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 과학 포럼
SF 작품의 가능성은 어떻게 펼쳐질 수 있을까요? 그리고 어떤 상상의 이야기가 가능할까요?
SF에 대한 가벼운 흥미거리에서부터 새로운 창작을 위한 아이디어에 이르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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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히 말하자면 - 과학계의 한 획을 그으신 분이십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뉴턴을 단지 연금술사에 빠진 사람(이게 확실한 건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정도로 치부하지만, 어찌되었건 간에 만유인력을 발견하고, 물리학과 수학, 천문학에서 여러모로 큰 업적을 이루어 낸 것 또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뉴턴은 겸손했습니다.
뉴턴은 그의 나이 46세인 1687년에 관성의 법칙, 가속도의 법칙,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의 세 가지 법칙을 명확히 공식화하여 과학사에서 가장 손꼽히는 책으로 받아드려지는 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를 완성했습니다.
"어떻게 이러한 발견과 저술을 할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뉴턴은 그것은 갑작스러운 통찰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꾸준히 오랫동안 생각한 결과였다고 답하고, "만일 내가 다른 사람보다 조금이라도 멀리 내다 볼 수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나에게 거인들의 어깨가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강조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거인들이 없었다면 뉴턴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요?
그 거인들 중 최대의 거인은 데카르트, 케플러, 갈릴레이였습니다. 뉴턴은 데카르트에게 해석기하학을 배웠고, 케플러에게 행성의 운동에 관한 세 가지 기본 법칙(타원궤도의 법칙, 면적 속도 일정의 법칙, 조화의 법칙)을 배웠으며, 갈릴레이에게 관성의 법칙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는 독실한 성공회 신자인 뉴턴은 어느 제자가 하느님이 없다고 주장하자, “하느님에 대해서 불경하게 말하지 말게. 나는 하느님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다네.”라면서 무신론을 주장하지 못하게 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의 죽기전 유언이나 다름없는 말이 있습니다.
- "세상이 나를 어떻게 보는 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를 바닷가에서 장난을 치는 소년이라고 생각해 왔다. 평범한 조각돌이나 조개껍질이 아닌, 더 동그랗고 특이한 조약돌과 더 예쁜 조개껍질을 찾아다니는 소년 말이다. 내 앞에는 거대한 진리의 바다가 많은 비밀을 간직한 채 펼쳐져 있었다."
-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지만, 그 모든 공적을 옛 지혜로운 선인들과 신에게 돌린 아이작 뉴턴(물론, 제가 잘못 안 것일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제가 볼 때는 그랬습니다).
옛날의 위대한 과학자 아이작 뉴턴에 비해, 지금의 우리와 그리고 우리 시대의 과학자들은 어떨까요?
Hey yo, Bro - What's up?
( 어이 이봐, 친구 - 무슨 일 있어? )
뉴턴이 다른 건 몰라도 독실한 신자였던 것은 사실입니다. 어떤 시가 있었는데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암튼 세상이 어둠속에 있었는데 하나님이 뉴턴을 보내 세상을 밝혔다는 내용입니다. 찬사에 가까운 내용이죠.
다만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나서 모난 성격을 가진것 같습니다. 글쎄요. 인간한텐 오만해 보여도 신앞에선 겸손했다고 볼수 있겠군요.
아참 아인슈타인도 그의 팬이 보낸 편지의 답장에 우주의 법칙을 알아갈수록 신을 부정할 수 없다고 했던가요
뉴튼의 묘비명입니다. 웨스트민스터 교회에 가면 볼 수 있어요. (라틴어로 쓰여져 있지만)
(영어로 번역하면) 이런 내용입니다.
Nature and nature's laws lay hid in night;
God said "Let Newton be" and all was light.
뉴튼 시대때는 전체가 기독교 사회였으니 무신론을 주장하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시대였습니다.
뉴튼 시대만 해도 과학이 "자연철학" 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고 연금술 따위가 성행하는 사실 근대과학 이전의 시기였습니다.
자연의 법칙을 증명하기 위해서 신을 끌어다가 증거로 사용하는 일이 허다했고요. 갈릴레이가 죽던 해에 뉴튼이 태어났으니 알만한 시기죠.
뉴튼이란 사람의 의미는 그 과학적 성과가 뛰어나기도 하지만 근대적 개념의 과학적 방법, 과학적 증명에 대한 시대를 본격적으로 열었기 때문이기도 하거든요. "프린키피아"의 서문에 보면 자연의 법칙을 "신"의 개념을 사용하지 않고 기술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시대가 지금이었다면 그가 계속 기독교인이었을지는 의심스럽습니다.
또 연금술과 신학에도 엄청난 노력을 쏟아부었지만 화학에는 재능이 없었는지 물리학, 수학에서와 같은 결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광학에서는 빛이 입자 (양자역학의 발견으로 증명되긴 했으나 뉴튼이 생각한 입자성과는 완전 다른 것입니다)라고 주장했는데 그 역시 틀린 것이었죠. 그 때 개념으로는 파동이 맞습니다.
신학을 연구하고는 삼위일체설에 대해 의심을 품었죠. 그러나 불경죄로 기소될까봐 자신은 삼위일체설을 부정한다는 걸 끝까지 비밀을 지켰다고 합니다. 하지만 신학 연구에서는 새 연대표 작성 등의 자그마한 성과가 있기는 합니다.
아인슈타인은 제가 알기로는 무신론자였습니다. 가끔 과학자들이 사용하는 "신"이라는 용어가 우주의 법칙을 은유적으로 사용하는 것인데도 종교인들이 그러한 인용을 "봐라. 위대한 과학자고 신의 존재를 인정했다."고 남용하는 일이 많아서 리처드 도킨스가 과학자들은 신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말자고 했지요.
뜬금없지만 뉴튼의 묘비명에 대한 패러디도 있는데
"It did not last; the Devil howling 'Ho!
Let Einstein Be!' restored the status quo." (John Collings Squire)
라고 하네요
위대한 과학자들 중에 성격이 괴팍한 사람 많습니다.
뉴턴은 위에서 언급했으니까 넘어가고 아이슈타인도 부부간 생활은 완전 막장이었습니다. 아내 몰래 자기 사촌이랑 만나고... 그래서 이혼했죠.
아이작 뉴턴의 비극은 그가 탄생하던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아버지가 뉴턴이 태어나기 직전에 세상을 떠났고, 과부가 된 아이작 뉴턴의 어머니는 자신의 친정 어머니에게 어린 아이작 뉴턴은 맞기고 다른 남편에게 새로 시집갑니다. 즉, 새로 결혼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버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처 철들기도 전에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아이작 뉴턴은 외할머니 손에 의해 외롭게 성장합니다. 전형적인 조손가정의 문제가 아이작 뉴턴에게 발생하는데, 내성적인 성격과 분노와 자기 중심적인 사고방식이 평생 그를 지배하게 됩니다.
아이작 뉴턴은 대학에 수학 중일 때부터 두각을 나타내어 전도 양양한 학자의 길을 걷지만, 성장과정에서 마음에 많은 상처를 입었기 때문인지 모난 성격으로 인하여 주변의 다른 학자들에게 수 많은 상처를 입힙니다. 게다가 워낙 천재적인 재능으로 많은 업적을 이룩하여 학계에 확고부동한 입지를 다지지만, 동료 학자들이 자신보다 앞서나가는 꼴을 못보는 상당히 더러운 성질머리로 인하여 한 번 나쁘게 본 학자는 수단과 방법을 안가리고 매장시키고 이를 통쾌하게 여기곤 했습니다. 미적분 최초 발견의 영예를 놓고 라이프니츠와 싸움을 벌이면서, 뉴턴은 미적분뿐만아니라 여타 업적들이 워낙 뛰어났기 때문에 학계에서 더 우위에 있었고 이를 십분 이용하여 라이프니츠를 도둑으로 몰아가는 데 성공합니다. 미적분 외의 다른 분야에 대해서도 뉴턴과 라이프니츠는 계속해서 논쟁을 벌였고 이는 영국과 유럽대륙 양 진영의 학계 간의 자존심 싸움으로 번지는데, 결국 라이프니츠는 수학자보다는 관리로서의 삶을 택하게 되죠.
뉴턴은 결국 모난 성격으로 너무나도 많은 적을 만들었고, 이로 인해 학계를 떠나야 하는 상황을 맞이합니다. 그의 천재성은 전 세계 학계가 인정하고 있었지만 동료 학자들은 그와 함께 일하거나 논쟁하고 싶어하지 않았고, 그가 무소불위의 힘을 과시하면서 오만하게 행동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성질 나쁜 뉴턴에게 찍히면 학계에서 쫓겨날 수도 있었으니까요. 뉴턴은 자신의 성질머리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영국판 조폐공사 사장으로 임명되자 깨끗히 손털고 학자로서의 길을 접습니다.
과연 그렇다고 뉴턴의 전설이 끝나느냐.. 아닙니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에 소개된 일화인데, 수학자 베르누이(라이프니츠의 제자)가 유럽 수학계에 풀기 힘든 문제를 내고 1년 동안 함께 해결해 보자고 제안합니다. 1 년 간 전 유럽의 내노라하는 수학자들이 여럿 도전했지만 풀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이 문제를 담은 베르누이의 편지가 뉴턴에게도 배달되었고, 당시 학계를 떠나 관리로 근무하던 뉴턴은 저녁에 퇴근하여 저택 관리인에게 편지를 받고는 다음날 아침 평상시처럼 출근하면서 답장이 담긴 편지를 관리인에게 넘기면서 베르누이에게 보내라고 합니다. 뉴턴은 공식적으로 학계를 떠난 몸이었기 때문에 답장에 그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죠. 뉴턴은 그 하룻밤 동안 수학의 새로운 분야를 창조하여 1년 동안 전 유럽의 수학계가 풀지 못했던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했고, 베르누이는 "답장에 이름이 없었지만 손톱 자국만 보고도 그 사자가 해치웠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라고 회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