅크린 심연이 소녀를 인식하고 그녀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흐릿한 빛줄기속의 어린 아이. 검붉은 돌을 깍아 이루어진 깜깜한 터널한가운데 홀로 서 있는 소녀.
......자그마한 얼굴은 그 순간 극심한 분노로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계속]]
*1.얄리- 개인용 방 혹은 거실을 의미한다.
문이 열렸다. 얄리안으로 들어선 레비아탄은 한가운데로 성큼성큼 들어섰다. 방 한가운데. 커다란 방석위 그녀를 여기까지 불러들인 여자가 앉아있었다. 근육질의 긴 다리를 꼬고 앉은 전형적인 토라나 로챠나의 오른쪽 팔만 진홍빛이며 나머지는 남색일색인 스틸수트정복을 입은 여자. 그녀는 레비아탄과 동족여자였다. 동족이기 때문만은 아니어서 둘은 꽤나 닮은 구석이 많았다. 티한점 없는 해맑은 피부. 농염한 진홍빛 입술. 절색이라 불릴만한 수려한 이목구비. 꽉 짜여진 균형잡힌 골격. 차이가 있다면 어른과 아이란 정도? 아, 그래. 머리칼과 눈의 색이 조금 다르다는 정도랄까. 레비아탄이 백금빛의 머리칼을 가졌다면 이 여자는 진짜 순수한 유백색의 머리칼을 가지고 있었다. 레비아탄의 모성인 환한에선 흔히 볼 수 있는 빙하나 빙산에서 그대로 조각을 떠낸 것같은 옅은 잿빛눈을 가진 여자.
청춘의 방향을 물씬 풍기고 있는 당당한 카투스 Cattus족 여자다.
불같은 야성과 빙산의 냉혹한 지성.
이 대립되는 두 특성이 그녀에게 있어서 조화의 경지에 이르러 있다.
여자는 만족스럽다는 듯 느긋하게 웃으며 레비아탄을 반겼다.
같은 여자라도 유혹당하고도 남을 농염한 표정. 그러나 풍만한 가슴과 거친 스틸수트위로 드러난 얼굴은-그녀가 최상급 로챠나임을 의미하는 상징인 틸라크[* Tilak- 쥬에스타급 이상의 로챠나가 오른 쪽 얼굴 절반과 목 젖가슴까지에 걸쳐하는 문신 ]로 인해 오래보고 있노라면 왠지 심란한 느낌이 들곤했다.
[로챠나]라 불리우는 이마에 박힌 3개의 금속조각은 여자에게 어울리는 차가운 은빛이다.
흰색과 진홍색으로 문신한 구역을 제외한 피부는 눈처럼 뽀얗고 투명했다. 이목구비는 너무나 또렷하여 조각칼로 깍아낸듯 하다. 단지 그 미모는 카투스족 특유의 너무나 강한 눈빛때문에 지나치게 냉혹해 보였다. 그리고 사실을 말하자면 보이는 것 이상으로 무자비하며 냉혹한 여자이기도 했다.
분위기를 보나 외모를 보나 레비아탄이 성인이 된다면 저 비슷한 모습이 되지 않을까라는 상상이 드는 그런 모습이다.
사실 두 여자는 가까운 혈족이었다.
레비아탄과는 도제(徒弟)와 스승이라는 관계로 개인스승을 자처하고 있는 현 토라나에 존재하는 9명의 장로들 중 3번째 장로 3야, 바이샤카 토페트.
바로 그녀는 레비아탄 아버지의 친누나였으니까.
" 마에."
레비아탄이 스승에 대한 예를 표하자 토페트는 얼굴 한가득 미소를 떠올렸다. 그녀의 미소에 주변 일대가 온통 눈꽃과 빛무리에 휩싸인듯 했다.
레비아탄의 냉정한 유리눈엔 모처럼 감정이 떠올라 있다. 그 감정의 정체란 순수하게 벅찬 존경심이었다. 스승의 얼굴만 대해도 벅차오르는 흠모의 마음. 살라그라마교단의 최고위 성직자계급인 12성인들중 한명의 전속 로챠나이자 현존하는 암살력을 특화한 로챠나들 중 가장 교활한 살인자라 알려진 로챠나, 바이샤카 엘 토페트.
토라나역사상 최고명품 시리즈로 일컬어지는 바로 그 엘[El-빛의 고대어]시리즈 중 일인 말이다.
그것이 오만한 레비아탄이 토페트를 하늘처럼 존경하고 따르는 이유다. 상위 로챠나를 동경하는 생도라면 누구나 가지는 그 능력에 대한 흠모말이다.
" 마에. 오는 도중에 44연구실 방향으로 6명의 헤드헌터들과 상위 로챠나로 보이는 에너지장이 느껴지는 자 하나를 보았습니다."
" 음, 바이샤카 알하그를 보았구나."
스승의 맑은 금속성 목소리에 정색을 한 레비아탄은 의문의 시선을 던졌다.
" 그렇다는 것은......결국 확정된 것입니까?"
" 그런 셈이다. 장로회에서도 허가했고. 재단에서도 말이 이미 끝났다. 참으로 운이 좋은 녀석이다, 보진 못했지만. 늘 실실 웃음을 흘리고 다니긴해도 도제따윈 발바닥의 때만큼도 못한 존재로 취급해서 않 키우던 바이샤카 알하그다. 라이칸슬롭 꼬맹이를 도제로 삼겠다고 제발로 뛰어다니다니. 반해도 단단히 반한게지. 성질급하고 콧대높기론 토라나 최고인 녀석이 녀석의 후원인에다가 스승을 자청했다. 내일은 모래충이 로챠나가 되겠다고 대해에서 토라나를 찾아올 판이다."
토페트의 그윽한 눈이 가늘어지며 어딘지 동요를 보이고 있는 레비아탄의 모습을 찬찬히 훓어내렸다. 분할 테지. 당연히 분해야 해. 그래야 카투스특유의 호승심이 훨훨 불타오를 테니까! 그래야 네가 더 강한 로챠나로 자랄 수 있는게다라고 내심 흐뭇해하며 토페트는 만족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자신의 도제를 향해 입을 열었다. 마치 이 상황을 즐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 즉, 생도들 중 도제가 된 아이가 너이외에 하나가 더 늘은 셈이다. 나와 네가 도제와 스승의 관계인 것처럼 알하그의 도제는 그 아이가 된 게야. 알하그와 나는 동급의 같은 특화분야에 종사하고 있는 로챠나다. 동급 로챠나라곤 해봐야 허약해 빠진 라트리따위 나와 전투력을 비교한다는 자체가 웃기긴 하지만-. 힘이 약한 이상으로 교활한 잔머리의 대가였지. [검은 의혹]과 [모략]과 [원인불명의 급사]뒤엔 늘 엘 알하그가 있었다. 난 녀석의 그런 면을 존경한다. 원래 로챠나란 양심이나 인간애따위완 애시당초 거리가 먼 족속이니까. 속을 짐작하기 힘든 악마적 교활함과 음흉함이야말로 로챠나의 [ 힘 ]을 이루는 요소들 중 으뜸인 것이다."
" 소문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 그렇다한들 라트리가 묘족의 맞상대가 될 수는 없는 법! 이기는 것도 한두번이지 매번 일방적인 내 승리로 끝나니 시시해지더군. 훈련을 받아도 늘 따분하고 시들했다. 날 상대할 놈이 있어야 재미도 있지 않겠느냐? 그런 면에서 넌 운이 너무나 좋다, 레비아탄. 라이칸슬롭 정도라면 약간 부족한 감은 있다만 우리 묘족과는 좋은 호적수가 될 전투종족이랄 수 있지. 기쁘지 않느냐? 사실 너역시 대적상대가 될 만한 상대가 지금의 생도들중엔 없어서 지루한 참이 아니더냐?"
[ 모욕 ].
[ 모욕이다 ].
묘족은 자긍심이 드높은 종족. 전사라는 이름에 관한 한 그들은 자신들 이외의 종족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럴 자격이 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독보적일만큼 강인한 전사의 종족이며 칼과 같은 예리한 지능과 실력을 겸비한 뛰어난 사냥꾼들이었기에. 이들은 자긍심과 자아가 너무나 강한 자들이라 개인주의가 극에 달한 자들이다.
때문에 동족간에도 무리를 이루지 않는다.
여자와 남자사이의 사랑이란 문제에 직면하는 상황에서도. 심지어 스승과 제자 부모자식사이에서조차 예외가 아니다. 아이와 남자들조차 거칠고 자기주장 강한 여간 사나운 종족이 아니다. 그런 묘족의 아이인 레비아탄으로선 다른 종족과 호적수 운운하는 말을 다른 자에게도 아닌 바로 같은 일족인 스승에게 들어야하는 입장이라는 건 아무리 어리다하나 굴욕이라고 밖에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스승과 제자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팽팽히 그들의 사이를 떠돌았다. 그러나 긴장감은 어린 소녀의 냉랭한 대답에 의해 산산히 깨어졌다.
" 마에. 라이벌이 있든 없든 누가 보충으로 들어오든 말았든 저완 상관없는 일입니다. 레비아탄은 전투암살특화 로챠나들 중 최고를 뜻하는 << 하얀 이방인 >>이 되기 위해 토라나에 들어왔습니다. 그 목표를 위해 이제껏 해온 것처럼 최선을 다해 정진할 뿐입니다. 물론 라이벌이라 부를만한 존재가 제 동기를 중 없다는건 저도 불만이긴 합니다. 허나 그런 사소한 일에 연연한다면 마챠[로챠나 예비생도를 부르는 말]의 자격은 없다봐야겠죠."
어느 새 냉정을 되찾은 레비아탄은 담담한 어조로 스승의 도발어린 속내를 떠보는 말에 이렇게 대꾸했다. 방금까지의 동요는 마치 거짓이었다는 것처럼. 레비아탄의 표정은 도도함이 가득하여 거만하게까지 보였다. 새로 들어올 아이따윈 그가 누구의 도제가 되었든 누구든간에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오만한 말투.
토페트의 입에서 천장이 떠나갈듯 호방한 웃음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녀의 웃음은 무엇을 뜻하는가? 어린 나이에도 이렇듯 자제력이 뛰어난 제자의 모습이 흐뭇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 오만함이 마음에 든 것인가?
무표정한 얼굴로 레비아탄은 이렇게 말을 끝맺었다.
" 긍지높은 묘족인 제가 라이칸슬롭족따위를 전사의 일족이라 말하는 것이 좀 우습지만 라트리족이나 아라니야니족보다는 확실히 상대할 맛이 낫겠지요. 아무리 우리 묘족의 눈으로 본다면야 전사라는 말을 쓸 자격조차없는 2등종족, 가소로운 3류 전사들만 배출하는 라이칸슬롭이라지만 넘치는 체력 하나쯤은 인정할만한 족속이니 말입니다. 이번에 온다는 그 녀석이 조금은 쓸만한 애였으면 좋겠군요. 얼마나 대단한 애든 스승님께 사사받고 있는 이 레비아탄을 따라오려면 젖먹던 힘까지 짜내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 우후후후후후......하수구 며칠 헤맸다고 혀가 매끄러워졌구나. 이번 실습훈련에선 아부하는 법도 가르치더냐? 제법이구나. 이론 고문학시간이 끝나면 제 1훈련실로 나와라. 이번 실습훈련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을 낸 생도는 한가지 임무를 맡게된다는 말이 오가고 있지. 너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그러니 특훈이라도 받아두는 편이 좋지 않겠느냐? 각오를 단단히 하는 편이 좋다. 오늘은 이 스승이 땀을 흘리고 싶은 기분이니까."
아름다운 스승의 귀여워죽겠다는 애정어린 시선을 담뿍받으며 레비아탄은 이제 가봐도 좋다는 손짓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토페트의 옅은 회색눈이 뭔가 음모를 꾸미는양 가늘어졌다. 눈웃음을 짓는 모양새가 오늘 저녁 몸성히 자긴 글렀음을 의미했으나 레비아탄은 어떤 표정도 떠올리지 않았다.
그저 시선을 내리깔고 고개를 숙였을 뿐이다.
레비아탄은 존경하는 스승에게 감사의 예를 표한 후 뒷걸음질쳐 문까지 걸어간 후 천천히 문을 닫았다.
토라나의 바로 위 지상은 아마도 여전히 모래폭풍이 몰아쳐 지옥의 풍광을 연출하고 있을 것이다.찢어질듯 음속을 넘어가는 태풍이 이동하며 들리는 파공음으로 인해 아무것도 들을 수 없는 상황이리라. 아마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피의 안개와 같은 형상일 테지. 그러나 지하 깊은 곳에 위치한 토라나의 내부건물은 늘 그렇듯이 납골당을 연상시킬만큼 고요하다. 아니, 납골당은 좀 지나친 비유같군. 승려들이 머무는 수행실이나 성전에 가까울 정도의 정적과 고요함이다. 왠지 마음이 가라앉아 자신을 되돌아보기 딱 적당할 정도의 공간. 신을 믿거나 믿지않거나 성전을 찾은 자들은 모두 문밖을 나설때 만큼은 적어도 마음의 안정을 되찾을 수 있는 장소.
아무도 없는 복도. 당연한 일이다. 이 복도는 장로실들과 사감실혹은 각종 연구실들이 모여있는 중요한 곳이 연결된 복도기 때문이다. 이곳은 허가를 받은 특별한 존재나 관계자 이외에는 함부로 발을 디딜 수 없다.
생도들 중 이 곳을 허가없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자는 오직 그녀뿐이다.
[[ 아니 그녀뿐이었었다.]]
레비아탄의 잘생긴 어깨는 언제나처럼 당당하게 쫙 펴져 있었다. 등은 꼿꼿했고 걸음걸이도 어린 왕족이라도 되는 것처럼 품위가 넘쳤다. 비록 피곤해 죽을 정도라해도 잠을 자고 싶은 마음을 갖은 인내력으로 참아내야하는 이런 상황일지라도. 아무도 보는 자가 없다해도 몸가짐만은 자로 잰듯 바른 것이어야한다! 이것은 어린 레비아탄의 자존심이었다. 묘족에게 있어 목숨과 바꿔서라도 지켜야할 오직 단 한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명예와 자존심뿐이다.
설령 목에 칼이 박히는 순간이라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것은 치욕이다.
그녀는 한참을 아무도 지나감이 없는 복도를 걸어가다 어느 지점에서 멈추어섰다.
예의 후드를 쓴자들이 들어갔던 복도의 또다른 갈래길.
바이샤카 알하그. 헤드 헌터 그리고 장로회의 인사들. 빛마져 새어나오지 않는 머나먼 끝에 위치한 연구실에선 과연 무슨 비밀스런 회의가 진행되고 있는 것일까?
10살. 아이큐 350의 라이칸슬롭. 라이벌.
1만년에 한명 태어날까 말까하다는 분터킨트(신동).
암호해독능력을 특화할 아이.
그렇다는 것은 그녀와는 앞으로 받을 훈련과 배치될 분야가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 암살살상능력을 특화시킬 그녀와는 극과 극이 된다. 맞부딪힐 일은 드물테지만-
그러나......
머리위 등불은 반질반질 닦여진 흑적색 돌바닥의 표면위에 레비아탄의 모습을 거울처럼 비춰지고 있다. 아직 어린아이였으나 나이답지 않게 당당하며 위엄이 느껴지는 아이. 최고의 실력을 갖춘 장인이 일생의 역작을 만들려 작정하고 얼음을 깎아 소녀신을 조각한 듯 청명한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냉정한 소녀의 그림자를. 그녀는 무표정했으나 유리알같이 번쩍이는 두 눈엔 복잡한 감정이 그득 담겨있었다. 바닥에 비친 소녀의 환영은 지금 한 방향만을 집요하게 바라보고 있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은 암흑의 심연이다.
어딘가 묘한 느낌의 악기를 연주하는듯한 소리가 파동처럼 밀려들어왔다.
어둠속 저 너머. 집요하게 시선을 던지고 있는 생도 레비아탄의 뇌리엔 그 순간 한가지 생각만이 강박적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스승을 뵙던 때부터 시작된 그 생각은 거머리처럼 들러 붙어 레비아탄을 성가시게하는 솝톱밑에 박힌 일종의 작은 가시다. 레비아탄의 두 눈이 어둠속에서 횃불처럼 훨훨 불타고 있었다.
- 나, 레비아탄은 그 어떤 생도보다 강하다. 나는 최강의 전투능력을 가진 바이샤카 토페트의 도제임에 부끄럽지 않을 만큼 그 어떤 생도에 못지 않게 강한 생도다. 나,레비아탄은 바이샤카급 로챠나인 스승님의 도제가 되기 위해 5년을---그 분의 마음에 들기 위해 이 곳에서 뼈를 깎는 노력을 해왔다. 그러기위해 이 손에 얼마의 피를 묻혔는가? 얼마나 많은 나자신의 땀과 눈물과 피를 흘렸던가?
- 나는 엘리트다. 태어나자마자 토라나에 들어오기 위해 생도가 되기 위한 훈련을 시작했고 2만대 1의 경쟁율을 뚫고 시험을 쳐 오늘날 이 자리에 도달했다. 그런데......
그런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저 무저갱의 어디쯤 잠들었던 웅크린 심연이 소녀를 인식하고 그녀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흐릿한 빛줄기속의 어린 아이. 검붉은 돌을 깍아 이루어진 깜깜한 터널한가운데 홀로 서 있는 소녀.
......자그마한 얼굴은 그 순간 극심한 분노로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계속]]
*1.얄리- 개인용 방 혹은 거실을 의미한다.
sf를 사랑하는 사람들중의 하나. 그러나 이 취향으로인해 주위사람들관 대화가 통하지 않는 슬픔이 있었으니-왜 다들 사람들은 sf를 어렵다고만 하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