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 오래지 않던 어느 먼 우주에 강호고가 있었으니 수많은 학생들을 거느린 그 학교는 예로부터 수많은

기인이사와 무공고수들을 배출한 것으로 유명했다. 


"부장님! 큰일이 났습니다!"

"뭔데 호들갑이냐?"

부실의 선배들이 눈을 부라리며 쳐다보았다. 막 들어온 것은 부의 막내로 있는 정구식이었다. 


"무림지보가 나타났습니다."

"무림지보!"

선배들의 눈에 기광이 감돌더니 병아리를 노리는 솔개처럼 앞다투어 정구식을 덮쳐 들었다.


"말해 봐라. 자세히."

"컥..기.. 기말고사 문제집이 유출되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선배들이 움켜쥔 교복에 목이 졸린 정구식이 가까스로 말을 마치자 부실 안은 침묵이 감돌았다.

기말고사 문제집은 교무궁 깊은 곳에 있는 절대금지에 보관되어 있었을 터, 감히 그것에 손을 댄다는 것은

구족을 멸할 죄임에 틀림 없었다. 그런 것을 감히 누가 손을 댄단 말인가.


"우리 서예부 말고 다른 곳에도 소식이 들어갔는가?"

"아직은 아닌 듯 합니다. 2학년 화장실에서 똥을 싸다가 들은 이야기라 다른 이들은 아직 모를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문제입니다. 사안이 사안인지라."

"그 이야기는 누구에게 들었나?"

"선도부의 부장과 부부장 사이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들이 잡은 두발 불량자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인데 사안이 중대하여 거듭 확인했으며 사실임에 틀림 없다고 했습니다."

"두발 불량자라. 이번 기말시험이 중요하기는 하나 감히 그것을 훔쳐낼만큼 간 큰 자가 당금 강호고에 있다고는 믿기 어렵다.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드러나지 않은 신비 세력이나 아니면 암중에 은거한 세외의 힘이 뻗쳐온 것일 것이야."

부실 구석에 앉아 있던 김경호 부장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부원들은 그의 말에 깊은 생각에 잠겼다.

"세외의 세력이 대체 우리의 무림지보에 무슨 관심이 있단 말입니까?"

한 부원이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기말고사 문제지가 손에 있다면 현 강호고의 정세를 미루어보건데 일통은 무리더라도 양분은 가능할 것이다."

모두의 눈이 부릅떠졌다. 현 강호고의 실세를 쥐고 있는 각 부의 부장들은 그다지 관직이나 부귀영화에는 연연하지 않았으나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부장 아래에는 학업이 부진하여 고초를 겪는 이들이 많았고 그런 그들을 위해 부장이 해줄 수 있는 건

몰래 빼돌린 소주파티를 열어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만약 그들이 기말고사를 지배할 수 있다면,

각 부의 부장들이 가진 힘은 더 커질 것이고 그것을 미끼로 하여 강호고의 판도를 뒤엎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도 무림지보를 찾는다."

"부장!"

부장의 급우이자 서예부 삼성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김언석이 노기를 감추지 않으며 외쳤다.

"우리는 그것을 되찾아 교무궁에 돌려준다. 그렇지 않다면 파기하여 없애도록 한다. 세외의 손에 강호고가 농락당하는 일은 볼 수 없으니."

부장의 말에 김언석의 표정이 비로소 풀어졌다.

"역시 우리 부장이로군."

서예부원들은 백방으로 뛰며 소식을 탐문했으나 별반 특별한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사건은 뜻밖의 곳에서 터져나왔다.

서예부장이 마침 밥을 먹으러 교내식당에 들렀을때 주위가 소란스러워지더니 한 켠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예부장,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군."

"독서부장..... 여긴 무슨 일인가! 밥을 먹으러 온 건 아니겠지!"

김언석이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사람들이 주욱 갈라지며 두 사람 사이를 비웠다. 맞은 편에 있는 것은 독서부의 부장을 맡고 있는

장미란이었다. 그녀는 갸녀린 여성의 몸이지만 3만권의 장서를 읽어 교내 제일독서상을 수상한 바 있는 실력자였다. 도서관 정리를 통해 다져진 근육에서 나오는 괴력은 그녀가 독문병기로 삼고 있는 브리태니커백과사전 전집을 마음껏 휘두르게 해 주었고 그런 그의 실력은 교내의 수위에 든다고 알려져 있었다. 교무궁의 전폭적 지지를 받고 있는 독서부는 지금 한창 성세를 누리는 중이었다.


"듣지 못했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자리를 비워라."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독서부의 부원들이 책을 휘두르며 사람들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서슬퍼런 기세에 대부분이 쫒겨나고 남은 것은 서예부장 김경호와 김언석, 그리고 독서부장 장미란 뿐이었다.


"자리를 비켜주었으면 좋겠는데."

장미란이 눈을 내리깔며 교태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김언석은 자신도 모르게 그러마고 대답하려다가 주먹을 불끈 쥐고 외쳤다.

"그럴 수는 없다. 무슨 꿍꿍이 속인가! 설마 초컬릿이라도 건네겠다는 것은 아니겠지!"

"그렇다면?"

"그럼 내가 시식이라도 해야 할 것이야! 독이 들었을지도 모르니까!"

독서부와 서예부는 암중에서 서로 치열하게 싸워온 역사가 있었다. 그러나 학업에 도움되지 않는 서예부와는 달리 독서부는 교무궁의 지지에 힘입어 세를 확장해 왔고 그러던 중에 알게 모르게 시예부에 입힌 피해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서예부장. 들어서 나쁜 이야기는 아닐 거야. 저 부하는 밖에서 기다리라고 하지?"

"부하가 아니다. 내 친구다. 내 친구와 나누지 못할 이야기라면 듣지 않는 것이 낫다."

그 말에 장미란의 표정이 흥미롭다는 듯 변했다. 그리고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뭐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이쪽에서 양보하지. 이야기는 간단해. 무림지보에 관한 것이야. 알고 있겠지? 무림지보가 돌고 있다는 것. 그것을 입수하는 것이 독서부의 목표니까. 서예부도 갖은 목표를 가진 듯 보여. 협력해 줬으면 좋겠군."

"우리가 무림지보를 찾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누구와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닌 듯 싶다."

독서부장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무슨 소리지. 설마 전교 일등의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것인가? 어리석군.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아."

"그런 꿈 따위는 꾸지 않아. 내가 전교 일등이라면 강호고의 교무궁에서도 두고 보지 않을 거야."

"그럼 대체 무슨 소리야."

독서부장은 경계심을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있어서는 안되는 물건은 사라지면 그만이다. 그것이 사람들 사이의 갈등과 반목을 만든다면 없애는 게 일일 뿐이야."

"흠. 진심인지는 모르겠지만 동감이야. 독서부에서도 무림지보를 없애는 게 목표니까. 그런 것이 돌아다녀서는 모범생들에게 피해만 갈 뿐이지."

"어림없다!"

갑자기 어디선가 거친 목소리가 들리며 한 독서부원이 튕겨져 날아갔다.

모두의 시선이 그 쪽을 향했다. 다가 오는 것은 근육질의 학생이었다. 

"헬스부!"

"이런 곳에 모여서 대체 무얼 꾸미고 있는 거지?"

"헬스부와 나눌 말은 없을텐데. 불가침 조약을 잊은 건가."

"그것이 무림지보와 관련된 일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김언석의 말에 헬스부의 부장 송건강은 불량스러운 어조로 답했다.

"무림지보라니. 그게 무슨 이야기지?" 

독서부장은 딱 잡아 떼며 말했다.

"그렇다면 무림지보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될까? 우리 헬스부는 무림지보의 소유권을 주장하겠다."

"공공연히 드러내고 이야기 할 문제는 아닌 것 같군. 교무궁에서 나온다면 무림지보를 손에 넣는 순간 구족을 멸하게 될 것이야."

독서부장이 목소리를 낮추어 이야기 했다.

"하. 교무궁이 두려웠다면 애초에 일을 시작하지 말았어야지. 교무궁의 낡은 방식으로 우리 헬스부를 어쩌지는 못할 걸?

교무궁은 나름대로 변방과의 대결에 힘을 쓰고 있어 여기까지 넘보지는 못할 것이야."

송건강의 말에 모두는 굳은 표정이 되었다. 최근 교무궁의 행보는 어지러운 것이 사실이었다.

이사진의 교체와 교장 교감의 파행적 경영등으로 강호고의 입지가 어려워졌고 등록금 인상에 의해 

민심은 크게 흉흉해져 있었다. 일부 올바른 교사들과 교무궁직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교무궁은 그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럴 수는 없어. 무림지보는 누구의 손에도 들어갈 수 없다. 교무궁이 막지 못한다면 내가 하지."

독서부장이 등에 진 베낭에서 독문병기 브리태니커백과사전을 꺼내며 말했다. 그걸 본 헬스부장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해보자는 건가? 우리 헬스부는 무적이다!"

"무식한 소리!" 

장미란의 손이 휘둘러지자 백과사전이 펄럭이며 춤을 추었다. 그러나 헬스부장은 다만 목을 까딱이는 것 만으로도 그것을 가볍게 피해냈다.

"나를 근육만 키운 바보로 생각하면 곤란하지. 헬스 초보나 범하는 실수를 범할 거라 생각하는가? 볼륨만 키우느라 지구력과 순발력을 놓친다면 진정한 헬스인이라 부를 수 없다. 나의 근육은 실용성을 추구하여 그 힘을 극대화 시켰다! 그렇게 우습게 보아선 안될거다."

장미란은 짧은 기합성과 함께 브리태니커 전집을 꺼내어 휘두르기 시작했다. 한권을 꺼내 휘두를때와 전집을 꺼내 휘두를 때의 힘은 판이하게 달랐다. 식당 내부가 장미란이 뿜어내는 엄청난 기파와 파공성에 묻혀버릴 지경이었다. 두 사람의 대결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서예부의 두 사람은 안간힘을 써야 했다. 송건강은 온몸의 근육으로 장미란의 공격을 버텨내며 이 정도는 아프지도 않다는 듯 백과사전들을 튕겨내었다. 그 와중에 송건강의 옷이 찢어지며 그의 강철같은 근육들이 드러났다.

"하. 이게 전부인가? 그렇다면 이제 내 쪽에서 가야겠군."

송건강은 걸레가 된 웃옷을 벗어 맨 근육을 드러내며 따분하다는 듯 말했다.

장미란은 거친 숨을 내쉬며 송건강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온 몸에선 땀이 비오듯 흘러내리고 있었다. 

"도와야 하지 않나?"

김언석의 말에 김경호 부장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싸움이다."

백과사전의 움직임은 눈에 띄게 줄어들어 있었다. 몇권의 책은 갈가리 찢겨져 튕겨나갔다. 백과사전은 그 내용도 내용이려니와 무게나 날카로움에 있어서도 무림의 한 축을 채우고 있을 정도의 무기였다. 다만 아무나 쉬이 다룰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을 뿐. 그러나 헬스부장의 앞에선 별반 소용이 없었다.

마침내 송건강이 장미란의 앞에 쇄도했을때 장미란은 마지막 공격을 시도했다. 백과사전 발등 떨어뜨리기. 그러나 송건강은 무릎을 살짝 내밀어 백과사전을 튕겨내었고 장미란의 마지막 공격은 수포로 돌아갔다.

"헉!" 

마침내 장미란의 가녀린 목이 송건강의 손아귀에 붙잡혔다. 장미란은 짧은 비명 이후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송건강의 악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송건강은 사과를 맨 주먹으로 으깰 수 있었다. 그것도 꽁꽁 얼린 사과를. 

김언식이 뭐라 말을 하려고 할 즈음 이미 김경호 부장은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호오. 서예부의 샌님이 뭘 할 수 있다는 거지? 그 붓으로 날 찌를 텐가? 이미 나의 전신 혈도는 강철과 같이...."

송건강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김경호 부장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뭘 한건가? 설마 그게 끝인가?"

"난 이미 바보를 소환했다."

"바보? 무슨 바보? 니 옆에 있는 그 녀석 말인가?"

잠시 영문을 몰라 생각하던 송건강의 눈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이... 이!!"

송건강은 옆에 있던 유리에 자신의 등을 비추어 보았다. 등에는 졸렬한 글씨로 '근육바보' 라고 쓰여 있었다.

"이.. 이 자식이! 죽여버리겠다!"

송건강은 장미란을 던져 버리고는 김경호에게 달려들었다.

김경호의 몸놀림은 무척 날쌘 편이었기에 평소의 송건강으로도 잡기 쉬운 상대는 아니었다. 따라서 지금처럼 흥분한 상태에서는 잡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쿨럭 대체, 어떻게 한 거지?"

"괜찮은가? 송건강은 너무 발달된 근육 덕분에 등에 손이 닿지 않는 부위가 있다. 부장은 그 부위에 글씨를 씀으로서 상대를 자극한 것이지."

장미란은 붉어진 목을 붙잡고 둘의 대결을 바라보았다. 

송건강의 몸 여기 저기엔 하나 둘 검은 선이 더해지기 시작했다. 낙서와 외국어, 조롱이 계속 더해져 마침내 누구인지를 알아 볼 수 없을 지경이 되어 버렸다.


"이제 그만하지."

"끼어들지 마라! 죽여버리겠어!"

송건강은 거의 분노로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누가 자신을 제지하는지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쾅! 

거대한 폭음이 식당안을 울리고 송건강은 정신을 잃고 바닥에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그 뒤에 서 있는 사람은 국자를 들고 있는 중년 여인이었다.


"식당아주머니."

"이야기는 대충 들었다만, 이런 식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닌 듯 싶군."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

"아니야. 김경호학생. 학생이 한 행동을 나무라는 것이 아니야. 하지만 이래서는 장사를 할 수 없겠군. 빨리 문제를 해결해 주기 바라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장미란은 식당 아주머니에게 고개숙여 인사하더니 김경호를 바라보며 얼굴을 붉혔다.

"구해줘서 고마워. 빚을 졌군. 답례라긴 좀 그렇지만 무림지보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 있어."


장미란이 떠난 후 김언석은 김경호에게 말했다.

"그녀도 꽤 괜찮은 사람 같더군."

"마음에 들어? 다리라도 놔줄까?"

"쓸데 없는 소리!"

두 사람은 장미란이 알려준 대로 학교 근처의 분식집으로 향했다. 이 곳을 본거지로 삼는 일군의 찌질이들이 무림지보의 행방을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잠깐의 소란 이후 무림지보를 가진 암중의 세력에 대한 정보를 얻은 두 사람은 단신으로 테니스부실로 잠입해 들어갔다.


테니스부실에서의 환영은 엄청났다. 부원들의 광속 서브를  두 사람은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다.

그들은 이미 두 사람이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김언석은 급소부위에 강서브를 얻어맞고는 거품을 물며 쓰러져 내렸다.

그런 그를 보며 테니스부장이 비웃었다.

"주요 부위에 맞았으면 큰일이었을텐데 허벅지에 맞아서 다행이야."

"... 큰일이란.. 말이다..."

김언석은 가까스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김경호는 30명의 흉폭한 테니스부원들과 붓펜 한자루만을 들고 맞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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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역시 이 곳이었군. 너무 안일했어. 우리 둘만 오다니. 하지만 여럿이 왔다면 피해도 커졌겠지."

"끄으......." 

김경호의 말을 받아주는 이는 없었다. 그의 친우는 지금 극심한 고통에 정신이 반쯤 넘어가 있었다.

"너도 순순히 포기해라. 광속서브에는 자비심이란 없어! 시속 500km를 넘나드는 초음속 서브에 맞고 고자가 되기보단 순순히 항복하는 게 나을 거야!"

테니스부의 두목이 항복을 권유했다.

"항복을 하면 어떻게 되는 거냐?"

"테니스장에 세우고 타겟이 되어 부원들의 서브연습을 받는거지."

"다른 게 없군."

김경호부장은 고개를 절래절래 내저었다.

"한번에 테니스공을 한개만 맞느냐. 30개를 맞느냐의 차이다!"

"기다려라. 너희들. 내 이름은 들어 보았겠지." 

김경호부장은 뒷춤에서 모나미 붓펜을 꺼내어 들며 낭랑히 외쳤다. 수십명의 적을 앞에 두고도 그 기세는 꺾이지 않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게 뭐!"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은 들어 보았나?"

"헛소리!"

"헛소리가 아니다. 실제로 맞아볼 텐가!"

"그럴 이유는 없어! 얘들아 쳐라!"

빗살같은 서브가 날아들었다. 더러는 휘어지고 더러는 직선으로 떨어지며 더러는 빨랐고 더러는 느렸다. 모든 방향을 점하고 날아오는 테니스 공 앞에서 김경호부장은 몸을 움츠리고 충격을 최소화할 뿐이었다.

"쓰러질 때까지 쳐라! 연타다 연타!"

테니스부 부장이 큰 소리로 외쳤다. 그때였다. 부실 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몇명의 사람들이 부실 내로 뛰어 들어왔다.


"부장! 우리가 왔습니다!"

"너희들!"

"서예부의 조무래기 따위 몇이 와도 달라지지 않아! 네놈들의 알량한 붓 따위는 아무런 힘이 없다!"

"그렇지 않다! 문방사우!"

김경호 부장이 외치자 뒷쪽에서 네명의 부원들이 큰 목소리로 외치며 앞으로 달려들었다.

"문!"

"방!"

"사!"

"우!!!"


그리고 그들은 옷 매무새를 고치며 단정하게 무릎꿇고 앉은 부장 앞에 지필묵을 가지런히 늘어놓았다. 한점 흐트러짐 없는 배열에 잡티하나 없는 맑은 화선지 먹향을 듬뿍 뿜어내는 벼루와 거기 세워진 금용이 그려진 먹, 가지런히 정돈된 붓까지. 누가 보았다면 이 곳이 치열한 격전장이 아니라 서예부실이 아닌가 싶었을 정도의 박력이었다.


"무... 무슨...!"

"자 오너라! 너희에게 가훈을 써 주마!"

"가훈 따위 뭣에 쓴단 말이냐!"

"부모님께 선물드리면 좋아한다. 거기 너!"

김경호 부장은 테니스채를 들고 있는 테니스부원을 한명 가리키며 말했다.

"네.. 넷?"

"장래 희망이 뭐냐?"

"저.. 저는 의대에 가는 건데요."

"좋다! 이 기백을 받아라!"

김경호 부장은 그 자리에서 필! 의대합격! 승! 이라고 힘이 넘치는 글을 써 주었다.

"이 글을 책상 앞에 붙이고 공부하기전에 큰 소리로 세번씩 읽어라. 부모님이 너를 보시는 눈이 달라질 것이다."

"가.. 감사합니다. 저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마르기 전에 접지 말도록 해라. 번지니까. 다음은 누구냐!"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몇명이 달려들더니 길게 줄을 늘어서며 이걸 써달라 저걸 써 달라 조르기 시작했다. 

"이... 멍청한 놈들! 적의 페이스에 말리면 어쩌자는 거냐! 우리에겐 윔블던이다. 윔블던과 그랜드 슬램이 있어! 그걸 위한 지옥 훈련이 아니었냐! 대체 이깟 가훈이 뭐가 중요하다고!"

"윔블던! 좋다. 너에게도 써 주마!"

김경호 부장은 테니스부 두목에게도 일필휘지, 그리고 좀 더 정성을 기울인 '정복! 윔블던' 이란 글씨를 써 주었다.

"우와.. 진짜 끝내준다. 두목 좋겠어요. 나도 이거 써 주세요."

그것을 받아든 테니스부 부장은 울먹울먹하며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엄마가...... 엄마가... 윔블던을... 흑."

"괜찮다. 말은 필요 없어. 나는 다 이해한다. 그것이 남자다."

모두가 하나씩의 글씨를 받아들고 발그레한 감격의 표정으로 서 있을때 서예부 부원들은 경건한 몸가짐으로 문방사우를 정리하고 있었다.


"우리가 나빴다. 서예는 훌륭한 것이다."

김경호 부장은 테니스부 두목의 말에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지보는 여기에 있다. 가져가라. 우리는 윔블던에 가겠다."


김경호 부장이 그것을 들고 막 테니스 부실을 나설 때였다. 그의 앞을 가로막는 일군의 무리가 있었다.

얼핏 보아도 오십은 되어 보였다. 그리고 그들의 무력도 심상치 않은 정도의 기백이 흘러나왔다. 

주변을 차갑게 얼리는 듯한 빙산과 같은 기세에 모두는 발이 얼어붙어 버렸다.

"멈춰라. 서예부장. 그것을 우리에게 넘겨라."

"누구지. 너희는?"

그들은 복면을 하고 있어 모습을 알아보기 쉽지 않았다. 그러나 하얗게 입은 외투 사이로 체크무늬가 살짝 비쳐 보이는 것을 보고 부원 정구식이 부장에게 귀띔했다.

"저것은 이웃 세라여고의 교복입니다."

"세라여고! 세라여고에서 무림지보에 무슨 용무냐!"

"그것은 알 필요 없다."

"설마 너희가 이 모든 것을 획책한 세외의 무리였던 것인가? 그렇다면 너는 세라여고의 일진미!"

"보기보단 눈치가 빠르군. 역시 듣던대로 남중남. 서예부장. 좋게 이야기 하겠다. 무림지보를 넘겨라. 그럼 너에게 세라여고 8선녀와의 소개팅을 주선하지."

"거절한다."

자르듯이 튀어나온 김경호 부장의 말에  일진미의 눈빛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왜! 왜지? 그걸로 고교지존이라도 될 셈인가? 그래봐야 한때의 시험일 뿐이다! 8선녀의 아름다움을 보란 말이다!"

그녀는 분노에 치를 떨며 8선녀 사진첩을 공중에 펼쳤다.

"이뻐 봐야 여고생. 그 아름다움엔 한계가 있으며, 아직 피지 않은 꽃봉우리일 뿐이다."

"흥! 자신감 부족이 틀림없어. 그러니까 꽃을 마다하지! 대화가 안된다면 실력을 보이지. 얘들아! 빼앗아라!"

일진미가 주변을 가득 메운 이들에게 외쳤다. 모두가 함성을 지르며 서예부장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무림지보에 욕심은 없다."

김경호 부장은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어 무림지보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일진미와 그의 일당들은 앞으로 달려들어 빼앗으려 했지만 이미 무림지보는 한줌의 재로 변한 뒤였다.


"여길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으냐!"

일진미가 분노와 수치심에 치를 떨며 외쳤다. 공포에 사로잡힌 부원들과는 달리 김경호 부장의 눈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멈춰라!!! 교무궁이다!!!"

테니스 부실 위에서 소리치는 것은 교무궁 제일무력을 가지고 있다는 국어교사 백구열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본 일진미와 그 일행은

놀라 뿔뿔이 흩어져 갔다. 백구열의 위명도 위명이었지만 교무궁에 맞서는 것은 자살행위였기 때문이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낭패를 당할 뻔 했군요."

모두가 사라져 간 뒤 김경호 부장은 미소를 지으며 백구열에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 자식이! 라이터를 들고 있다니! 담배를 피울 셈이냐!"

백구열의 꿀밤이 김경호 부장의 머리를 강타했다.

"예?"

"교무궁에 따라와라! 네 놈에게 맛을 보여주마!"

"아니 그게 아니구요!"

귀를 잡혀 끌려가는 김경호 부장의 모습을 서예부원들과 테니스부원들은 존경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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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언니. 그는 어쩌면 언니가 찾던 그 사람일지도 몰라요."

"아직은 몰라. 하지만 그가 정말 그라면."

일진미는 일언지하에 8선녀의 소개팅을 거부한 그를 떠올리며 가슴을 두근거렸다.

Y물에서나 등장하는 완벽한 조건을 갖춘 게이남성친구야말로 차가운 도시 여고생에겐 프라다 백과 함께 꼭 필요한 요소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렇다면 그녀는 모든 힘을 다해 그를 남성친구로 만들 것이라고 다짐했다. 


"왜 떨어! 떨 짓을 왜해!"

"아니요 그게 아니구요. 갑자기 오한이."

"담배 끊으랬지! 너 임마! 부장이나 되갖고! 서예부실에 향피우는 거 담배냄새 감추려고 그러는 거지!"

"아니라니까요. 그거 정신집중이에요. 담배 끊었어요."

"이자식이 꼬박꼬박 말대꾸야!"

김경호 부장은 강호고를 구했을때보다 더 치열한 싸움 속에서 그 스스로를 구해야만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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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원래 비정한 법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