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운 여름날 산 중턱에 난 샛길옆에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붉게 그을린 피부에 긴 떠꺼머리에는 색색 천으로 장식을 하고 낡은 옷이지만 단정하게 차려 입었다. 날은 닭 한마리 땡볕에 던져 놓으면 금방이라도 익어버릴 것처럼 뜨거웠지만 그늘에 앉은 청년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입에선 웅얼웅얼 노래가 흘러나왔다. 


"밤마다 공주님은.. 서동을 안고 간다네.."


웅얼거리던 노래도 잠시, 저 멀리 누군가 다가오는 모습이 보이자 사내는 길게 바위위에 누워 버렸다. 주변은 온통 땡볕이었으나 이 나무 아래 바위는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명당중의 명당이었다. 잠시 자는 듯 하자 두명의 소녀가 길을 따라 올라왔다. 아직 앳되어 보이는 나이였으나 그들의 발걸음은 그리 가벼워 보이지 않았다.


"공주님. 뭐라고 말씀좀 해 보세요."

"......"

"아. 그 거지같은 놈이 뭐라길래. 아휴 답답해. 명부를 봐도 아씨가 궁 밖으로 나가지 않은 것은 명백한 사실 아닙니까."

"......"

"임금님도 너무하시지, 어떻게 공주님을 궁 밖으로 내칠 생각을 하신 건가요. 너무하십니다요."

"그만 해라. 궁을 나온 것은 내 의지니. 공연히 너를 힘들게 하는구나."

"공주님! 제가 문제가 아니라요. 그러니까."

"지쳤나 보구나. 쉬었다 가자꾸나. 저기 그늘이 보이는구나."


두 소녀는 사내의 앞에 와서 섰다. 공교롭게도 사람이 앉을만한 곳은 청년이 다 차지하고 누워 자리가 없었다.


"여보시오. 자리를 좀 비켜 주시오."

"음냐...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 쿨...쿨.."

"잠이 호되게 들었나 본데요."

"자리를 비켜줄 수 없다면 우리가 다른 곳으로 가자꾸나."

"음? 아니. 선녀님이 내려오셨나?"

청년이 눈을 비비며 호들갑을 떨었다. 

"선녀 아니고요. 자리나 좀 비켜줘요. 이 넓은 바위를 혼자 다 차지하고 누울 셈이에요?"

"아니오. 선녀가 맞는 것 같소. 낭자랑 같이 계신 분은 진짜 선녀가 아니란 말이오? 이렇게 예쁜 분은 처음 봤소."

"농짓거릴랑 그만하고 비키기나 해요."

청년은 기지개를 켜더니 옆으로 물러나 앉았다.


"어디까지 가시는 길이우?"

청년은 능글거리는 투로 물었다.

"아니 왜 남의 가는 길을 알려고 해요? 댁의 갈 길이나 가세요."

"나는 저기 계신 선녀님께 물은 거요. 낭자는 빠지시오."

"아니 이 사람이 어디 감히! 이 분은 댁같은 사람이 함부로 말을 걸어도 되는 분이 아니란 말예요!"

"귀하신 몸이라니. 선녀님보다 더 귀한 신분이란 말인가? 그럼 대감집 따님이신가?"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럼 공주님이라도 되신단 말인가?"

"그건...."

"정말 공주님이라면 수행하는 사람이 낭자 하나 뿐이란 말이오? 금색 찬란한 마차에 시녀도 스물쯤 호위 무사도 잔뜩 있어야 하는 건 아니오?"

"사정이 있으니 깊이 묻지 말아주십시오. 제 시비가 철이 없어 실례를 범했군요."

다른 소녀의 말은 기품이 있었고 함부로 하기 힘들어 보였다.


"그.. 렇구료. 그나저나 그 얘기 들었소? 요즘 임금님이 심려가 크시다 하오."

두 소녀는 대꾸하지 않았다.

"아니 그 셋째 공주님이 말이유. 만나는 남자가 있다고 해서...."

"헛소리!"

키작은 소녀가 큰 소리로 외쳤다.

"댁이 보길 봤소! 그런 유언비어를 퍼뜨린 놈이 잘못이지!"

"아니 왜 화를 내고 그러시우. 임금님이 심려가 크시다는데. 공주님이 그랬다는 것도 아니고."

"그만해라 진화야. 잘 잘못이 있으면 언젠가는 가려질 것이야. 사실 그날 밤, 나는 궁을 빠져나간 일이 있었다. 오해를 살만도 하지."

"공주님!"

"아니 진짜 공주님이셨소?"

남자는 깜짝 놀란 듯 눈을 둥그렇게 떴다. 하지만 정말 놀란 부분은 궁을 빠져나갔다는 공주의 말이었다. 공주는 그런 청년의 태도는

신경쓰지 않고 이야기했다.


"그래. 나는 사실 용살권 계승자라는 또다른 신분이 있었기에 멀리 천축의 고수와의 일전을 치뤄야만 했다. 피할 수 없는 일이지."

"용살권요?"

"그래. 너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 무공이 있다. 내가 대성할때까지는 숨기려 했다만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너에게는 말해야겠지. 대성하면 산을 가르고 바다를 엎을 수 있는 정도의 힘을 갖게 된다. 머지 않아 이런 헛소문을 퍼뜨린 자를 잡아 용살권의 제물로 바칠 것이야. 그러기 위한 출궁이니."

"아... 그래서 궁을 나오신 거였군요.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아니. 공주님, 세상이 얼마나 험한 줄 알고 그런 궁에서 배운 무술 한두개만 믿고 나오셨단 말입니까. 그건 세상에선 아무 도움도 안 됩니다."

공주는 그런 청년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는 이야기 했다. 


"걱정 마십시오. 지금 저의 미약한 솜씨로도 눈 앞의 위험 정도는 막을 능력이 있으니까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들의 앞으로 뭔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집채만한 호랑이였다.


"이런 곳에 호랑이가!"

청년이 놀라며 등짐에서 칼을 뽑아들고는 그들의 앞을 막으려는 순간 공주가 그들의 앞으로 나섰다.

"낮부터 사람에게 덤벼들다니. 이런 짐승은 살려둬 봐야 사람들을 해칠 뿐이겠군."

공주는 침착한 태도로 몸을 빙글 돌리더니 강한 일장을 내리쳤다.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 내리듯 지축을 흔드는 굉음과 함께 엄청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청년이 보니 산산조각이 난 바위가 여기저기 파편이 되어 흩어져 있을 뿐, 호랑이는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았다.

"호.. 호랑이는 어찌 되었습니까?"

"도망쳤습니다. 이상하군요. 살기가 없는 것을 보니 사람을 해칠 녀석은 아닌 듯 한데."

청년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공주님 다친 곳은 없으세요?"

"음. 아직은 없다만, 출궁하는 길에 호혈을 뿌려 귀신들을 달래려 했건만 이래서야 큰일이구나. 대신 개라도 잡아야 하려나." 


"그나저나, 무술을 배우신 것 같군요."

잠시 생각을 하던 공주가 청년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 무술은요 뭘. 저는 아리따운 분들 둘이서만 여행을 하면 귀찮은 일이 생길까 해서 호위무사나 되어볼까 했는데 그럴 필요는 없겠네요."

"아니. 마침 그래도 도움이 필요하긴 했습니다. 진화가 몹시 지쳐 더 이상은 짐을 들고 가기가 힘들 것 같으니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생각해 보니. 급한 일이 생각나서 말입니다. 저는 그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청년은 짐을 챙겨서 냅다 도망치기 시작했다. 


청년이 사라진 후에 진화가 공주에게 물었다.

"저 인간 뭐래요? 남자가 짐 들어주기 싫다고 도망가?"

"무술을 배운 폼이 탄탄한 것이 보통 인물은 아닌 듯 하다. 눈빛도 맑고. 아바마마께서 보낸 호위무사인가보지."

"그럼 왜 도망간대요?"

"글쎄다. 어쩌면 아바마마께 오해라는 말을 전하려는지도 모르지."

"그럼 궁으로 돌아가시는 건가요?"

"아니다. 용살권을 대성하기 전엔 돌아가지 않는다."

"그럼 언제 돌아가나요?"

"이왕 나온 김에 천하의 패자들을 꺾어 내 발아래 꿇리고 나라나 세워볼까 한다."

"건국을 하신다고요? 신라는요?"

공주는 시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라를 세우면 좋은 관계가 될 수도 있겠지만 싸움을 할 수도 있겠지."

둘이 장차 천하의 패권을 다투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즈음 청년은 죽을 힘을 다해 도망치고 있었다.

그런 그의 앞에 산적떼로 보이는 이들이 복장을 갖추고 있었다.


"크헤헤헤! 이놈 잘 만났다. 가진 것 다 내놓으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산적들은 기세등등하게 칼을 휘두르며 외쳤다.

"박구야. 그만 해라. 이미 날 샜다."

"에? 형님 그게 뭔 소리요?"

"아까 거기서 아바마마께 빌려온 호돌이 풀어놨잖냐. 하마트면 호돌이 가죽만 남길 뻔 했다."

"그러길래 서동형님 칼질좀 살살 하라니까요. 그러다가 임금님이 아끼시는 호돌이 다치면 큰일입니다요."

"아니, 선화공주가 때려 죽일 뻔 했다니까."

"호돌이 순해서 사람은 안 때리는데요?"

"호돌이가 죽을 뻔 했다고!! 막 이래 이래 이래 하니까 바위가 부서지고 번개가 떨어졌어!"

"네에? 무슨 말이에요 그게?"

"용살권인가 뭔가 계승자래. 선화공주가. 유언비어 퍼뜨린 놈 잡아 죽이러 출궁한거래."

"그럼 우리 어떻게 해요?"

"어떻게 하긴 꽁지가 빠져라 도망가야지!"

"아... 정식이형 아까 산적흉내낸다고 먼저 올라갔는데."

"데려와! 그러다가 진짜 죽는다. 혹시 배후라도 부는 날엔 우리나라가 위험해!"

그들은 더운 여름에 머리가 핑 돌정도로 달려간 끝에 가까스로 공주의 일행보다 먼저 정식과 만날 수 있었다.


"서동형님요. 이제 어쩔 겁니까? 선화공주가 용살권 계승자라니. 쌈하다가 한대 맞으면 죽겠네요."

"아.. 몰라. 그래도 이쁘긴 이쁘드라."

서동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형님 아직도 정신 못 차렸어요. 우리나라에도 이쁜 여자들 많아요. 내 동생 소개시켜줄까요."

"싫어 임마. 너같은 처남 두기 싫어."

"아 진짜 사람볼 줄 모르시네. 내가 매형 잘 해드릴께요. 내 동생 음식도 잘해요."

"그만. 거기까지."

서동은 정식을 밀어내며 진저리를 쳤다. 

"그나저나 정보부 놈들 다 죽었어. 선화공주가 다정다감하고 마음이 여려서 뭐시기 어째?"

"그거야 신라왕도 몰랐나 본데 우리 정보부가 거기까지 어떻게 압니까."

"그런 걸 캐라고 월급 주는 거야! 여튼, 니들 다 해산하고 귀국해라. 여긴 내가 맡아보마."

"형님혼자 어쩌실라구요."

"일단 하는데 까지 해보고. 안되면 내 한 몸은 빼서 돌아간다."

"형님! 안됩니다. 저희 경 칩니다."

"시끄러 임마. 우리가 유언비어 퍼뜨린거 알면 우린 다 몰살이야. 니들 얼굴 팔려 있는 거 뭉쳐다니다가 한군데서라도 들통나면 다 죽어. 잔말말고 돌아가. 나도 생각이 있으니까 말야."

"형님 또 뭐시기냐 잡일 해가며 환심사려는 거 아닙니까. 그러다가 뭐냐 그 시녀랑 눈 맞습니다."

"이 녀석은 꼭 말을 해도 이따위야. 곰바우야. 넌 호돌이 잘 챙겨라. 털에 흠집나면 아바마마 진노하신다."

"걱정 마슈.. 내가 새색시 혼수 금침 챙기듯 할테니까."

"그럼 잘들 돌아가라."

"형님도 꼭 성공하슈."

그들은 굳게 손을 맞잡고 배웅했다. 서동의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등짐을 지고 선화공주가 향한 방향으로 바삐 발을 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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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원래 비정한 법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