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쟁 이후  황폐해진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은 예전과 다른 힘을 만들어 냈다. 사람들은 그것을 초능력이라 불렀다.

사람이 살 수 있는 지역에는 이런 히어로들이 모여들었고 도시를 이루었다.

 

이름하여 메트로 시티! 이 곳에선 히어로들이 초능력으로 에너지를 생산하고 거기서 만들어진 어마어마한 힘으로 도시는 불야성을 이루었다. 하지만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농업 생산 도시 덕춘리에서는 에너지 부족으로 밤에 불을 밝히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좋아 매트로놈! 이제 발전기를 좀 더 힘껏 돌려보게!"

"이제 되었습니까?"

"더더더더더더더더더! 됐다!"

 

준 영구기관이라는 지하철 풍력 발전기도 지하철이 멈추면서 더 이상 작동하지 않았다. 태양 에너지도 힘을 잃고 농업 생산에 필요한 거의

모든 에너지는 몇 남지 않은 노인들의 인력으로 겨우 유지되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젊은이들이나 히어로는 찾아볼 수 없는 덕춘리에 한 히어로가 귀농한 것이다. 그도 나름 뭔가 멋진 히어로명이 있었겠지만 덕춘리 노인들은 메트로 시티에서 온 놈이라고 해서 그를 매트로놈이라고 불렀다.

 

"어쿠 수고했네. 막걸리라도 한잔 들게."

"아유 별말씀을요. 어르신부터 한잔 드세요."

"내가 뭘 한 게 있어. 매트로놈 없었으면 덕춘리 끝났다 끝났어."

 

덕춘리 마을회관의 서치 라이트는 근 20년만에 처음으로 하늘을 밝혔다. 에너지 위기 이후론 히어로를 보유한 도시에서나 가동 가능한 장비들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젊은 사람들은 다들 메트로 시티 가고 남은 건 이제 노인들 뿐여. 덕춘리도 이제 끝이지."

"그런 말 말어! 아직 나도 젊어야!"

덕춘리 공식 청년회 회장인 박규정옹(89세)가 막걸리 잔을 내려 놓으며 외쳤다. 하지만 그도 알고 있었다. 덕춘리에 더 이상 아이는 태어나지 않았고 젊은이들은 이 곳을 떠나 메트로 시티로 향하고 있었다. 노인들이 떠나고 나면 이 곳은 텅 비어버릴 것이다. 그런 시기에 어떤 이유에서든 찾아와 준 매트로놈이 귀엽고 반가울 수 밖에 없었다.

 

"이거 고기도 좀 먹어. 많이 들어."

"많이 먹었습니다. 어르신."

"젊은 사람이 많이 먹어야지. 매트로놈은 우리 덕춘리의 기둥이여."

마을회관 앞에 둘러 앉은 노인들은 하늘을 밝히는 서치라이트를 보며 그들의 젊은 시절을 추억했다.

 

농작물을 갉아먹는 벌레들이 거대화 되어 몰려왔을때 맨손으로 때려 잡던 일, 죽음의 큰 강이 범람하여 농경지를 덮칠때 몸으로 홍수를 막아냈던 일들, 빙하기에 얼어가는 농작물들을 보며 흘렸던 피눈물들, 그들은 이 땅에서 태어나 이 땅과 함께 살고 땅에 묻혀 흙으로 돌아갈 이들이었다. 하지만 그들 뒤엔 더 이상 이어갈 이가 남아있지 않았다.

 

"매트로놈. 자네는 여기 계속 있을 건가?"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 자네 같은 사람은 도시로 가서 큰 일 해야지."

"뭔 소리여! 덕춘리에도 매트로놈이 필요하다니까! 덕춘리는 사람 사는데 아닌가? 여기서도 큰 일 할 수 있어!"

노인들이 막걸리에 거나하게 취해 주고 받는 말을 들으며 매트로놈은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과거의 영광은 지나가고 남은 것은 쇠락을 향해 가는 쓸쓸한 농업 도시였다. 싸워야 할 악당이나 괴물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무서운 초능력을 가진 악당들도 노리는 것은 돈과 에너지가 넘치는 도시였을 뿐 농작물을 키우는 시골 마을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뇨의를 느낀 매트로놈은 술자리를 벗어나 근처의 실개천을 향했다. 한참 쉬를 갈기고 있는데 누군가가 다가왔다. 매트로놈은 술이 확 깨며 눈을 부릅떴다. 이 기운은 분명 악의 기운임에 틀림없었다.

"누구냐 너!"

"야.. 잘 지냈냐 사이코맨 새키야. 나다. 블랙홀. 오줌발은 여전히 굵구나."

"뭐.. 뭐하는 거야! 덕춘리에 너 같은 놈이 왜 나타난 거야!"

매트로놈의 목소리는 누가 들을 새라 한껏 낮춰진 채였지만 그 안엔 당혹감과 분노가 어려 있었다.

"이야기는 잘 들었다. 매트로놈이라고? 푸하하하. 너 같은 악당놈이 농경 히어로? 웃기는군. 네 손에 묻은 피를 생각해라 짜식아."

매트로놈의 머릿속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하지만 한번 기세가 붙은 오줌발은 그칠 줄을 몰랐다. 그가 도시를 떠났을 즈음 그는 과거를 버렸다. 사실 그는 사이코맨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던 악당이었다.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농촌에 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한 것이다. 그렇게 새로운 삶을 살아가려는 시점에 과거에 함께 하던 악당이 등장하다니.

"네가 덕춘리의 평화를 깬다면 나는 너를 응징해야만 한다. 나를 무정하다 말하지 마라."

"아.. 이 새끼 히어로 다 됐네. 세상 참 편리하다? 악당놈이 귀농하면 히어로 되는 거냐? 나도 귀농이나 해서 히어로 노릇이나 해 볼까? 여튼. 귓구멍 파고 잘 들어라. 니 놈이 히어로 놀이를 하든 뭘 하든 그건 니 자유인데 우리 일에 협조 안 하면 네 놈 과거를 다 까발릴테니까. 알아서 기어라."

블랙홀은 킬킬거리더니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남겨진 매트로놈은 방뇨가 끝난 뒤 옷매무새를 가다듬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이 곳으로 왔다. 이제 마음 붙이고 세상을 바르게 살아보려는 시점에 저들이 나타나다니. 저들이 하려는 일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분명 덕춘리에 큰 위협이 될 것이다. 술이 깨자 몸이 싸늘하게 떨려왔다.

"여. 매트로놈 큰 건가봐!"

"젊은 사람이 오줌발이 뭐 그리 길어! 빨랑 와! 막걸리 한잔 더 받어!"

"예 어르신 지금 갑니다!"

매트로놈은 머릿속에 불안함을 남긴 채 그날 밤을 뜬 눈으로 지새워야 했다.

 

일주일 뒤 매트로놈은 마을 회관 앞에서 청년회 대표 박규정옹과 함께 어떤 남자를 만났다.

"인사들 나눠. 이 쪽은 변사장. 이쪽은 매트로놈이야. 우리 덕춘리 히어로지."

"아 예. 잘 부탁드립니다. 매.트.로.놈.님."

매트로놈은 굳은 얼굴로 악수를 나눴다.

 

"아니 분위기가 왜 이랴. 뭐 기분 안 좋은 일있나?"

"아닙니다. 아무것도. 어제 좀 과음을 한 모양이네요."

"그랴. 속 좀 챙기고. 다른 게 아니라 이번에 우리 마을에서 온천 개발을 한다고 해서 말야. 여기 변사장님이 투자를 유치하려고 한다는데 우리 매트로놈이 좀 도와줄 수 있는가 해서 말이지."

"온.천.개.발. 말씀이시군요. 이 마을에 온천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지질학적으로 충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 자세한 건 시추를 해 봐야 알겠지만 지층 검사는 이미 들어갔고요 가능성 있는 곳을 세군데 정도 보고 있습니다."

"온천이 나오면 어떻게 되는 거죠?"

"아 그야 말할 것도 없이 돈방석에 앉는 거지. 그걸 말해서 뭣하나. 우리는 그저 돈 한푼 안 내도 다 공사하고 시추하고 해준다니 매트로놈이 잘 알아서 좀 해 줘. 아무래도 이런 일은 우리 덕춘리 히어로가 나서야 하지 않겠어? 그럼 이야기 좀 나누게."

잠시 후 청년회 대표 박규정옹이 자리를 떠나자 매트로놈은 조용히 따져 물었다.

"뭣 하는 짓이야?"

"보다시피 비지니스지. 먼저 이야기 한 대로 잘 좀 부탁해."

"여기 분들은 다들 좋은 사람들이야. 허튼 짓 하지 말고 꺼져."

"허튼 짓이라니? 온천 비지니스라구. 매.트.로.놈. 마을 사람들의 희망을 꺾어 버릴 셈인가? 그게 히어로가 할 일이야?"

"무슨 속셈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너를...."

"뭐 아무래도 상관없어 네 놈이 조금이라도 허튼 짓을 하면 우린 네놈의 과거를 폭로하고 사장시켜 버리면 그만이니까. 너무 어렵게 생각 말라구. 너는 그저 조용히 입 다물고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는 거야."

"크으윽."

매트로놈은 이를 악물었다. 블랙홀. 그가 아는 악당중에서도 가장 치졸하고 더러운 놈. 절대 얽히고 싶지 않은 놈이 눈 앞에 있었다. 그런 그가 덕춘리에서 일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쁜 일임은 틀림없지만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 매트로놈은 그 뒤로 가진 능력을 모두 동원해 블랙홀의 뒤를 밟으려 했다. 하지만 그는 용의주도해 좀처럼 틈을 보이지 않았다. 

 

"매트로놈 왜 그려. 요즘 뭔가 근심이 있는겨?"

"아닙니다. 이모님."

평소에 매트로놈을 아끼던 이웃의 할머니였다. 어르신이라고 하니 절대 안된다고 이모라고 부르라고 신신당부를 하여 어쩔 수 없이 그리 부르고 있었다.

"아니긴 뭐가 아녀. 한숨 쉬는 거 보니 뭔가 문제가 있는 게 틀림 없는디. 그냥 이 이모한테 탁 털어놔 봐."

매트로놈은 한숨만 내쉬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제 친구가 말입니다. 아주 못된 놈이었어요. 그런데 반성하고 죄값치르고 착하게 살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나쁘게 살던 시절에 알던 나쁜 친구들이 그 친구의 주위 사람에게 뭔가 나쁜 짓을 저지르려고 해요. 그래서 그 놈들이랑 싸우려고 하는데 그러려면, 아니 그러니까. 친구들이 그 친구의 주위 사람에게 뭔가 나쁜 소문을 퍼트리니까. 주위 사람들은 친구말을 안 믿겠죠. 그래서 나쁜 친구들이.... 아 저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매트로놈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래서 그 처자는 이쁜겨?"

"네?"

이모할머니의 뜬금없는 말에 매트로놈은 놀라 반문했다.

"젊은 남자가 고민하는 건 여자 문제 아녀? 뭐가 되었든 다 괜찮어! 젊을땐 실수도 하고 그러는 거지. 용기 내서 가서 고백혀!"

"아. 네. 알겠습니다."

이모할머니는 가는 귀가 먹어서 무슨 소린지 못 알아 들은 것 같았다. 하지만 매트로놈은 뭐라도 이야기를 하고 나니 마음이 좀 후련해짐을 느꼈다. 결국 매트로놈은 개발 사무실에 몰래 숨어들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이 봉인한 능력들을 사용하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야밤에 숨어들어 개발 관련 서류를 열심히 들여다 보았는데 뭔가 이상했다. 굴착을 한다고는 하지만 그들이 찾는 건 온천이 아니었다. 뭔가의 특수한 시설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준비한 것은 엄청난 양의 폭발물이었다. 매트로놈은 한참 굳은 표정으로 고민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해가 뜨기 무섭게 박규정옹을 찾아갔다.

 

"아이고 매트로놈이 이렇게 이른 아침에 무슨 일인가?"

"회장님 제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들어오게."

박규정옹은 따스한 보리차를 건넸다. 매트로놈은 보리차를 마시면서 가슴속에 응어리진 것이 울컥 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용서해 주십시오. 회장님. 제가 어르신네들을 속였습니다. 아니 덕춘리에 제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매트로놈은 앉은 자리에서 고개를 숙이고 토해내듯 외쳤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말해보게."

"저는 사실 히어로 같은 게 아닙니다. 악당입니다. 그것도 아주 나쁜 악당입니다. 그런 놈이지만 착하게 살고 싶어서 덕춘리로 와서 히어로 행세를 했습니다. 어르신네들를 속이려던 게 아닙니다. 그런데 그 변사장이...."

"맞습니다. 어르신 제가 말씀드린 대로 아닙니까? 저 놈은 새빨간 거짓말쟁이입니다. 거기다가 아주 못된 악당이죠. 덕춘리를 말아먹을 놈입니다."

매트로놈은 뒤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블랙홀이 거기에 있었다.

"블랙홀. 너 이놈. 네놈이 꾸미는 흉계를 폭로하고 말겠다!"

"어르신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이 놈이 또 못된 짓 꾸미고 있다고 했지요?"

블랙홀은 천천히 걸어와 박규정옹의 오른편에 섰다.

"회장님!"

매트로놈의 절규에 박규정옹은 굳게 다문 입술을 천천히 열었다.

"매트로놈. 자네 말야. 섭섭했네."

매트로놈은 고개를 숙였다. 분하고 억울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자신의 말을 믿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아까 본 서류를 폭로하면 될 것인가? 하지만 서류에 명시된 바는 명확하지 않았다. 작업 계획이었다고 우겨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무엇보다 자신이 잃어버린 신뢰가 무엇보다 아팠다. 매트로놈은 고민했다.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든 신뢰를 주지 못하면 다 헛수고였다. 사실을 말하든 덕춘리를 위해서 움직이든. 신뢰를 얻지 못하면 다 헛 일이었다.

 

"매트로놈."

박규정옹은 천천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네 회장님."

"나는 말야. 자네가 언제쯤 사실을 말해줄까 하고 기다렸네."

매트로놈은 고개를 들어 박규정옹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네. 자네의 일은. 솔직히 말하면 우리는 자네가 블랙홀과 같은 일당일 거라고 생각했어. 그렇지 않고서는 이런 깡촌에 올 젊은이가 있을 거라곤 생각 안 했거든."

"회장님!"

"블랙홀이 노리는 게 뭔지는 나도 잘 알고 있네. 사실 우리는 그걸 지키기 위해서 이 자리에 있으니까. 보여주지. 덕춘리 파이브!"

박규정 옹이 큰 소리로 외치자 와장창 소리와 함께 창문이 깨지고 뒷방 창호지가 부서져 나갔다. 그 자리에 들어온 것은 옆집 사는 이모 할머니와 인근의 노인들이었다.

"덕춘리를 위협하는 악당 놈들에게 정의의 응징을 보여주마! 덕춘리 파이브! 전투태세!"

"레드!"

"블루!"

"화이트!"

"핑크!"

네명의 노인들이 포메이션을 이루며 자세를 취했다. 흔들림 없는 자세는 그들이 오랜 시간 포메이션을 연습해 왔음을 짐작케 했다.

"이게 뭐야! 노인네들이! 얘들아 해치워라!"

블랙홀의 뒤에 검은 괴인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잠시 후 그들은 덕춘리 파이브에게 격퇴되었다.

"어르신들. 죄송합니다. 저는 두려웠습니다. 여러분들을 속인 게 잘못이라고는 알고 있었지만.... 죄송합니다."

매트로놈은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아닐세. 매트로놈. 자네는 충분한 용기를 가졌어. 이제 우리도 지금까지 숨겨왔던 비밀을 말해주지. 덕춘리 지하에는 비밀 연구시설이 있네. 우리는 그걸 수호하기 위한 요원들이야. 물론 고향이 덕춘리여서 은퇴후 이곳으로 온 것이긴 하지만. 작년까지는 5명이 있었는데 리더였던 김복동 형님께서 작년에 노환으로 작고하셨네. 빈자리가 있는데 어떤가?"

"어르신!"

"좋아! 앞으로 자네는 옐로우야!"

덕춘리의 아침 해가 찬란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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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원래 비정한 법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