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이 어두컴컴하다. 손가락을 하나씩 폈다가 다시 구부린다.

어딘가 어색한, 내 것이 아닌듯한 관절의 느낌. 남자는 어둠 속에서 천천히 떠올랐다 다시 가라앉았다

소리가 없는 세계는 고요하다. 그는 천천히 팔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죽은 고래처럼 희멀건 몸뚱이가 앞으로 나아간다. 남자를 가로막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물리법칙에서 벗어난 몸뚱이가 신이 나 허우적댔다. 이대로 영영 날아가는 것은 어떨까? 아니면 침묵이 그를 짓눌러 죽이는 것은 어떨까

이 거대한 공간은 점점 현실감을 앗아간다. 신이 있다면 바램을 들어줄 텐데. 뭉뚱한 장갑으로 잠시나마 기도를 올릴 생각을 했다

정신 차리자. 그의 삶에서 신앙은 언제나 함께였지만 함께 호흡하진 않았다. 어머니는 누구보다 독실했다

그러나 신실한 어미를 둔 자식들은 모두 그렇듯이 그는 사탄이 더 좋았다. 사탄은 아내처럼 매주 닦달하지도 않았고 동생처럼 그를 위해 기도해주지도 않았다. 그저 내버려두었다. 남자가 악마를 더 좋아했던 건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아서였나보다.

덕분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늘에 대고 부르짖던 이들은(그 자신들이 어느 누구보다도 높이 올라와 있다는 사실은 차치하고) 일찌감치 신의 곁으로 갔다

어떻게 보면 신은 공평하다. 동료들이 믿은 신과, 그 방식은 제각기 달랐지만 대답은 모두 같았으니까

아니면 지금 그가 숨을 쉬는 이 순간이 불손한 자에 대한 신의 징벌일지도 모른다. 신의 징벌이라. 그렇다면 기가 막히게 재주 좋은 신이다. 추종자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곁에 데려가곤 남자 혼자만을 남겼다

일주일 전에 스스로를 선체 밖으로 사출한 동료가 마지막이었다. 동료는 평복 차림이었다. 그는 적어도 로프로 목을 맨 사람이나 압축산소를 머리에 쏜 친구보다는 신을 뵐 때 편할 것이다신은 끝을 알 수 없는 자신의 뱃가죽 속에 남자를 혼자 던져놓았다.

손을 내밀어 허리와 연결된 로프를 잡았다. 온 몸에 칭칭 감긴 두터운 로프. 더 이상 압축산소가 없어 우주총을 쓸 수도 없다.

백년 전, 최초로 이 공간을 유영했던 이들과 똑같아졌다. 처음과 마지막은 결국 이런 법이다. 이 가느다란 줄을 끊어버릴까?

하지만 그 후엔?

공허 속을 돌아다니는 인간 최후의 유물이 될 것인가. 불가지론자의 하얀 껍질. 어차피 갈 곳은 없다. 천천히 신의 위장에서 소화되는 길뿐. 운이 아직 남았다면 데브리에 맞아 순식간에 가버릴 수도 있겠지. 그는 실소와 함께 몸을 뒤집었다.

벌써 반년이다. 지상과의 연락이 실패한 그 날로부터. 일분일초가 멀다하고 붙어있던 교신기도 꺼버린 지 오래되었다

미친 듯이 소리 지르며 집기를 내던지던 시간들도 지나갔다. 어차피 던져진 물건들은 공중에서 둥둥 떠다닌다. 밖에서 떠다니는 그와도 다를 바가 없다

사실 지금도 궁금하긴 하다. 지구에 무슨 일이 생겼는가? 왜 어둠이 내려앉은 지구의 반쪽은 더 이상 빛나지 않는가? 밤이 내려도 더 이상 전처럼 아름답지 않았다. 남자의 눈에 비친 지구는 어제와 그제와 일주일 전, 그리고 반년 전과도 같다. 시커먼 그림자일 뿐이다

이 공간을 채우고 있는 침묵이 지구 위에도 똑같이 드리워져 있었다. 불빛 하나 없다. 처음과 끝은 같은 법이지

남자는 어릴 적 읽었던 공상과학소설을 생각한다. 신이 내려와 순식간에 인류 전체가 휴거되어 버린 이야기. 꽤나 흥미로웠었다. 적어도 현실로 닥친 지금보다는 훨씬 괜찮은 이야기였다.

남자는 다시 한 번 로프를 움켜쥐었다. 매일 매일 이 순간을 위해 유영을 한다. 온 몸의 세포가 천천히 질식되어 간다

예정된 죽음을 위하여. 소름끼치는 이 공간을 위하여. 신과 어머니를 위하여. 인류 최후의 우주비행사를 위하여.


오늘은 마지막 남은 미트볼을 먹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