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공지능 작가는 이렇게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을까요?
알파고는 참 많은 것들을 바꾼 것 같습니다. 미래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예상했지만, 모두가 미래를 바라볼 수 없죠. 그래서 갑작스러운 (사실 따지고 보면 갑작스럽지 않지만) 인공지능의 대두에 놀란 것 같습니다. 특히 인공지능의 노동 효율성은 전문가들도 다들 동의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충격이 더욱 커진 듯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술이 인류의 마지막 영역이라고 위로하지만, 인공지능은 벌써 소설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수준이죠. 어지간한 양산형 소설 역시 인공지능의 영역으로 넘어갈지 모릅니다. 덕분에 예술마저 기계에게 빼앗긴다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어떤 관점에서 본다면, 기계가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아무리 인공지능이 좋은 그림을 그리고 좋은 소설을 써도 결국 기계는 기계거든요. 소설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소설은 현실의 반영이고, 더 나가서 현실에 참여하거나, 사람들을 현실 문제로 이끄는 원동력입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작가들은 현실에 참여했지만, 아쉽게도(?) 인공지능은 그럴 수 없습니다.
예전에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절정>이나 <광야>는 단순한 시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 굳건함을 노래하는 시는 많지만, <절정>은 그저 저항 의식을 내비치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육사 선생은 의열단의 일원이었다고 하죠. 일제와 치열하게 싸웠고, '육사'라는 이름이 죄수 번호라는 말도 있고, 암울한 시기에도 절대 굴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절정>은 그런 인생과 사상을 반영하는 작품입니다. 따라서 이 시를 단순히 저항 의지로만 읽을 게 아니라 어느 독립 투사의 일생으로 바라봐도 좋을 겁니다. 물론 문학 작품을 꼭 작가의 인생살이와 연결할 필요는 없습니다. 때로는 작품 그 자체를 분석할 수 있어요. 자기 작품의 주제와 인연이 머나먼 작가들도 많았고요. 작가가 꼭 자기 작품처럼 살아가지 않죠. 하지만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고, 작가도 인간이고, 작가는 결국 시대의 비극과 멀어질 수 없습니다. 시대와 상관없이 자기 할 말만 하는 작가들도 많지만, 현실 참여를 빼놓고 이육사 선생 같은 경우를 논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런데 과연 인공지능이 이렇게 현실에 참여할 수 있을까요. 글쎄요, 사람들이 정말 그런 인공지능을 만들지 의문입니다.
이육사 선쟁은 너무 거창한 인물이지만, 굳이 이런 거창한 인물만 떠올릴 필요는 없을 겁니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동서남북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작가들이 현실에 참여하고 착취나 억압과 싸웠습니다. 누군가는 전쟁에 참여했고, 누군가는 환경 오염을 반대했고, 누군가는 여자들의 손을 붙잡았습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그런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죠. 뭐, 블랙 리스트인가요. 그게 한참 유행했었잖아요. 작가들이 블랙 리스트에 들어가고 싶을 만큼. SF 작가도 그럴 수 있어요. SF 작가들도 현실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 참여가 크든 작든, SF 작가는 그저 글만 쓰지 않습니다. 허버트 웰즈처럼 사회주의 단체에 가입하거나, 조지 오웰처럼 전쟁에 참가하거나, 어슐라 르 귄처럼 침공에 반대할 수 있어요.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을 때, 미국 SF 작가들은 조직적 반대 운동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아마 주도자가 마이클 스완윅이었을 겁니다. 과연 인공지능이 르 귄이나 스완윅처럼 전쟁 반대 운동을 벌일 수 있을까요. 글쎄요, 자본주의에 분노하고 대기업을 해체하라고 부르짖는 인공지능…. 솔직히 좀 상상하기 힘듭니다. 기득권들이 그걸 내버려둘지 의문입니다.
2. 인공지능 작가는 작가정신을 가지고 싸울 수 있을까요?
인공지능은 하인이자 노예입니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업무를 도와주기 위해 등장할 겁니다. 그런 노예이자 하인이 주인(인간)의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리가 없죠. 만약 인공지능이 그런 행보를 보인다면, 당장 기득권들이 난리를 부릴 테고, 기술자들은 프로그램을 고칠 겁니다. 기득권들은 사람들의 집회와 시위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자유도 인정하지 않는 마당에 인공지능의 시위와 표현의 자유를 인정할까요. 흠, 아마 각자 생각이 다르겠으나, 저는 그렇지 않을 거라고 봅니다. 만약 기득권이 인공지능의 시위와 집회를 인정해도 인공지능의 파급력은 미미하겠죠. 인공지능은 집회 전술을 효과적으로 계획할 수 있을지 몰라도 머릿수를 채우거나 영향력을 드러내기 힘들 겁니다. 똑같은 사람들끼리도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기 힘든 마당에 인공지능이 인간의 당위성을 당장 빼앗지 못할 겁니다. 아무리 죽었다가 깨어나도 인공지능은 기계니까요. 인간이 아니니까요. 만약 인공지능의 영향력이 굉장하다면, 인공지능이 집회와 시위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한다면, 그건 오히려 잘된 일입니다. 약자들은 언제나 연대할 대상이 필요한데, 이제 지성적인 기계와도 연대할 수 있으니까요. (헛, 그러면 수구꼴통 기계도 등장할지….)
문제는 인공지능이 아무리 현실에 참여하고 싶어도 한계가 존재한다는 겁니다. 인간은 사회의 여러 분야에 참가하고, 거기에서 많은 것들을 보고 느낍니다. 반면, 인공지능은 그냥 프로그램만 받아들입니다. 인간 작가와 인공지능 작가가 똑같이 사회 문제에 참여해도 그 방법은 서로 다르기 마련입니다. 잭 런던은 1920년대의 대표적인 사회주의 작가이고, <강철 군화> 같은 책을 썼죠. 잭 런던은 빈민층의 생활을 직접 체험하기 위해서 런던 하층민들과 어울렸습니다. 일부러 허름한 옷을 입고, 노숙자들과 함께 자고, 더러운 구빈원에서 구정물로 목욕하고, 쓰레기통에서 담배를 뒤지고, 해충들이 들끓는 침대에서 먹고 잤습니다. 그리고 그 경험을 책으로 펴냈고, 자본주의가 이렇게 비참하다고 펄펄 뛰었죠. 인공지능이 잭 런던처럼 행동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사회주의 작가 로봇이 잭 런던처럼 밑바닥 사람들과 어울릴지 모릅니다. 그러나 로봇이 그렇게 행동해도 잭 런던의 빈민층 체험과는 여러 모로 다를 겁니다. 로봇은 인간처럼 생존 욕구가 치열하지 않을 테니까요. 로봇은 애초에 노예로 태어났고, 자신이 생득권을 소유한 존재라고 주장할 수 없으니까요.
독자들이 <밑바닥 사람들> 같은 책에서 감동을 받는 이유는 단순히 런던이 글을 잘 썼기 때문이 아닙니다. 독자와 잭 런던과 빈민들은 모두 똑같은 인간이고, 인간은 살기 위해서 발버둥치기 때문입니다. 로봇이 아무리 글을 잘 써도 로봇은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사투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따라서 필력의 유무와 상관없이 로봇의 글에는 일정한 감동 혹은 느낌이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로봇이 생존 투쟁을 아무리 외쳐도 그건 남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 어쩌면 인간처럼 느끼고 인간처럼 먹고 살아야 하는 로봇이 등장할지 모르죠. 하지만 그런 로봇을 정말 로봇으로 바라봐야 할까요. 인간처럼 존재하는 로봇은 사실상 인간에 준하는 존재 아니겠습니까. 만약 그런 로봇이 나온다면, 기계가 인간의 영역에 침투하는 걸 논하기 이전에, 그런 로봇을 바라보는 시각부터 정립해야 할 겁니다. 그게 순서겠죠.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인류가 그런 로봇이 자유롭게 사회 활동을 하도록 허락할지 의문입니다. 인간 같은 로봇도 언젠가 등장하겠지만, 그때는 인간의 영역을 지키는 게 문제가 아니라 로봇의 존재를 인정하는 게 문제일 걸요.
[인간보다 인간다왔던 AI 를 그린 영화.]
3. 인간 작가의 영역이 남아 있을 수 있는 이유는?
저는 이런 이유 때문에 인공지능 작가가 인간 작가의 영역을 (완전하게) 뺏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인공지능은 현실 문제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에 인류 문명은 여전히 인간 작가가 필요합니다. 장 폴 사르트르의 앙가주망을 실천할 수 있는, 물리적이고 현실적인 인간 작가가 필요합니다. 설사 인공지능 작가가 현실 문제에 참여해도 거기에는 한계가 존재할 테고, 인간 작가만이 풍길 수 있는 감동과 느낌과 투쟁이 없을 겁니다. 이사벨 아옌데가 강간을 당하는 소녀의 이야기를 할 때, 인공지능이 그와 같은 이야기를 할 때, 두 상황의 감성은 분명히 다르겠죠. 이 게시글에서는 사회 문제를 주로 이야기했는데, 비단 사회 문제만이 아닙니다. 배낭 여행을 떠나서 실컷 고생한 이야기, 어느 식당에서 우연히 미식을 맛본 이야기, 몇 십 년 동안의 인생을 회고하는 이야기…. 이런 이야기들은 오로지 인간 작가만이 쓸 수 있습니다. 인공지능은 재미있게 쓸 수 있을지라도 거기에는 체험이 빠졌습니다. 따라서 인간 작가들에게는 앞으로 체험이 중요할지 모릅니다. 오히려 더욱 잘된 일인지 모릅니다. 작가들이 직접 발로 뛴다면, 더욱 진솔하고 현장감 있는 이야기가 나올 테니까요.
아무리 인공지능이 발달해도 인공지능이 넘볼 수 없는 분야가 있겠죠. 가령, 성직자는 어떨까요. 아무리 인공지능이 똑똑해도 사람들이 인공지능의 영성(?)을 인정할까요. 여기에 어려운 신학 서적 1000권을 읽은 인공지능이 존재합니다. 이 기계가 성직자로 인정을 받을 수 있을까요. 인간 성직자들은 영성을 유지하기 위해 결혼을 포기하거나 음주를 포기하거나 자신의 인생을 어느 정도 포기합니다. 그야말로 생물학적인 욕구를 이기기 위해 애씁니다. 그걸 못하고, 파계를 당하는 사람들도 있죠. 하지만 인공지능은 그런 희생을 감내하지 않습니다. 분쟁 지역에서 목숨을 걸고 활동하는 성직자들도 많지만, 인공지능의 활동을 그런 인간 성직자와 비교하기 좀 그렇죠. 인간 성직자는 '몸뚱이'가 있으니까요.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이 현실은 그저 지성으로만 굴러가지 않습니다. 수많은 생명들의 피와 땀으로 굴러갑니다. 작가 역시 글만 쓰는 존재가 아닙니다. 피와 땀과 살로 이루어진 존재이고, 현실을 위해 '자기 몸뚱이'를 들이밀 수 있습니다. 언젠가 인공 존재가 그런 '몸뚱이'를 가질 수 있겠으나, 그러면 문제의 관점이 달라질 겁니다.
인간의 '정서 상태'에 의존하는 직업을 인공지능이 대체하는 건 불가능하죠. 그게 가능하다면 그건 인공지능이라고 부를 단계가 지났을 거거든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분야에서는 상당한 부분을 대체할 수 있기는 할겁니다. 가령 인공지능 작가는 99%의 쓰레기에 해당하는 걸 인간보다 훨씬 잘 써낼 수 있을 테니까요(정확히는 압도적인 양을 생산할 수 있죠). 성직자야 엄밀하게 말하면 직업이라 할 수도 없는, '역할'이라고 봐야 할 것 같지만 그와 비슷한 정신과의사나 심리상담사는 인공지능이 오히려 인간보다 잘 해낼 가능성도 높아요. 사실 아주 높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