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스스로에 대해 "현실적인 묘사에 익숙하다"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껏 보지 않고 있던 G.R.R 마틴의 "얼음과 불의 노래"를 우선 드라마로 접하고, 이후에 관심이 생겨 책으로 읽게 되었는데... "얼불노"를 읽으면서 나 자신 또한 어쩔 수 없이 "평범한 것에 길들여진" 사람에 불과하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더랬죠. 


뭐, 사람에게 취향의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대체로 어떠한 것을 바라고 원하는 공통된 경향성은 존재합니다. 예컨대, 사람들이 "이야기"에 바라는 것은 사실, 비슷비슷한 경우가 많지요. 흔하다, 뻔하다, 클리셰다... 등등이라고들 말하지만, 그 흔하고, 뻔하고, 클리셰인 것들이 끝없이 다른 "스킨"을 입은 채 재생산되고, 사람들은 꾸준히 그것을 찾는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죠. 


즉, 그러한 "뻔하디 뻔한"것들 중에서, 은연중에 사람이 내심 기대하고 바라게 되는 것 중 하나가 곧 "권선징악"인 것 같습니다. 선하고 올곧고 타인을 배려하는 이는 마침내 승리할 것이고, 악하고 뒤틀리며 타인을 짓밟는 이는 결국에는 벌을 받는다... 그야말로 뻔하기 이를데 없는 이 선과 악의 구도를, 그래도 사람들은 내심 원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 "뻔한 스토리"에 대한 반발로 단순하지 않고 다차원적인 캐릭터를 만들어 낸다든지 - 특히 악인이나 악당을 단순히 '악한 존재'로 일축하지 않고, 그 또한 나름대로의 이유와, 나름대로의 정의, 나름대로의 신념이 있는 캐릭터로 그려낸다든지.. - 여러 작은 소재가 복잡하게 구성된 중층적 스토리를 만들어낸다든지 하는 시도는 늘 있어 왔습니다. 선악의 구도를 보다 복잡하게 다변화시키거나, 어느 누구도 진짜로 "선하다"고 여길 수 없다는 보다 암울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든지... 정말로 다양한 것들이 시도가 되지요. 


하지만, 이제까지 접해온 수 많은 이야기들의 절대다수는 (정말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국에는 어떠한 식으로든, 책을 읽는 독자가 감정을 이입시킬 수 있는 주인공을 만들어내고, 단순하지 않고 대단히 복잡하다고 해도 대체로 그 주인공은 (개인의 행적이나 성격과는 별개의 의미에서) 스토리 내에서 "선역"을 맡게 되며, 결국에는 스토리를 관통하는 갈등의 끝에서 무엇인가를 극복하고 무엇인가에 대해 승리자가 되며 나름 "해피엔딩"을 이끌어 냅니다. 어느 정도 "급수"가 되는 작품들 중에서, 진정한 의미에서 "선한 자, 감정이입을 하는 주인공"이 "승리자"가 되지 못하는 작품은 드뭅니다. 유명한 작품들은 물론이거니와 양판소에서든 만화나 애니에서든, 다채로운 사상과 신념이 오간다고 한들 결국에는 주인공은 "마땅히 이루어져야 할 일"을 해내고, 무엇인가를 바로잡고, 그리고 해피엔딩을 맞게 되지요. 


...


뭐, 그런 것에 저도 적잖이 익수해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무래도 "얼불노"를 읽다보면, 기본적으로 "주인공적 포지션"에 있는 인물이나 세력들 중 기본적으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에다드가 이끄는 스타크 가문에 감정을 이입하게 되지요. 기본적으로 "모범적인 주인공"에 해당하는 인물들이 너무나도 많으니까요. 반면, "난쟁이" 티리온이라는 정말로 걸출하고 매력적인 인물이 있다고는 해도, 사실 타이윈이나 제이메, 세르시 등에 감정을 이입하기는 쉽지 않은 편입니다. 참으로 고생 많이 한다고는 하지만 대너리스와 같은 타르개리언 집안의 시각으로 작품을 바라보기도 힘들고요. 


아무래도 "다섯 왕의 전쟁"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스타크 집안 사람들은 앞서 얘기한 그 "평범한 권선징악의 소망"을 자극할만한 모든 요소를 다 갖췄다고 밖에 할 수 없는 듯 합니다. 


명분도, 대의도, 명예와 정직함도, 훈훈한 가족애, 형제의 우정, 멋진 중년의 매력이 넘치는 아버지 캐릭터에서, 복수를 위해 일어나는 고귀한 공자들, 매력적인 여동생 캐릭터도 있고, 게다가 속어로 소위 "간지난다"라고 할만한 일종의 패밀리어(-_-;;;)로 늑대를 데리고 다니기까지 하니... 정말이지 이런 것을 지닌 스타크가문이 주인공이 되지 않으면 누가 될 수 있을까요?


...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함정에 걸려 에다드가 일찌감치 퇴장합니다. 좋습니다. 여기 까지는 그래도 쉬이 이해하고 넘어갈만 합니다. 멋진 캐릭터이긴 했지만, 그 멋진 캐릭터가 비열한 자들의 계략으로 인해 목숨을 잃는다... 그렇다면 이거야말로 "본스토리"를 전개하는 아주 흔한 클리셰 - 복수를 위해 분연히 일어선 의로운 반란군, 그리고 그들에 의해 새로운 왕으로 옹립되는 진정한 주인공의 등장... 뭐 이런 식으로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으니까요. 


.... 그런데, 그 의로운 명문가에서 다스리던 도시는 정말로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이해하기도 힘들 정도의 악랄한 자들에게 그대로 넘어가고, 너무나 쉽게 사람들이 죽어갑니다. 그 정의로운 군대는 그야말로 개박살이 납니다. 그리고, 멋진 주인공급 아버지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선 멋진 아들은 더 처참하게 그야말로 "끔살" 됩니다. 당찬 어머니도 죽습니다. 그렇게 멋지게 대의를 위해 일어난 군대가 뭐,전쟁에서 패했다... 잔당이 살아남아 유격활동을 한다.. 그리고 그 고난을 이겨내고 마침내 그 작은 반란군이 멋진 역전을 이루어낸다.. 이런 것도 전혀 없네요. 


그냥, 대의고 명분이고, 의로운 사람이고 뭐고, 전쟁에서 싸웠고, 그렇고 그런 자들의 배신과 모략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고, 그리고 그 뿐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도 흩어지고, 소중하게 기르던 다이어울프들도 대부분 주인과 함께 죽고, 그야말로 풍비박산이 난 집안은 지금 이 시점에서는 아무런 꿈도 희망도 없습니다. 


... 따지고 보면, 역사학을 공부한 입장에서, 현실이라는 것은 그렇게 냉혹하다는 것을 모를리가 없는데 말입니다. 오죽하면 태사공 사마천도 같은 것을 느끼고, <사기>를 통해 그 현실의 비정함을 한탄을 했을까요: "의인 백이와 숙제 형제는 굶어죽고, 인간의 생간을 먹던 살인강도 도척은 호의호식하며 천수를 누렸으니, 도대체 하늘의 뜻이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하고 말이죠. 아마 태사공께서도 이 소설을 읽고 제가 느낀 그런 위화감과 비슷한 것을 느끼셨나봅니다.  


그리고, 별 수 없이 저 또한, 속으로는, 내심은, "그래도 어떻게든 스타크 가문이 멋지게 재기하여 복수에 성공하겠지.."라고 생각한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다는 것을 자알 알게 되었답니다. (하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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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
"유럽에 하나의 유령이 출몰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데리다"아닙니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바로 당신의 유령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