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 조언, 딴지 모두 환영입니다.
------------------------------------------------------------
라이너 로센버그- 이멜반 제 4구역

진통제 덕분에 계속 몽롱한 상태로 차를 탈 수 있었다. 차가 흔들리는 것도 잘 느껴지지 않았고, 내가 숨을 쉬고 있는지 쉬고 있지 않은지조차 확인할 수가 없었으며, 복잡한 생각을 하는 것도 잘 되지 않았다.

“다행이네, 라이너- 저기 있는 의무병한테서 진통제를 얻어왔어. 이제 끔찍한 상상 안 해도 돼. 뭐, 지금은 몽롱해서 될 지나 의문이지만- 그런데, 계속 맞고 있으면 위험하지 않을까?”

“전쟁이잖아, 전쟁. 마약에 절어있는 사람들도 한 둘이 아닐텐데 까짓 진통제 연속으로 두 번 맞는다고 무슨 일 있겠어? 그건 그렇고, 말을 길게 하니 피곤해. 좀 잔다.”

슈벨이 말을 걸기에 온 정신을 실어 간신히 대답했다. 말을 길게 하자 역시나 피곤이 몰려왔다. 대답을 끝내자마자 고개를 차체 벽에 기댔고 바로 눈이 감겼다.


-헤인 동부 3지역

눈을 뜨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수송차가 멈췄 병사들이 모두 내리기 시작했다. 옆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던 슈벨이 잡고 흔들던 내 어깨에서 손을 떼고서는 나를 일으켰다.

“내가 너 자는 동안 시간 계산해서 진통제 한번 더 놔줬어. 중간에 밥도 한번 먹었는데, 네건 네 배낭에 잘 넣어 놨다구. 아직도 몽롱해? 여긴 좀 더 규모가 큰 기지니까, 아마 며칠 더 쉴 수 있을 거야. 너 정신없이 자는 동안 상당히 멀리 왔거든. 아아, 너 낫기 전에 내가 먼저 불려나가면 너는 심심해서 어쩌냐.”

슈벨이 말했다. 말투가 그다지 진지하지는 않았지만 나를 걱정해주는 것이 잘 드러나서 기분이 좋았다.

헤인의 기지는 이멜반의 그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훨씬 더 컸다. 마치 조그만 도시에 온 듯 하여 좀 더 안정감이 들었다. 중앙군이 이리로 오지 못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었지만, 여기에서라면 좀 더 오래 버틸 수도, 어쩌면 이겨서 다시 반격해 들어갈 수도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진통제의 효과가 거의 다 해 가는 것 같았다. 생각을 좀 더 복잡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팔의 통증이 조금씩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다행히 진통제의 효과가 다 한 후에도 처음 다쳤을때보다는 통증이 덜했다. 슈벨이 나를 부축하려 하기에 사양하고 나서 혼자 기지 병동까지 걸어갔다.

군복의 무게를 느끼며 터벅터벅 걸어가면서 둘러본 헤인 기지의 주위 풍경은 전쟁중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지나치게 아름다웠다. 하늘에는 큰 구름들이 군데군데 있었고 햇빛은 지나치게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았다. 나무들은 무성했고 따뜻한 바람이 불었으며 심지어 새가 지저귀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을 정도였으니, 군사 목적의 기지라기보다 공원에 온 기분이 들었다. 의도적으로 그랬는지 그러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기지의 모습조차 다른 곳과는 좀 더 자연에 동화되도록 설계된 듯 했다. 풍경 사진을 찍는 데는 더없이 좋을 것 같았다.

팔의 상태가(통증 뿐일테지만) 많이 호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진단을 마친 의무병이 좀 더 안정을 취하라기에 별 수 없이 침대에 누웠다. 그나마 이곳은 방송 수신이 가능한 곳이라 바깥 소식을 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침대 바로 위쪽에 있는 홀로그램 영상기에서 내가 보기 적당한 거리에 영상을 생성시켰다. 훈련소에 들어오기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즐겨보던 중앙국 채널은 해방연합에 의해 막혀 있었다. 별 수 없이 일단 전쟁의 전체적인 진행상황을 알기 위해 해방연합군 전용 채널로 접속했다.

채널 안에 볼만한 내용이 별로 없었다. 마음에 드는 내용도 얼마 없었지만 아예 처음부터 제공된 프로그램의 수 자체도 적었다. ‘현재 진행상황’이란 프로그램이 있기에 보기로 했다.

평소에 수없이 보던 세계지도가 나타났다. 하지만 현재 전쟁중인 해방연합과 중앙국의 영토는 각각 초록색과 파란색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해방군은 훨씬 잘 싸우고 있는 것 같았다. 유독 내가 투입되었던 쿠르젠부터 이멜반 근처까지는 중앙군이 오히려 치고 들어왔지만, 이 곳과 다른 두세 곳 빼고는 모두 해방군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듭하며 동쪽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5월이라 중앙국 지방 특유의 추위는 좀 덜한것도 조금 도움이 된 듯 싶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순간 가족들이 생각났다. 겨우 이틀을 정신없이 싸웠다고 가족들에게 연락하는 것보다 전쟁의 진행상황을 더 궁금해했던 나의 정신상태를 증오했다.

메시지함에 접속하자 내가 정찰대로 투입되던 이틀 전에 부모님으로부터의 메시지가 한 건 와있었다. 다시 그메시지를 열었다.

‘라이너, 오늘이 싸우러 가는 날이구나- 나와 에르페, 그리고 다라그바는 지금 매우 떨고 있단다. 네가 처음 해방군에 자원하겠다고 했을때부터 네 결심이 얼마나 굳었는지는 알고 있었다마는, 혹시 네가 오늘 처음으로 나가자마자 봉변을 당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걱정으로 마음속이 꽉 들어차 있단다.
그저 무사히 돌아오면 답장 해주려무나. 네가 정의를 선택했으니 그저 하나님께서 너를 지켜주시길 바랄 뿐이다.

아버지가.‘

눈물이 흘렀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종류의 ‘봉변’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내 결심은 훈련소를 떠나고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흔들리기는커녕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종교를 믿는 아버지의 순진한 말씀 마디 마디가 내 마음속을 파고 들었다. 내가 정의를 선택했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아니, 나의 선택이 의심스럽지는 않다고 치더라도 내가 정의를 선택했다고 해서 정말 하나님이란 존재가 나를 죽지 않고 계속 싸울 수 있도록 지켜줄지가 의심스러웠다. 죽는 것이 두려웠다. 이미 어깨를 다치기도 했고 정신적 충격을 심하게 받은 상태였다.


-이런 상태로, 내가 가족들의 바람대로 ‘정의’를 지키고서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전쟁은 인간의 이성의 한계를 드러내지는 않지만, 본능과 현대사회의 환영의 한계는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슈르스핀 그라나, 2264년 9월 23일 일기에서.
안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