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아포칼립스물을 SF냐 판타지냐 볼 게 아니라, 이야기가 판타지냐 SF냐로 물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는 '장르'라는 단어를 아무 곳에나 마구 쓰다보니 결국 헷갈리게 된 케이스인데, 포스트 아포칼립스란 건 배경, 소제, 설정 같은 거지 SF나 판타지처럼 장르라고 하기엔 부족함이 많죠. 굳이 쓰겠다면 '(SF(또는 판타지)의 하위장르로써)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처럼 표현하는 게 맞습니다. 즉 포스트 아포칼립스'물'이라고 한다면 그 앞에 이미 괄호 안의 내용이 생략된 상태라는 거죠.

가령 '리보위츠를 위한 찬송'은 처음 1부는 판타지지만 2부 부터는 판타지와 SF가 섞이고 3부에서는 완전히 SF로 갈아 타죠. 다비 연대기 역시 판타지인지 SF인지 아리송하지만 포스트 아포칼립스물인 건 확실하고요. 그리고 말씀하신 폴아웃은 분명히 SF물이지만 베스쳔은 판타지물이죠(아포칼립스가 인간에게만 오라는 법은 없으니).

결론을 말하면 포스트 아포칼립스물이 딱히 어떤 장르에 속해야 한다는 법칙도 없고 이론도 없습니다. 

소재에 따라 다릅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라는 건 어디까지나 '세상의 멸망'을 가리키니까요. 그런데 세상이 망하는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원인이 상상 과학적인가, 환상적인가에 따라 장르 역시 갈리겠죠. 묵시록 작품이라고 하면, 흔히 핵미사일이나 좀비 바이러스를 생각합니다만. 검마 판타지에도 역병이 퍼져 대륙이 망했다거나, 드래곤이 침입해 왕국을 절단내는 스토리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묵시록 작품이라도 당연히 판타지에 속하죠. 다만, 포스트 아포칼립스라는 게 SF 영역에서 주로 발달하긴 했습니다. 아무래도 과학 기술 발달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에서 튀어나왔으니까요. <해변에서>나 <나는 전설이다> 같은 게 원조이기도 하고.

그리고 본문에서 언급하신 <폴아웃> 시리즈는 SF로 분류할만한 요소가 많습니다. 방사능 돌연변이, 자동화 로봇, 대체 역사, 인공지능 그리고 가장 중요한 과학 기술의 오남용까지, 소재부터 주제까지 어디로 보나 SF죠.

다른 씨리즈는 몰라도.. 폴아웃 시리즈는 SF라고 봐도 무방한 물건입니다. 확장팩에서 외계인까지 등장하는 물건을 판타지에 집어 넣기에는 좀 애매하군요.  

포스트 아포칼립스라 불리는 소재는 장르를 넘나들 수 있는 특이한 물건이라고 봅니다. 원인을 무엇이라고 정의하기에 따라 SF에서 스릴러물까지도 가능한 소재라서 말입니다. 

포스트아포칼립스는 위에서들 언급하신 것과 같이 그 자체가 SF나 판타지에 편입된다기 보다는

결국 그 아포칼립스로 가는 과정과 그 이후의 사회를 그려내는데 있어 동원되는 소재나 표현들이

SF장르의 것이냐, 판타지 장르의 것이냐에 중요하게 영향을 받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포스트아포칼립스는 '주로' SF에 편입되는 경우가 많다고 보는 편입니다.

이것은 포스트아포칼립스 자체가 SF 속성을 가지고 있다기 보다는 포스트아포칼립스라는 상황이 SF와 더 궁합이 좋아서

그런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합니다만...

포스트아포칼립스의 재미나, 그러한 상황을 그려내는 과정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크게

'아포칼립스를 통해 등장한 기존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를 그려내기에 적당하다는 것과

'아포칼립스가 일어날 정도의 어떤 상황과 그 이후의 극단적인 환경'을 통해 리얼리티 이상의 적나라한 주제적 접근이 가능하다는 것,

이렇게 두 가지가 가장 주요한 편이라고 생각되거든요(웃음)

판타지는 첫번째를 이루기 위해 굳이 아포칼립스를 가져오지 않아도 애초에 다른 세계를 그려버리기에 제약이 없고,

두번째의 이유로 아포칼립스에 접근하기에 판타지적 아포칼립스보다는 SF적 아포칼립스가 좀 더 감정적으로 주제에 근접하고

일치화되기에 유리한 편이죠.

게다가 포스트아포칼립스가 보통 현실세계에 찾아온 아포칼립스를 이야기하는 만큼 불가항력적으로 SF의 현실감을 바탕으로 하게 되는 까닭도 있겠죠.

(물론, 포스트아포칼립스 특유의 황폐화된 정서 등을 선호하는 경우도 있고 다양한 이유로 판타지형 포스트 아포칼립스 작품도 나름대로 있습니다.)

그런데 애초에 판타지와 SF의 정확한 장르적 구분지점은 어디일까요? (웃음)

충분히 발전한 기술은 마법과 구분할 수 없고 많은 SF들이 충분히 발전한 기술,

혹은 지나치게 발전한 오버테크놀로지나 예상 외의 규명불가능한 기술부작용을 소재로 하는데

그러한 영역에서 어떤 상상력이 SF의 영역이고 어떤 상상력이 판타지의 영역인지를 명확하게 선을 긋기는

어려울 수 밖에 없다고 생각됩니다.

 폴아웃은 누가 뭐래도 SF죠.

 헌데 판타지 포스트아포칼립스는...거의 본 적이 없는 것 같네요. 멸망 위기를 다루기야 하죠. 다만 흔히 보는 식의 판타지의 멸망급 이벤트는 주로 무슨 고대 악마라던가 차원 붕괴 같은 게 나오는 고로 멸망 이후의 세계를 그릴 것도 없고, 애초에 그리 진보했다거나 평화롭다는 느낌을 주지도 않는 세계가 보통이라서 고대에 발전된 문명의 유적을 탐사한다거나 하는 이벤트가 나와도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옛 문명과는 확연히 다른 접근법을 갖기 마련이죠.

세기말 이후 생존을 위해서 발달한 인류의 과학 기술에게 중점을 둔 소설은 S F에 포함되도 무방하지만, <메트로 2033>처럼 과학기술 보다는 인류를 파멸로 이끈 모 재앙에서 나타난 희귀한 현상들, 예를 들자면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의 귀신이 나타나 남아있던 인류를 공포에 떨게 하는 한다거나, 혹은 직접적으로 작품 내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과학의 범주를 벗어난 무언가가 추상적인 표현으로 주인공 앞에 나타난다면 그것은 판타지 소설입니다. SF가 아닙니다.

판타지 아포칼립스가 등장하지 않은 이유는.. 용사가 그 재난을 해결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다만 D&D 같은 경우는 새 판이 나올때마다 아포칼립스가 일어난다고 하지요. 하하하하 

만화 바스타드는 판타지 설정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세계의 드래곤이나 그런 건 모두 인간이 유전자 조작으로 만들어낸 존재였다...라는 식이지요. 하지만 세상의 멸망(?)원인이 '신'이라는 것이다보니, 판타지 포스트 아포칼립스물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