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타의 구조 1

파타의 구조 2



  -철컹

  프로스트는 다섯 번째 자물쇠를 따고 문을 열었다. 현관문은 시끄러운 금속성의 소음을 흘리며 열렸다. 그는 스위치를 눌러 불을 켜고 지친 발걸음으로 걸어 들어와 부츠를 대충 신발장 주변에 집어던졌다. 그리고는 기타 케이스를 내려놓은 후 현관 가까이의 방바닥에 쓰러지듯 드러누웠다.

  단촐한 집이었다. 부엌이 연결된 거실과 샤워기와 욕조가 있는 화장실, 그리고 침실 용도의 좁은 방 하나가 딸린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작은 집이었다. 하지만 의자 몇 개와 테이블 하나, 그리고 침대 하나를 제외하면 변변한 가구 하나 없는지라 텅 빈 집안은 휑덩그레하니 넓어 보이기만 했다.

  그 때 부엌에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늑대처럼 생긴 커다란 개 한 마리가 짖으며 달려 나왔다. 검은 털이 난 발끝을 제외하면 온통 흰색인 그 개는 왼쪽 눈가에 흉터가 있고 역시 왼쪽 귀가 심하게 찌부러져 있었다. 가까이 다가온 개가 얼굴을 마구 핥기 시작하자 프로스트는 인상을 찌푸렸다.

  “……임마. 하지마라. 악, 하지 마. 쥐 잡던 입으로 핥지 마라. 더럽다니까. 울프, 그만 둬……. 그래, 내가 바보지.”

  프로스트는 신음소리를 흘리며 똑바로 일어나 앉았다. 울프라고 불린 개는 앞쪽으로 돌아와 혀를 내밀고 헥헥거리며 꼬리를 흔들었다. 그는 개의 머리 위에 오른손을 얹고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울프. 뭐하고 놀았냐, 응? 쥐 많이 잡았냐? 고양이는. 덩치가 산만한 놈이 왜 고양이는 못 이기냐. 네가 그러고도 투견이냐? ……흠. 나 보고싶었냐?”

  자기 머리위에 놓인 프로스트의 손바닥을 향해 앞발을 휘적거리던 울프가 때 맞춰 컹 하고 짖자 그의 얼굴에는 어울리지 않는 선량한 웃음이 피어났다.

  “흠. 아부도 할 줄 아는데? 타이밍이 좋아. 원래 인생은 타이밍인거지. 아냐, 그거? ……좋아. 형이 오늘 돈 많이 벌었다. 형이 오늘 한 턱 쏜다.”

  그는 오른팔로 바닥을 짚고 힘겹게 일어나 느릿느릿 부엌으로 향했다. 발뒤꿈치를 물어뜯는 울프와 장난을 치며 걷던 그는 부엌에 들어서자마자 입을 쩍 벌리고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냉장고는 활짝 열어젖혀져 바깥으로 냉기를 뿜어내고 그 안에 있던 내용물들은 밖으로 끄집어져 쏟아져 나와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무엇인가가 먹어치운 듯 성한 음식이 별로 없는데다가 무엇보다도 영양 보충도 할 겸 큰맘 먹고 사놓은 훈제 돼지고기 덩어리가 사라져 버렸다. 프로스트는 그제서야 울프의 배가 띵띵하게 잔뜩 부풀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프로스트가 매서운 눈길로 울프를 노려보자 개는 고개를 돌리고 딴청을 피웠다.

  “이 놈이…… 용서할 수 없다!”
  “깨갱!”

  프로스트에게 두 눈을 손바닥으로 가린 후 머리를 좌우로 마구 흔드는 징벌을 당한 울프가 어지러움을 느끼고 비틀거리다 벽에 머리를 좀 짓찧는 대수롭지 않은 사건이 일어난 후에, 프로스트는 저녁 대용으로 합성 육포를 질겅거리며 옷을 벗기 시작했다. 먹을 것을 심하게 탐하는 울프가 이미 냉장고 속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서도 육포를 보며 침을 삼켰지만 40크레딧이나 주고 사온 진짜 고기를 입도 못 대보고 날려버려야 했던 그가 그리 쉽게 넘어가 줄 리는 없었다.

  프로스트는 옷을 다 벗은 후 붕대를 감은 허리에 방수포를 두르고 온수기를 켰다. 그리고 질겅거리던 육포를 개에게 던져주고는 화장실로 들어가 샤워기를 틀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물줄기가 어깨에 닿자 끔찍한 고통에 자신도 모르게 억눌린 신음소리가 이빨의 틈새를 비집고 새어나왔다. 베이고 찢긴 상처를 타고 물이 흘러내릴 때마다 상처에 소금물을 들이붓는 듯한 지독한 쓰라림이 전율처럼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온수기가 작동하기 시작하고 통증이 견딜만한 정도로 줄어들자 프로스트는 비누를 집어 온몸에 바르기 시작했다. 상처를 건드리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비누칠을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왼손잡이지만 왼팔을 다쳐 쓸 수가 없기에 익숙치 않은 오른손으로 몸을 닦다 보니 속도가 더욱 더뎠다.

  한참 만에 몸을 다 씻고 샤워기를 잠근 그는 화장실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핏기라고는 하나도 없이 시체처럼 창백한 피부와 그 위를 잔뜩 덮은 크고 작은 상처들. 닳고 닳아 탈색된 옷감처럼 색소가 다 빠져나간 듯한 하얀 머리카락. 그리고 악마에게나 어울릴 법한,피처럼 붉은 음산한 눈동자.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다. 지금까지 자신과 같은 모습을 한 사람을 한 번도 본적이 없었다. 국경의 변방에는 더 끔찍하게 생긴 이상 변이체들이 있다고 들었지만 그들은 어차피 인간으로 치지도 않는 존재들이니 얘기가 달랐다. 이 모습 덕분에 언제나 거리에 나가면 진귀한 구경거리가 되어야 했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졌지만 그래도 그런 시선을 받으면 기분이 나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는 왠지 거울을 부숴버리고 싶어지는 충동을 느끼며 화장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상처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수건으로 난폭하게 온몸의 물기를 닦아대었다.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육포를 입에 물고 드러누워 장난을 치던 울프가 무슨 일인가 싶어 귀를 쫑긋 새우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프로스트는 전혀 긴장감이 없는 그 모습을 멍하니 응시하다가 그냥 피식 웃어버렸다.


  쿵
  쿵
  무언가 단단하고 무거운 물체가 규칙적으로 부딪치는 소리다. 아마도 어딘가의 슬럼가 주변의 재건축 현장에서 나는 소리일 것이다. 강철의 파쇄구가 콘크리트 건물을 때려 부술 때 저런 소리가 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다. 어쨌든, 그게 어디가 되었건 무엇이 되었건 시끄럽고 성가신 소리일 뿐이다.

  몸이 이렇게 피곤한데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는다. 아마도 저 신경에 거슬리는 소리 때문일 것이다.

  드르렁
  프로스트는 눈동자만 돌려 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보고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발치에 곤히 잠들어 있는 울프가 내는 소리였다. 개 주제에 황당하게도 가르릉거리며 코를 골고 있다. 감히 무엄하게도 주인이 먹을 음식을 빼앗아 배를 가득 채우고는 세상에 근심걱정 하나 없는 모습으로 곤히 잠들어 있다. 그는 빙긋 웃으며 몸에 두른 모포를 좀 더 앞으로 끌어당겨 울프의 몸을 덮어 주었다.

  쿵
  쿵  
  프로스트는 고개를 돌려 오른쪽을 바라보았다. 의자 바로 오른쪽에 배치된 테이블 위에는 파타 한 짝이 놓여 있었다. 창문에서 들어오는 어슴푸레한 달빛에 반사된 파타의 검날이 하얗게 빛났다.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바로 손을 뻗어 집어들 수 있도록 가까이 놓아 둔 것이었다. 바로 곁에는 무기가 있고 지금 앉아 있는 의자는 사각이 최소화되는 방의 구석에 붙여 두었으며 현관문에는 다섯 개의 자물쇠와 그 밖의 몇 가지 안전장치가 설치되어 있다. 불안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왜 이렇게 잠이 오지 않는 것일까.

  프로스트는 애써 잠을 청하기를 포기하고 허리를 당겨 의자에 편히 앉았다. 몸이 물 젖은 솜처럼 피곤한데도 정신만은 투명한 얼음처럼 맑다. 아마도 오늘의 격투로 곤두선 신경이 평온한 지금의 상황에 적응을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생사가 걸린 격투였는데, 어쩌면 이렇게 잠이 안오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닐까.

  쿵
  쿵
  이런저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공사장의 발파음은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처음에는 귀에 거슬리던 소리가 이제는 심장이 뛰는 소리처럼 친숙하게 느껴진다. 마치 맥박이 저 소리에 맞춰 뛰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아무 생각도 없이 텅 빈 허공을 초점없이 바라본다. 머리 속을 맴돌던 이런저런 생각들이 물에 떨어뜨린 잉크 방울처럼 퍼져 사라져 간다. 창으로 들어온 달빛이 산란되어 벽지의 무늬가 춤을 추는 것처럼 느껴진다. 세상이 가만히 흔들리고 있다. 눈을 계속 뜨고 있는데도 이상하게도 아프지 않다. 동공이 확장된다. 소리. 크다. 소리. 작다. 세상. 조용하다. 세상. 시끄럽다. 여기에는 아무 것도 없다.

  고요하다.
  아프다.
  쉬고 싶다.


  쿵
  쿵
  쿵
  쿵


  -쿵!
  철퇴에 정통으로 얻어맞은 프로스트의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뒤늦게 위험을 인지한 그가 날아오는 철퇴의 궤도를 파악하고 재빨리 복부에 파타의 갑주 부위를 엇갈아 대었지만 그것만으로 300킬로그램의 몸무게에서 뿜어져 나오는 충격력을 상쇄해 버릴 수는 없었다.

  프로스트는 허공을 몇 미터나 날아 큐브의 철창에 부딪쳐 쇠창살에 등을 긁히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말의 뒷발질에 배를 걷어차인 듯한 고통에 잠시 동안은 숨을 들이킬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고통을 인지할 틈도 없이 황급히 옆으로 몸을 굴렸다. 그 순간 방금 전까지 프로스트가 쓰러져 있던 자리의 콘크리트 바닥이 움푹 파이며 돌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프로스트를 후려치고 그대로 달려온 저거노트가 재차 프로스트를 향해 철퇴를 내리찍은 것이었다. 폭발에 휩쓸린 파편처럼 비산한 콘크리트 조각들이 프로스트의 창백한 피부를 긁으며 스쳐지나갔다.

  저거노트는 맨땅을 후려친 철퇴를 위로 끌어올렸다. 적이 쓰러진 이상 제대로 맞출 때까지 계속 철퇴를 휘두르겠다는 의미가 틀림없었다. 여기에서 철퇴를 들어올리도록 허용한다면 다시는 공세로 전환할 수 없다. 이것을 직감한 프로스트는 쓰러진 상태 그대로 왼손의 파타를 뻗어 수평으로 빠르게 그어버렸다.

  “크으윽!”

  파타의 손잡이를 통해 익숙한 감촉이 전해져왔다. 칼날이 단단한 갑주와 질긴 천을 뚫고 들어가 연한 살갗을 찢어발기는 감촉. 부어오른 왼쪽 눈두덩 때문에 시야가 제대로 잡히지 않았지만 저거노트의 신음소리 덕분에 방금의 공격이 그에게 작지 않은 상처를 입혔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프로스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몸을 튕겨 일어났다. 적이 오른쪽 종아리에서 피를 흘리며 비틀비틀 뒤로 물러나는 모습이 보였다. 두 번 다시 만들어내기 힘들 역전의 기회였다.

  그는 상대를 향해 폭발하듯 뛰쳐나갔다.

  준비동작이 전혀 없는 난폭한 움직임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복부와 오른쪽 무릎에서 정신이 아득해질 만한 통증이 엄습했지만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파타의 손잡이를 꽉 쥔 채 앞으로 내달았다. 파타의 칼날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도달한 프로스트는 오른 다리를 쭉 벋어 버팀목처럼 강하게 바닥에 내리꽂았다. 그리고 허벅지 근육에 힘을 주고 그 반동으로 허리를 튕겨 앞으로 길게 숙이며 양손의 파타를 번개처럼 내찔렀다.

  살의를 머금은 두 개의 날카로운 칼날이 앞을 막아선 공기의 벽을 찢어발기며 적의 몸을 향해 쇄도했다. 저거노트는 시시각각 날아드는 칼날을 보며 황급히 몸을 뒤틀었다.

  -카가각
  금속이 금속을 관통하는 날카롭고 소름끼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곤두선 감각에 전해져오는 충돌의 감촉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미약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프로스트는 검날이 상대의 몸통이 아니라 왼팔의 갑옷을 뚫고 박혀있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혼신의 일격이 치명상을 입히는 데에 실패했다는 의미였다.

  제대로 보이지 않는 왼쪽 눈 때문에 공격의 방향이 어긋나 버렸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저거노트는 왼팔에 파타의 검극을 꽂은 채로 통나무처럼 굵은 다리를 들어 프로스트의 복부를 걷어 차왔다.

  몸을 비틀어 빼보려 해도 저거노트의 단단한 근육에 물린 칼날은 쉽사리 빠지지 않았다. 당했다. 피할 수가 없다.

  -빠각!

  “끄윽!”

  오른쪽 무릎에서 해머로 내리찍은 듯한 충격이 퍼져나갔다. 반쯤 부서져 너덜거리던 무릎보호대가 터져나가며 다리를 역으로 꺾어 버린 것 같은 고통이 전류처럼 신경을 타고 흘렀다.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여 복부를 걷어차이는 것만은 간신히 피했지만 대신 이미 한번 철퇴에 찍혔던 오른쪽 무릎을 고스란히 내주어야만 했다.

  저거노트의 팔이 크게 뒤로 젖혀지는 것이 보였다. 마비된 무릎 때문에 철퇴의 리치 밖으로 회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떻게든 막고 버티는 수 밖에 없다. 왼쪽에서 날아온다. 타격점은? 머리? 배? 다리?

  프로스트는 머리를 향해 날아드는 철퇴의 궤적을 눈치 채고 왼팔을 굽혀 파타의 갑주부를 귀 옆에 바짝 가져다 댔다. 조금이라도 충격이 분산되기를 바라며 파타를 비스듬히 비껴 세웠다. 그리고는 온몸에 단단히 힘을 주고 다가올 충격에 대비했다.

  -카-가-강!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강철덩어리가 팔꿈치 바로 아래 부분을 후려쳤다. 파타가 우그러지는 소리와 함께 뼈에 금이 갈 때 느껴지는 특유의 섬찟한 통증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하지만 프로스트는 뼈에서부터 전해져오는 아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머리를 지렛대처럼 사용하여 팔꿈치를 위로 들어올렸다. 날아오는 관성을 이기지 못한 철퇴가 레일을 따라 달리는 열차처럼 파타의 몸통부위를 타고 기어올랐다. 이윽고 프로스트의 머릿 거죽을 살짝 스친 쇠 덩어리가 머리 위로 비스듬히 세워진 검날을 따라 공중으로 날아올랐고 상대의 몸이 철퇴와 함께 반쯤 돌아버렸다. 프로스트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등을 보인 적을 향해 자유로운 오른팔을 휘둘렀다.

  -카-앙!
  하지만 파타의 블레이드는 저거노트의 등갑을 뚫지 못하고 힘없이 튕겨 나왔다. 엉거주춤한 자세에서 맥없이 뻗은 검격은 고장력강 플레이트 메일을 관통하기에는 한참이나 힘이 모자랐다.

  그러나 노련한 검투사인 저거노트는 격투 중에 적에게 등을 보이는 것은 자살 행위와도 같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등갑에 칼날이 스치는 소리에 크게 놀라 황급히 뒷걸음질쳤다. 덕분에 실질적으로 전투불능 상태에 빠진 것이나 다름없었던 프로스트 역시 물러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프로스트는 파타를 지팡이처럼 사용해 땅을 짚고 오른발을 질질 끌면서 물러났다. 마치 장애인이 목발을 짚고 걷는 듯한 그 모습에 관중석에서 폭소가 터져 나왔지만 아까부터 싸움에 몰두해 관중들의 고함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고 있던 프로스트는 그것을 깨달을 수가 없었다.

  한참의 거리를 두고 마주선 두 검투사 사이에 기묘한 정적이 흘렀다. 저거노트는 연속되는 격렬한 전투로 체력을 너무 많이 소진해 버렸기 때문에 잠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처럼 거대한 체구를 가진 사람이 0.1톤이 넘어가는 중장갑옷을 입고 계속 움직인다는 것은 그가 비록 강화인간에 가깝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상당한 체력을 소모하는 일이다. 게다가 느리고 강력한 일격을 주고 받는 헤비급의 격투에 익숙한 그에게 있어 민첩합을 살린 날카로운 공격을 퍼붓는 프로스트는 아무래도 페이스를 심각하게 어긋나게 만드는 적일 수밖에 없었다.

  반면 프로스트는 지금까지 받은 충격이 누적되어 신체가 너무 큰 데미지를 입었기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변변한 보호 장구도 없이 적의 둔중한 공격을 계속 받아 내다보니 제대로 움직일 수 조차 없을 정도로 몸의 안팎이 모두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다.

  ‘침착, 침착, 침착해라. 그리고 생각해라. 시간이 없다. 대치상태는 곧 끝난다. 어떻게든 방법을 생각해 내지 않으면…….’

  프로스트는 필사적으로 현재의 상황을 정리해보려 애썼다. 이대로 간다면 반드시 질 수밖에 없다. 왼쪽눈이 제대로 보이지 않으니 거리를 정확히 잡을 수 없고 왼팔 또한 뼈를 다친 것이 분명하니 왼손잡이로서는 치명적인 리스크다. 게다가 오른쪽 무릎 역시 충격으로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는데다가 그 외의 자잘한 상처들은 셀 수가 없을 정도다.

  하지만 상대는 왼팔이 관통당한 것을 제외하면 별다른 피해를 받은 것이 없다. 한쪽 종아리를 베인 것이 분명하나 그것이 치명상일지는 미지수다. 지금 그가 물러서서 숨을 고르고 있는 것만 해도 등을 공격했기 때문에 반사적으로 물러난 것에 가까우며 이것은 쉽사리 생기지 않는 행운이다.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으니 선제공격이 불가능하고 날아드는 철퇴를 피하는 것도 힘들다. 눈을 다쳐 거리 감각이 엉망인데다가 오른팔 밖에 쓸 수 없으니 설사 기회가 오더라도 적의 갑주를 뚫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나마 낮은 성공률을 최대한 끌어올리려면 상대의 움직임을 봉쇄하고 최대한 장갑이 얇은 부위를 노리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방법은 카운터뿐이다. 처음 한방을 어떻게든 버티고 강력한 역습을 먹인다. 적 역시 한쪽 팔을 다친 만큼 공격 직후에 바로 후속타가 들어오지는 않을 테니 그 틈을 노린다.

    마음을 굳힌 프로스트는 숨을 길게 들이마시고 온몸의 근육을 바짝 긴장시켰다. 상대 역시 잠시간의 암묵적인 휴식을 통해 소진되었던 체력을 어느 정도 되찾았는지 보다 안정된 걸음걸이로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저거노트는 자신이 상대에 비해 훨씬 더 유리한 입장에 서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역시 다리를 베였기 때문인지 발걸음은 느리고 신중했지만 몸짓 어디에선가 숨길 수 없는 자신감이 느껴졌다.

  저거노트는 상대로부터 적당히 떨어진 거리에 멈추어 서서 천천히 철퇴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상하로 완만한 원을 그리며 돌기 시작한 철퇴에 점점 속력이 붙기 시작하더니 곧 지면과 수직으로 서서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는 거대한 강철의 수레바퀴가 생겨났다.

  프로스트는 숨을 멈춘 채 마른침을 삼키며 철퇴를 돌리는 적의 팔이 점점 치켜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마에 가득 맺힌 식은땀이 콧날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윽고 강철 원의 상승이 최고조에 이르렀다고 생각한 순간, 철퇴는 회전하는 원의 궤적에서 튕겨져 나와 무서운 속도로 떨어져 내렸다. 엄청난 힘을 실은 강철덩어리가 바람을 잡아 찢으며 머리위로 쇄도해왔다.

  프로스트의 피부에 소름이 돋아났다. 정통으로 맞으면 끝장이었다. 프로스트는 왼쪽의 파타를 머리위로 비껴 세운후 오른팔을 왼팔의 파타에 열십자로 붙였다. 몸을 최대한 비틀어 철퇴가 내리찍히는 중심선에서 벗어나면서, 온몸의 근육을 단단히 굳히고 다가올 충격에 대비했다. 바로 머리 위까지 다가온 흑철색의 그림자가 시야를 완전히 가렸다.

  철퇴는 검날의 뿌리 부분에 떨어졌다. 갑주와 검날의 연결부가 종잇장처럼 우그러졌다. 뿌드득 하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왼팔이 부러져버렸다. 끔찍한 통증에 눈앞이 하얗게 변했지만 이를 부숴저라 악물며 왼팔을 지탱한 오른팔을 치켜들었다. 둥그런 철퇴가 비스듬히 세워진 파타의 겉면을 따라 미끌어져 내렸다. 내리치던 힘이 있어 저거노트는 철퇴를 중간에 회수할 수가 없었다.

  팔꿈치 보호대를 짓이기며 떨어진 쇠덩어리가 엄청난 소리와 함께 쏘아진 대포알처럼 바닥에 틀어박혔다.

  저거노트는 있는 힘을 다해 단단한 바닥을 후려친 충격으로 잠시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그 틈을 이용하여 프로스트는 부러진 왼팔을 힘겹게 놀려 철퇴에 연결된 쇠사슬을 휘감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상대가 쇠사슬을 마주 잡아당기기 시작했을 때 철퇴는 이미 프로스트의 팔과 허리 근육 사이에 끼어버린 후였다. 무기를 상대에게 잡힌 채 무익한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그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완벽하게 움직임이 고정되었다.

  프로스트는 쇠사슬에 쓸려 허리의 피부가 벗겨져나가는 것을 무시하며 상대의 안면을 향해 오른손을 내질렀다.

  검날이 날카롭게 공간을 잘라내며 헬멧의 바이저(visor)로 빨려 들어갔다. 혼신의 힘이 담긴 일격은 적의 확장된 동공 사이를 자르고 뇌수 속으로 파고들어 머리뼈와 헬멧의 뒷부분을 연이어 관통한 다음에야 멈춰 섰다.

  저거노트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듯한 눈길로 프로스트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파타를 타고 피가 방울져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한 방울, 두 방울 갑주부에 맺힌 피가 후두둑거리며 아래로 떨어져내려 마른 바닥을 금새 붉게 물들였다. 벌어진 이마의 틈으로 조금씩 새어나오던 핏줄기는 순식간에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피보라로 변했다. 프로스트가 팔을 기울여 천천히 칼날을 뽑아 내자 그의 몸은 서서히 뒤로 무너져 내렸다. 갑옷이 바닥에 부딪치는 둔중한 소리와 함께 그가 쓰러진 자리 주변에 마른 먼지가 가득 피어올랐다. 마치 고목이 넘어지는 듯한 육중한 움직임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고막이 상하지나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소란스럽던 장내가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한사람은 서 있고 또 한사람은 쓰러진 가운데 콜로세움에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기막힌 정적만이 맴돌았다.

   프로스트는 팔로 눈가에 묻은 피를 스윽 문질러 닦았다. 그리고는 묵묵히 고개를 들어 사회자를 응시했다. 방금 전에 저거노트가 뿜어낸 피 안개를 그대로 뒤집어썼기에 새하얀 머리카락과 피부에 온통 피 칠갑을 한 그 모습은 마치 지옥에서 막 기어 올라온 악귀처럼 끔찍했다.

  한참 동안이나 저거노트의 시체를 멍하니 바라보며 믿을 수 없는 결과에 경악하던 사회자는 뒤늦게 프로스트의 시선을 알아차리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는 곧 무엇인가에 쫓기는 것처럼 황급히 두 팔을 치켜들고 소리 높여 외쳤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프, 프로스트의, 승리!”

  승자에게 주어지는 화려한 세레모니의 영광은 없었다. 환호도, 축하도 없었다. 그저 경악과 증오를 담은 불쾌한 침묵만이 콜로세움 안을 맴돌 뿐이었다.

  사방을 구속하고 있던 강철의 큐브가 들려올라갔다. 프로스트는 말없이 열린 엘리베이터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한쪽의 파타를 지팡이처럼 짚고 발을 절룩거리며 걷는 모습이 동정심을 불러일으킬 만도 했지만 그 모습에서 불쌍함을 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이윽고 관중들이 하나 둘 집단적 충격 상태에서 깨어나 야유를 퍼붓기 시작했다. 술렁임은 순식간에 퍼져나가고, 또다시 욕과 쓰레기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투기장은 경기 초반의 소음도를 금세 회복한 것 같았다.

  프로스트는 이 모든 것에 귀찮음을 느꼈다. 도대체 뭐라고 떠들어대고 있는 것일까. 피를 너무 많이 흘렸는지 그저 웅웅거리는 소리로 들릴 뿐이었다.

  몸 이곳저곳에 떨어져 내리는 쓰레기들은 맞아봐야 별로 아플 것도 없다. 너무 많이 얻어맞아서 감각이 좀 이상해진 듯도 싶었다. 그저 빗방울이 몸을 때리는 것처럼 느껴질 뿐 아무렇지도 않다.

  제멋대로 움직이는 발이 토마토로 보이는 물체를 밟고 미끄러졌다. 발을 따라 몸이 공중으로 붕 떴다가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누군가 뒤통수를 되게 후려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웅웅거리는 웃음 소리가 조금 커진 것 같았다. 피식 하고 웃음이 새어나온다. 화는 나지 않았다. 너희들이 뭐라고 하건 이 게임에서 이긴 사람은 나다. 돈을 딴 사람도 나다. 무엇보다도, 또 한번 살아남은 사람은 나다. 나는 승리자다. 그는 속으로 웅얼거렸다.

  프로스트는 몸을 일으켜 다시 묵묵히 걷기 시작했다. 멀게만 보이던 엘리베이터의 실루엣이 조금씩 커졌다. 철문이 손에 닿을 정도로 다가 왔을때, 그는 뭔가 이질적인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예쁜 아이군.’

  따뜻해 보이는 노란 스웨터를 입은 계집아이였다. 자리에서 일어서 있었지만 키가 작은지 보이는 것은 상체뿐이었다. 조그만 두손을 가슴 앞에 모아 쥔 모습이 귀엽게 느껴졌다. 까만 단발머리에 커다란 까만 눈동자. 어린 사슴의 그것처럼 예쁜 눈망울이었다. 그 눈가에서 반짝이는 것은…… 눈물? 그는 자신이 잘못 봤으리라 믿었다. 아이의 얼굴도 흔들려 보이는 판이니 눈물 같은 것을 알아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보내오는 눈빛이 분명히 주위의 다른 사람들의 그것과는 달랐다. 질시와 야유, 증오와 분노가 아닌 뭔가 훨씬 더 따스하고 슬픈, 어떤 애처로운 느낌. 혹시, 동정인가?

  프로스트는 자신의 망상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동정 같은 것일 리가 없다. 그런 다정다감한 감정 같은 것은 자신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어쩌면 죽은 상대의 가족이나 뭐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가족의 죽음에 슬퍼하고 있는 것일 게다. 쓰러진 적을 향한 시선을 자신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섰다. 철문이 양쪽에서 천천히 닫히고, 그는 서서히 강철 상자 안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엘리베이터가 지면에서 사라지고 투기장에는 저거노트의 시체만 덩그라니 남았다. 그의 확장된 동공은 다시는 볼 수 없게 된 어두운 하늘을 향해 열려 있었다. 구름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보름달이 검투사의 망막에 노랗게 맺혔다.
Everything is clearer now Life is just a dream, you know That's never ending. I'm ascen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