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구에 빛이 들어오면서 주위가 약간 밝아진다. 허름한 옷차림에 머리를 짧게 깎은 한 사내가 나타났다. 사내 주위에는 지저분한 동굴 벽이 보인다.

 

안녕하세요, 전국의 모험가 여러분. 울프 크릭스입니다. 이번 달에는 특집으로 던전에서 생존하는 법을 3부에 걸쳐 진행합니다. 이곳은 20년 전에 악당 마법사 바글이 머물렀다는 동굴입니다. 저는 이곳에 보물을 찾으러 왔다가 함정에 걸리는 바람에 동료와 헤어지고 짐까지 몽땅 잃어버렸습니다. 이제 저는 보물을 찾는 것보다 여기서 살아나갈 길을 찾는 생존자가 되었습니다. 만일 모험가가 이런 상황에 처했을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늘은 그 두 번째 시간입니다. 저번 시간에는 던전에 어떻게 고립되는가, 어느 던전을 주의해야 하는가, 동료들과 헤어졌을 때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 식수를 구하는 방법 등을 알아보았습니다. 오늘은 길을 찾는 법, 열량을 아끼고 새로 구하는 방법, 환경에 따른 대처 방식, 모험가를 해칠 만한 몬스터와 조우하지 않는 법 등을 알아보려고 합니다. 참고로 이 영상은 레인저 훈련을 받는 모험가를 기준으로 만들었으니 다른 분들은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사내는 등을 보이고 앞서 나간다. 좁은 통로가 끝없이 이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4방향으로 갈라졌다. 울프 크릭스는 허리에 찬 단검을 뽑더니 벽에 작은 빗금을 그었다.

 

아무리 준비를 갖춘 모험가라고 해도 한 순간의 사고로 모든 짐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럴 경우 모험가들은 몸에 달고 다녔던 장비들만 믿을 수밖에 없는데, 그래서 대개 무기만 들고 고립되는 상황이 벌어지죠. 이 경우, 던전에서 홀로 지내는 것과 야외 생존은 다르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야생에서 혼자 떨어지는 것도 위험하긴 합니다만, 그래도 그곳은 자연 그대로의 천연 자원을 다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던전은 외부와 격리된 세계입니다. 자연적인 빛과 그림자, 별, 민물, 동식물 등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반면, 치명적인 산과 독가스가 가득 차기도 하죠. 알 수 없는 박테리아가 극한 환경에 적응하느라 호흡이 어렵습니다. 통로가 뚫린 방향으로 동선이 한정되며, 대부분 빛이 없어서 특수 장비나 마법이 필요하죠. 이 수정구 영상을 보시는 여러분들은 모두 인간일 테니까 이 점이 더욱 곤란해집니다. 사실 엘프라고 해도 빛이 너무 미약하면 앞을 보기 어렵습니다. 드워프가 아니고서야 특수한 빛이 필수적이죠. 따라서 빛을 발할 수 있는 장비를 항상 몸에 가까이 두시는 게 좋습니다. 지도까지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더 좋고요. 때로는 탐사하지 않은 곳으로 떨어질 수 있으니 가끔은 지도가 아무 소용이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울프 크릭스는 자세를 낮추고 통로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러더니 눈을 감고 손짓을 하면서 주문을 외웠다. 라이트 주문이었다. 돌 조각에 창백하고 푸르스름한 빛이 퍼졌다.

 

일단 저는 이 돌멩이에 라이트 주문을 걸어두었습니다. 상점에서 제일 값이 싸고, 가끔은 떨이 판매도 하며, 누구나 잠깐 짬을 내기만 한다면 금방 배울 수 있는 주문입니다. 만일 주문을 쓸 수 있는 기초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은 사람이라면, 빛을 내는 지팡이나 수정 조각을 품 안에 넣고 다니시기 바랍니다. 라이트 주문의 가격이 싼 만큼 이런 지팡이나 수정들도 그리 비싸지 않습니다. 게다가 한 번 사두면, 충천이 끝날 때까지 몇 번이고 쓸 수 있죠. 하지만 제일 좋은 주문은 울트라 비전입니다. 드워프 수준의 야간 시각으로 볼 수 있으며, 라이트처럼 우리 흔적을 드러내지도 않으니까요. 대신 울트라 비전은 약간 비쌉니다만, 그만한 값어치를 충분히 합니다. 카무플라주와 함께 하면 제격이죠. 그러면 이걸로 동굴 벽을 살펴볼까요? 여기 밑에 보시면 작은 빗금이 있습니다. 제가 약 한 시간 전에 그어놨던 거죠. 저기 남쪽과 동쪽도 그 흔적이 보입니다. 따라서 이 세 군데는 제가 왔던 길입니다. 그러니 저는 북쪽으로 가기로 하겠습니다. 아마 이 길을 따라가면 위층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올지도 모릅니다. 일단 출발하죠.

 

사내는 독특한 억양으로 설명하더니 조용히 발걸음을 옮기며 전진했다. 통로는 점차 넓어지더니 이제는 세 사람이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커졌다. 갖가지 자연적인 조형물들이 천장과 바닥에 가득하다.

 

지금까지 봤던 것과 통로 형태가 다릅니다. 이 끝에 정말 무언가가 있나 봅니다. 혹시 몬스터일지도 모른다고 걱정할 수도 있겠지만, 설사 누가 있다고 해도 그렇게 대단한 놈은 아닐 거에요. 보시면 알겠지만, 이 동굴에는 큰 짐승이 섭취할 에너지가 별로 없습니다. 심지어 일반적인 동굴의 생태계, 그러니까 엄청난 박쥐 군집이 동굴 외부에서 에너지를 섭취하고, 그걸 배설물로 바닥에 떨어뜨리고, 소형 동물 및 벌레들이 배설물로 다시 에너지를 얻고, 일부 포식자가 천장까지 기어올라가 박쥐를 잡아먹는 식의 순환이 반복되지 않아요. 이런 곳에는 오크나 고블린 부대가 있다고 오해들을 하는데, 오크가 여기에 거주할 필요가 뭐 있을까요? 마법사의 거주지이긴 했으나 이미 20년이 지났는데요. 물론 저처럼 길을 잃은 몬스터가 여기를 헤맬지도 모르니까 주의는 해야죠. 하지만 던전에서 마주칠 가장 큰 위협은 흔한 생각과는 달리 몬스터의 습격이 아닙니다. 심지어 이런 곳에서 용을 만날까 봐 걱정하는 모험가도 있습니다만. 용은 아무 동굴에나 틀어박혀 지내는 종족이 아닙니다. 아무리 대단한 모험가라도 평생을 걸쳐 용 한 마리를 만날까 말까 하죠. 저는 세 번 만났습니다만, 던전에서 중요한 건 몬스터가 아니에요. 길을 못 찾아 헤매다 탈진하는 거죠.

 

울프 크릭스는 걸어가다 바닥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듯 납작 엎드렸으나 이내 다시 일어났다. 빛의 명암 때문에 통로에 늘어진 그림자의 형태가 불규칙했다.

 

저는 지금 지도가 없습니다. 그래서 벽에 그어놓은 빗금으로 제가 여기 왔었는지 표시해 놓았습니다. 물론 길을 잃으면 왔던 곳을 다시 지나칠 수 있겠지요. 하지만 빗금이 제일 적은 곳으로만 다니면 마침내 탈출구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만일 종이와 펜이 있다면 대략적인 지도를 그리겠지만, 지금은 그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머릿속으로라도 그리는 게 중요합니다. 자신이 왔던 길을 가늠해서 간단한 미로를 만들어두시는 게 편합니다. 흠, 환경이 변했으니 잠깐만 주문을 외우겠습니다. (눈을 감고 중얼거리며 손짓을 한다.) 네, 되었습니다. 이건 거스트 오브 윈드 주문을 제 얼굴에 한정해 생성한 겁니다. 독가스를 흡입할 수 있으므로 만들어둔 거죠. 박테리아들이 이곳에 살면서 유독 물질을 생성했을지도 모르니까 주의해야 합니다. 독가스는 어느 순간 농도가 짙어지기 때문에 미리 주의해야 합니다. 나중에 이런 주문을 외워봤자 이미 가스에 중독되어 때가 늦습니다.

 

수정구에 비치는 동굴의 모습은 가히 환상적이다. 셀레나이트로 이루어진 결정체가 통로 전반적으로 그물처럼 얽혀있는데, 가장 큰 것은 길이가 8m도 넘는다.

 

혹시 드루이드나 레인저의 동물 동료와 같이 고립된다면, 그 동물들을 최대한 이용하는 게 좋습니다. 흔히 늑대와 곰을 데리고 다니는데, 이 동물들은 발자국 냄새의 농도를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 통로를 지나간 적이 있는지, 그때가 언제인지 분별이 가능하죠. 그러니 동물 동료의 추적 능력을 활용하면 탈출구를 찾는 시간을 훨씬 단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암모니아가 가득하고 빛이 없는 가운데서도 냄새만으로 길을 찾는 놀라운 능력도 있습니다! 물론 일반 늑대나 곰은 안 됩니다. 드루이드나 레인저와 충분히 모험을 겪고 훈련을 받은 동물이라야 하죠. 가끔 표범을 데리고 다니는 레인저도 있는데, 아쉽게도 표범은 이러한 추적에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야간 시각이 예민한 반면 후각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야간 시력이라고 해 봤자 엘프와 비슷해서 길 찾기에 활용할 수 없고요. 그래서 저는 드루이드와 레인저들을 대상으로 강연할 때 동물 동료는 늑대나 곰으로 하라고 권하는 편입니다. 특히, 무리 생활에 익숙한 늑대는 파티에도 적응을 잘 합니다. 혼자 다니는 곰은 여러 사람과 어울리면 스트레스를 받지만, 늑대는 오히려 좋아하죠. 혼자 고립된 경우, 늑대는 외로움을 해소해주어서 정신적인 압박을 덜어주기도 하므로 좋습니다.

 

천장에서부터 영롱한 진주가 한 가득 매달린 것이 보인다. 작고 반짝이는 등불 같다. 가까이 다가가니 그것은 하얀 점액이 구형으로 늘어진 그물이었다.

 

이건 동굴 개똥벌레 유충이 쳐놓은 덫입니다. 일종의 거미줄과 같죠. 보기엔 아름답지만 작은 벌레들이 여기에 현혹되어 다가오다 점액에 걸립니다. 그러면 유충이 꼼짝 못하는 먹이를 잡아먹는 거고요. 아, 여기 이 덫을 놓은 사냥꾼이 있네요. 이것들이 여기에 서식하는 걸 보니 이 근처에 밖으로 통하는 틈이 있나 봅니다. 여기서 독가스 걱정은 안 해도 되겠군요. 더 반가운 점은 이걸 먹을 수 있다는 거에요. 어, 보기엔 좀 징그럽지만, 지금은 비상식량과 굿 베리, 힐링 포션까지 잃어버린 상태이므로 이것저것 가리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사실, 이 벌레는 열량이 가득합니다. 같은 무게의 소나 돼지보다 훨씬 낫죠. 성충이 되면 지방질이 사라지지만, 지금 이 놈의 몸에는 충분하고요. 하지만 몸 안에 기생충이 있을지 모르므로 그냥 먹는 건 위험합니다. 여기서는 불을 펴도 될 것 같으니 제 옷을 찢어서 잠시 간이 모닥불을 만들겠습니다. 여기, 제 목에 건 부싯돌이 보이시나요? 불의 필요성은 던전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니 항상 불을 피울 수 있도록 몸 가까이에 부싯돌을 두는 게 좋습니다. 자, 되었습니다.

 

울프 크릭스는 아주 작은 불을 피웠다. 그리고 칼에 꿴 유충을 굽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녹색과 파란색 유충의 몸이 갈색으로 익었고, 껍질도 부스럭거렸다.

 

이 정도면 먹을 만 할 겁니다. 따끈하고 껍질도 바삭거리네요. 이런 열기에는 안에 있을지 모를 기생충도 죽었을 테니 괜찮아요. 저한테 단백질만 더해줄 뿐이죠. (울프 크릭스는 구운 유충을 한 점 떼어서 입에 넣는다. 눈살을 찌푸렸으나 먹은 걸 뱉지는 않았다.) 생각보다는 괜찮습니다. 흔히 벌레가 징그럽기 때문에 맛도 없을지 모른다고 하지만, 구운 벌레는 좋은 영양식입니다. 큰 동물을 키우기 어려운 지역에서는 어디나 벌레를 먹는 풍습이 있죠. 날고기를 그냥 먹으면 비리고 쓴 것은 네발짐승이나 벌레나 마찬가지에요. 결국 적응하기 나름이죠. 거기다 유충은 거미나 전갈보다 훨씬 맛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이놈들을 찾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으니 진수성찬을 즐기는 것과 마찬가지죠. (사내는 결국 유충을 모두 먹었다. 입가에 갈색 국물이 흐르자 혀로 핥았다.) 여기에 땅굴 개똥벌레들이 더 있는 것 같으니까 저는 식사를 계속해야겠습니다. 여기서 잠시 쉬었다가 이 셀레나이트 천국에 뭐가 더 있을지 알아보기로 하죠.

 

수정구가 꺼지고 광고 영상이 나왔다. 바할드릭 마법사 아카데미에서 신입생을 모은다는 내용이었다. 이후에는 초보 모험가들에게 다이어 울프 사냥을 자제해달라는 캠페인이 뒤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