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우주로 나가기 전에 우주가 아주 넓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우주는 생각만큼 넓지는 않았다.


인간은 그리 멀리 나가기도 전에 최초의 다른 종족 드란과 만났고, 그 만남은 불행으로 이어졌다.

지루한 소모전 끝에 서로의 모성에 대한 끔찍한 공격들이 일어났고. 그리고 양측 모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받았다. 

그들은 그들의 모행성과 위성이 지구의 열핵병기에 의해 생물이 살 수 없는 불모지가 되었고

지구 역시 외계인의 대행성 공격무기에 의해 바다가 말라버리고 기온이 150도 이상 상승하여 모든 생물이 전멸해 버렸다.


인류의 대부분은 지구와 함께 멸망했다. 


전쟁을 위해 징발된 몇몇 우주선과 다른 항성계 개척을 위해 발사된 식민선 몇 척이 남은 인류의 전부였다.

그들은 지구가 멸망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보급을 위해 모성으로 귀환했다가 이 사실을 접한 붉은 악마호는 적의 추격을 간신히 따돌린 뒤에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해야만 했다. 


함 내의 모든 이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의견을 모았다. 민주적인 의견을 도출했지만 

군이라는 특수성때문에 결정은 수뇌부가 내리는 대의제 결정제도를 택해 뜻을 하나로 모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의견은 같았다.


인간이 거주할 수 있는 행성, 새로운 지구를 찾아야만 했다. 그리고 개척을 위해 발사된 식민선을 그 곳으로 유도하여

정착을 도와야만 했다. 


식량이나 연료의 재보급의 필요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선내 무기 생산설비를 개조하여 

식량과 물의 생산에는 대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용의 보급선을 확보하거나 건조하기 전에는 대부분의 작업이

수작업으로 이루어져야만 했다.


어려운 혼돈의 시기가 지나고 붉은 악마호는 초공간 도약의 틈바구니에서 5년을 살아남았다.


드란의 추적선은 집요하게 추적해왔다. 하지만 붉은 악마호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그들은 차례 차례 파괴되었고

그 잔해는 붉은 악마호의 자원으로 요긴하게 사용되었다.


붉은 악마호의 모습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검은 선체의 지구형의 함선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고 위장용 자재와 자원용으로 외부에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는 

드란의 함정의 잔해들로 폐선이나 우주 부유물처럼 보였다. 해적선이라 해도 크게 이상하지 않을 외형이었다.


떠돌아다니던 붉은 악마호는 다른 외계문명을 만나 몇가지의 기술을 교환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제안한 기술교환 방식은 생체 데이터의 교환이었다. 다르게 말하면 지식을 가진 승무원을 교환하는 것이었다.

가뜩이나 부족한 승무원 가운데 남녀 한명씩이 자원하여 그들의 함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들의 안전을 보장할 방법은 딱히 없었지만 새로운 기술의 필요성과 인간, 그리고 그 문명의 보존을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다. 붉은 악마호마저 파괴당한다면 인류가 살아남을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높이는 쪽으로 선택을 해야 했다. 

붉은 악마호의 승무원들이 그들을 떠나 보내는 비통함과는 달리 이쪽 함으로 넘어온 가운의 외계인들은 매우 유쾌한 모습이었다.

인간과는 전혀 닮지 않았지만 그들이 가져온 여러가지 정보들은 꽤 유용했다. 발달된 도약방법은 지금까지의

거리와 시간의 제약을 대폭 줄여주었다.


가운의 말에 따르면 드란과 인류의 전쟁을 피할 수 있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인류에겐 매우 불행하게도 

인류는 그런 정치외교적 방법을 배우기 전에 전쟁을 맞이해야만 했다. 


함교에서 합성 커피를 마시던 함장에게 가운족의 한명이 다가왔다.


"함장. 뭘 보고 있나."


"음. 개척지 후보를 검색하고 있네."


"만약 거길 갈 수 있다고 하더라도 개척선을 만난다는 보장은 없어. 가능성은 1% 미만이다."


"알고 있어. 하지만 이 함선엔 개척장비는 실려 있지 않으니까. 거기에 지구화를 할 수 있는 생물자원도 없지. 미약한 가능성이라도 개척선을 만나지 못하면 이대로 떠돌이 신세야."


"가운족의 생물 자원을 제공하는 조건에 대해서도 고려해보지 그랬나?"


가운족의 말에 함장은 쓴 웃음을 지었다. 접촉 당시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지만 생체 구조가 달랐기에 탄소 대사를 하는 인간과 어울릴 수 있는 생태계는 아니었다. 돌과 금속으로만 만들어진 생태계에 인간이 들어가 봐야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가운족의 생물자원은 인간에겐 그런 정도의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문득 함장은 가운족을 따라간 두명의 승무원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는 지구의 생물들을 다시 보고 싶군."


"어차피 먹지 않을 거라면 상관 없지 않나. 외형은 비슷하게 바꿔줄 수 있었네만. 하지만 당분간 가운 우주선을 다시 만날 수는 없겠지."


"그 이야기는 그쯤 하고. 우리 함정을 탐색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본 건 있는가?"


"초파동역학을 응용하면 가능하네. 같은 행성에서 출발한 함정이 갖는 고유 초파동을 방사하면 어느 도착점에서 공진이 일어나지. 그 공식은...."


"자세한 건 물리 장교에게 가르쳐 주게. 이 나이에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은 무리야."


함장은 식은땀을 닦아내며 초월 물리학에 대한 교사겸 엔지니어, 조력가 겸 카운셀러, 외계문화 전문가인 가운족의 수다를 부관에게 돌려버렸다. 받아주기만 하면 24시간동안 쉬지 않고 떠들 수 있는 가운족은 정말 훌륭한 선생이었다. 24시간동안 지치지 않고 수업을 들을 수 있는 학생이 있다면 말이다.


가운족을 만나기 전엔 찾을 엄두도 낼 수 없었지만, 가운족의 초월물리학은 큰 도움이 되어 마침내 그들은 지구 식민함이 도착한 행성을 찾을 수 있었다. 


물 자원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지만 중력과 대기 비중이 지구와 비슷한 행성이었다. 산소는 거의 없었지만 이산화탄소는 풍부했기에 마스크에 장착하는 탄소동화장치만으로도 호흡이 가능한 행성이었다. 하지만 거기엔 생명의 흔적은 없었다. 지구의 식민함이 도착하여 착륙한 흔적은 있었지만 작동하는 시설도, 살아있는 생물도 없었다. 그들은 정착에 실패한 것이었다.


지상에 내려가 유전자 샘플과 장비를 회수해 오자는 의견과 안전을 위해 다른 행성을 찾자는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했다.


식민화장비가 태부족인 붉은 악마호에게 식민장비가 있다면 무인행성을 개척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라는 의견과

어차피 생물 자원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건 짐이 될 뿐이니 불필요한 위험을 무릅쓸 필요는 없다는 의견이 맞섰다.

하지만 붉은 악마호는 행성에 내려갈 수 있는 강하 우주선이 아니었고 행성으로 내려가기 위한 장비도 갖고 있지 않았다.

탈출 포트를 이용하면 행성으로 진입하는 것도 가능은 했지만 다시 올라올 방법은 없었다.


가능한 방법은 식민 우주선에 포함된 궤도 탈출용 셔틀이나 위성 발사체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었지만

식민 시스템 표준장비에 위성발사체와 발사 시스템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확인했지만, 이미 이 행성에서 그것이 파괴되었거나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내려간 이들은 꼼짝없이 저 아래 갖혀야만 하는 것이다.


위성궤도에서 몇백번에 걸친 스캔과 검토 끝에 강하가 결정되었고 선발된 20명이 탈출 캡슐을 통해 지상으로 내려갔다.


그들이 그 곳에서 발견한 것은 공격에 의해 파괴된 흔적이었다. 고통스럽게 피를 토하며 죽어간 지구인들은

드란의 공격에 희생당한 것이었다. 붉은 악마호가 식민선을 추적한 바로 그 방식대로 드란은 식민선을 추적해 왔고

공격했던 것이다.


빈약한 무장의 식민지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마지막 한 사람이 죽을때까지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이었다.

하지만 결국 드란이 떠난 뒤에 아무도, 무엇도 살아남지는 못했다. 

식민지를 공격한 초단파 공격에서 살아남아 기록을 남긴 몇몇 이들도 동력부족과 식량부족을 극복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식민생산설비중에서 동결보관된 인간과 동물의 냉동 수정란과 여러가지 생물의 샘플은

안전하게 유지되어 있었다. 식민지에 있던 이들이 어떤 생각으로 이 설비에 동력을 유지시켰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 부분은 생존자의 기록에도 나와있지 않았다. 파괴된 행성에도 미래는 있었던 것인가.

생존자들이 그 동력을 생존에 썼다면 좀 더 버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셔틀은 예상대로 초단파 공격에 파괴되어 있었다. 위성 발사체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파괴된 부품들을 수선하고 교체할 수 있었기에 모함에 요청한 부품들이 탈출 포트에 실려서 내려왔을 즈음

선발대는 무사히 샘플들과 일지, 자료들을 회수하여 복귀할 수 있었다.


선발대가 가져온 내용을 확인한 함장과 참모들은 고민에 빠졌다. 


드란의 공격이 생각보다 훨씬 더 집요하고 세밀했던 것이다.


서로 모성을 날려버린 상잔의 공격이었지만 지구와는 달리 그들은 다른 안정된 식민 행성을 여럿 거느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이 쪽에서는 지구에서 출발한 식민함이 정착후 공격받기 전에 구조하던가

아니면 정착하기 전에 식민선을 미리 발견하여 드란이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옮겨가야 했다.


가운족은 그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우주 공간을 항행하는 식민선을 찾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식민 행성들에 대한 자료를 토대로 새로운 도약이 검토되었다.

장기간에 걸친 전투로 함선의 연료도 거의 바닥이 날 시점이었다. 

한번, 아니면 두번 정도의 공간도약을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 뒤에 전투 항행은 물론 불가능했다.


함장은 결단을 내렸다. 


승무원중 일부를 이 불모의 행성에 정착시키기로 한 것이다. 그것은 매우 힘들고 고된 일이 될 것이었다.

드란은 생존자를 찾기 위해 되돌아올지도 모른다. 그들은 지구인의 씨를 말리려 들 것이다.

개척 장비의 대부분은 파괴되어 있었다. 자원은 태부족이었다. 하지만 지원자들은 이 행성에 남았다.

맨 주먹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일은 이미 붉은 악마호의 승무원들에겐 너무 당연한 일상이었다.

그들에게 새로운 환경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모든 건설과 활동은 탐지를 피하기 위해 지하로 확장되어야만 했다.

 

그런 그들을 두고 붉은 악마는 가장 탐지되었을 가능성이 낮은 식민행성 후보지로 도약했다.

그 후보지는 우주개척 초반, 매우 낮은 성공율을 염두에 두고 발사된 개척선이 향한 곳이었다.

따라서 도약 기술도 없이 아광속으로 가속해 통상우주를 날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행성에 접근하여 스캔했을 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지구에서 출발한 함선이 도착할 예상시간이 몇년이나 지났지만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이다.

중간에 우주의 미아가 되었든가, 아니면 파괴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그들은 꾸준히 기다렸다. 셔틀을 내려보내 느렸지만 식민지 개척을 시작했다.

행성은 다른 식민후보 행성들보다 훨씬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승무원들은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함장은 오지 않는 식민선과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는 식민지를 보며 

한가지 결단을 내려야 했다.


이미 도약에 필요한 에너지를 다 소모한 붉은 악마를 행성지표로 착륙시켜 부품과 동력원을 식민화에 보탤 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위성 궤도를 유지시켜야 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행성의 식민화는 꾸준했지만 매우 더뎠다. 필요한 자원도, 동력도 매우 부족했다.

이대로라면 드란의 추적을 받았을때 교전도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차라리 식민화를 가속하여 대우주요격을 준비하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결국, 붉은 악마는 승무원들의 결정 속에 행성으로 강하했다.


상당한 피해를 입었지만 오랜 시간 인류를 위해 싸우던 우주함선은 새로운 행성에 하나의 씨앗이 되어 빛났다.

이것이 훗날 다시 찾은 지구라고 불리는 인류 모행성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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