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색한 변명입니다만, 근래 그림쟁이 소모임 게시판에서 그림체의 사실성을 약간 정도는 무시해도 상관없다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는 건, 몇몇 회원님들 중에 그림의 사실성을 너무 따지는 경향을 보이는 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초가 중요하다는 건 두 말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을 그릴 때 인체 비례를 알아야 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고, 새로운 자동차를 디자인할 때에는 자동차의 기본구조에 대해 알아야 하는 게 기본이며, 배경을 그릴 때에는 장소의 느낌과 공간감을 살리는 노하우를 익혀야 하는 게 기본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그리든 그 대상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아야 그릴 수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괴수 분들의 그림 중에서 인체비례가 무시된 캐릭터나 개연성이 결여된 그림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이러한 그림 중에는 그리는 사람이 버릇을 잘못 들였거나 경험이 부족해서 실수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비례가 의도적으로 무시되고 왜곡된 경우도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라면 정확한 지적이나 조언이 필요하겠죠. 그림을 그린 당사자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입니다. 조금 솔직한 지적이라도 어느 정도 용납이 가능하리라 여겨집니다. 물론 이것도 예의를 지키는 한도 내에서 이루어져야 할 일이지만요.

 문제는 후자의 경우을 평가하는 데에서 발생합니다. 이러한 그림에 대해 인체 비례가 어떻니 사실성이 어떻니 하면서 이것저것 따지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그림을 올린 분에게 실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린 이의 의도가 완전히 무시되거나 전혀 전달되지 못한 것이니까요. 답글에 아무리 예의를 갖추었다 해도, 그림을 올린 당사자로서는 답글을 올린 회원에게 섭섭한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구요. 이 때문에 몇몇 회원들 사이에서 감정 싸움이 벌어지는 일도 종종 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가 그림을 막 시작한 분들 사이에서 종종 보이기에, 그리는 사람의 스타일을 고려해달라는 차원에서 그림체의 사실성을 조금은 무시해 주어도 좋다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사실 그림을 막 시작하게 되면 조금이라도 더 그럴 듯하게 보이게 그리고 싶은 마음에 온갖 조건들을 이것저것 따지게 되기 마련입니다. 그만큼 시야가 좁아지는 경향이 있죠. 그러한 시선이 다른 사람이 그린 그림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도 주의하는 걸 이 사람은 주의하지 않는군" 하고 답글을 등록하는 게 아닌가 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저도 주의가 부족하구요.

 그러나 약간은 사실성을 무시해도 좋다는 것이지 아예 무시해도 무방하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리고, 기초를 튼튼히 다지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다진 기초를 자기 방식대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머릿속에 체워넣은 기초지식들 중에 몇 가지는 복합적으로 연결시키거나 슬쩍 비껴가거나 일부러 비틀어줄 수도 있는 재치와 응용력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바로 여기서 그림체의 차이가 발생합니다. 습득한 지식을 재해석하고 재구축하는 방식의 차이가 그림체를 좌우하는 것이죠.

 의도적으로 비례가 무시된 그림을 보고 "이렇게 그릴 사람이 아닌데 왜 이렇게 그렸지?" 하는 의문이 드시거든, "여기가 잘못되었다"고 지적을 하기 전에 "왜 이렇게 그렸을까"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가 이상하게 그려진 것 같은데 왜 이렇게 그리신 건가요?" 하고 물어 보시거나 그린 이의 의도를 추리해 보시기 바랍니다.
 의도적인 무시와 왜곡의 방식을 자신의 그림에 응용해 본다면 그림의 대한 사고가 넓어질 것이고, 그만큼 그림실력을 향상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해 봐도 이상하다고 느껴진다면, 그때에는 분명히 지적을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