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되는 노숙에 지쳐버린 마왕은 좀비를 숲 속에 묻어두고 알에서 태어난 소녀 알스를 데리고 마을로 들어갔다.

마왕이라지만 아직 그녀는 인간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모습이기에 마을로 들어가는 건 별 어려움이 없었다.

 

"산적들을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야. 그렇지 않았으면 아직도 돈이 없어서 마을엔 들어오지 못했을테니까."

때마침 돈을 노리고 달려든 산적들을 저주의 밧줄로 제압하고 돈을 강탈한 덕분에 마을에서 옷가지와 식품을 사고
목욕도 즐길 수 있었다. 마왕으로선 정말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알스는 마왕의 손을 꼭 잡고 따라오고 있었다. 아직 어린 여자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녀는 신봉이라 불리는
마력구에서 태어난 여자아이였다. 마왕의 각성을 위해 필요한 도구라고 하여 어렵사리 구해냈더니 기껏 여자아이가

튀어나온지라 남에게 맡기지도 못하고 계속 데리고 다니고 있었다.

 

"이건 얼마죠?"


"닷냥입니다."

 

"우와 싸네요! 이거랑 이거 주세요."

입을 옷가지를 싸게 구해 신이 났던 마왕은 금새 입을 쩍 벌렸다. 농산물 가격이 엄청나게 치솟은 때문이었다.

 

"이거 바가지 아니에요? 무슨 빵 두덩이에 여섯냥이에요?"

 

"무슨 소리야! 지금 전쟁통이라 식량 구하기가 얼마나 힘든데."

 

"전쟁이요? 마왕이라도 다시 쳐들어 왔나요?"

 

"말도 마. 지금 3왕국이 마왕의 후예들을 쫒고 있다니까. 아 글쎄 5영웅왕중 한명이 마왕에 홀렸다지 뭐야. 토벌군이랑 싸움이 났대. 마왕의 마력은 무서운 거지."

마왕은 그 말을 들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언제 영웅왕을 홀렸단 말인가. 물론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지략과 미모를 이용하면 불가능할 것은 없었지만. 애초에 만나지도 않은 사람을 무슨 수로 홀릴 수 있다는 거지?

그때 마왕의 머릿속에 청명한 목소리가 울려왔다. 좀비 화이트였다.

 

'마왕님~들리십니까.'

'어 들리긴 하는데 대체 뭐야 좀비가 이런 고위기술을 구사해도 되는 거야?'

'하늘이 마왕군을 버리지 않으시는 모양입니다. 마왕님의 마력이 상승하면서 제가 쓸 수 있는 기술이 늘고 있어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무슨 좀비가 마인드링크 텔레파시를 구사하냐고! 조만간 메테오나 드래곤 소환도 하는 거 아냐?'

'에이 설마요. 그건 리치여도 무리일 겁니다.'

'아니 그나저나 식량이 없는데 어쩌지. 전쟁이 났대. 5영웅왕 중 한명이 마왕에 흘렸다는데.'

'오. 역시 기다리던 일이 터졌군요.'

'그게 무슨 소리야?'

'전대 마왕님이 토벌되시기... 아니 돌아가시기 전에 저주를 남기셨습니다. 영웅왕놈들은 지들끼리 잡아먹다가 멸망할 거라고.'

'그거 마왕이 죽어도 효과가 있어?'

'사실은 없습니다. 그냥 가벼운 암시일 뿐이죠. 자기 피 뿌리면서 하면 뭐 약간의 의미는 있겠지만 지금의 상황은 그보다는

전후 잇권 처리에 더 가깝습니다. 이참에 여세를 몰아 대륙일통한 패왕한명 나와보자는 거죠.'
'으흠. 그러니까 몰아주기 하는 거구나.'

'대충 그런 겁니다. 정치는 복잡하지만 야바위로 생각하면 쉽죠.'

 

사실 이 복잡한 전쟁의 와중에는 공작 백작 왕족 왕비 기사 신관들의 치정과 음모 권력다툼 출생의 비밀과 배신 모략 사랑등이 잔뜩 끼어있었지만 페이지 관계상 생략되었다.

결론적으로 3국이 연합하여 1개국을 공격, 그 왕은 쫒기고 있다는 것이 내용이었다.

 

'근데 하나가 비잖아.'

'5왕국 중에 하나는 신성왕국입니다. 거긴 패권을 노리지 않아요. 마왕 덕후들이라. 마왕만 쫒아오죠. 마왕밖에 모르는 바보들이랄까.'

'비웃을 때가 아니잖아. 우리가 위험한 거 아냐?'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딜 봐서 마왕군입니까. 그냥 평범한 산적 3 정도에 어울린다고요. 아니 파티에 아이가 끼어 있으니 도망중인 농노4 라든가 인신매매범 2 정도의 잡범에 가깝겠죠.'

 

"아 안살꺼야? 안 살꺼면 저리 가고!"

빵을 양 손에 들고 약간 거품을 문 채로 중얼거리는 마왕을 본 식료품점 주인이 화를 냈다.

흰자를 드러내고 있던 마왕이 가재미눈을 하며 식료품 주인을 노려봤다.

 

"1냥만 깎아줘요."

입가에 거품이 흘러내리는 게 좀 상태가 안 좋아 보였는지 주인은 5냥에 팔고 얼른 쫒아 보내는 쪽을 택했다.

전쟁의 여파는 작은 산골 마을에도 미치고 있었다. 사람들은 불안해 했고 물건 값은 요동을 쳤다.

 

여관에 묵으며 목욕을 한 마왕은 침대에 누워 오랫만에 단잠을 잤다. 노숙에 익숙해진 그녀지만

푹신한 짚 침대는 피로를 싹 씻어주었다. 이번에 목욕을 하면 언제 또 할지 모른다. 잠시동안의 사치를 만끽해도 좋았다.

 

'제기랄 이게 뭐야. 왜 그딴 놈은 만나가지고 내 팔자가 이렇게 된 거야. 이래서야 시집가서 정상적인 삶을 산다는 건 불가능에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잖아.'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도둑 길드에서 자신에게 청혼했던 뻐드렁니 타베랑 살림을 차렸어도 좋을지 몰랐다.

'아니 모름지기 여자로 태어났으면 꿈은 크게 가져야 한다. 최소한 왕자! 왕자급은 되어야 꿈이라 할 수 있지! 하지만 마왕과 결혼하는 왕자가 있으면 당장 부모님의 반대와 국민들의 반발에 어려움을 겪을 거야. 그리고 그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사랑을 쟁취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사랑. 그것이 로망 아니겠어. 좋았어! 왕자를!'

 

'왕자를 잡으실 거라면 정신계 수련을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환혼술이나 정신지배력을 높이면 왕자따위야 우습죠.'

 

'너..뭐야! 왜 시도 때도 없이 끼어들어! 흙 속에 있으면 죽은 듯이 쳐 잔다고 그랬잖아!'

 

'마왕님의 사념이 흘러 넘쳐서 도무지 잘 수가 없어요. 주인에게 수시로 불림을 받는 개 같은 느낌입니다. 쉴라 하면 크하하하! 이러시니 신경이 쓰여서요. 근데 그러고 보니 왕자님이라. 그리운 이름이군요.'

 

'캬악! 입 다물어! 입 다물게 안되면 흙이라도 한 입 물고 있어! 나무 뿌리라도 씹고 있어! 남의 머릿속에 기생하지 말란 말야!'

 

'너무하십니다 마왕님 저는 마왕님의 직속 부하이자 오른팔이며 하나밖에 없는 충신 아닙니까.'

 

'싫어! 나는 썩어가는 오른팔 같은 거 없어! 더 이상 내일 아침에 파내러 갈때까지 한마디라도 하면 화형이야! 화형! 화형! 구워서 지옥으로 보내버릴 거라고!'

 

'지옥 같은 건 미신이라고 그렇게 말씀드려도 그러시는군요. 알겠습니다. 좋은 밤 되십시오.'

 

마왕은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차며 진정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거의 새벽이 다 되어서야 마왕은 잠이 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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