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벰버 레인(November Rain) - 작가 : 광풍선생(violentgale)
글 수 67
“정말이지 의사를 힘들게 만드는 놈이로군, 너는.”
“쓸데……없는 소리 하지마, 영감. 끄윽!”
영감, 영감이라. 머리가 하얗게 센 덩치 큰 남자가 묵묵히 프로스트의 팔에 묶던 붕대의 끝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프로스트는 숨막히는 신음소리를 흘렸다. 잠시 후 끔찍한 통증의 여진에서 벗어난 그가 힘겨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젠……장. 내가, 지금 장난 받아줄 만한 상태로 보여?”
“두 번도 해줄 수 있다네. 내가 어디로 봐서 영감인가 영감은. 아직은 충분히 나이스 미들이라네.”
하얀 가운을 입은 중년의 사내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확실히 그에게 영감이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았다. 사내의 머리카락은 완전히 하얗게 세어 있었지만 그의 몸은 마치 보디빌더를 연상시킬 정도로 크고 탄탄했기 때문에, 도저히 중년 이상의 나이로는 볼 수가 없었다. 큰 체격과 넓은 어깨, 각진 사각턱과 거칠어 보이는 인상 때문에 그는 의사라기보다는 차라리 폭력조직의 보스라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릴 것 같았다. 어째서 저렇게 막되먹게 생긴 인간이 의사 일을 하고 있는 건지. 프로스트는 쓴웃음을 지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은 병원이다. 다치거나 아픈 환자를 치료하는 곳이 병원이라면 여기는 분명히 병원이고 그 환자를 치료하는 사람이 의사라면 분명히 피묻은 흰 가운을 걸친 중년의 남성이 의사다. 하지만 조금 다른 것이 있다면 이 병원은 허가가 나지 않은 무허가 병원이고 이 의사는 면허가 없는 무허가 의사라는 것 정도다. 즉, 흔히 이야기하는 야매 의사다.
물론 프로스트가 시민이었다면 진짜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았을 터이지만 시민권이 없는 그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의료보험은 시민권자에게만 주어진다. 보험이 적용되지 않은 의료비는 엄청나게 비쌀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병원에서는 크리퍼를 치료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절대 다수의 가난한 크리퍼들은 아예 병원에 가지 않고 집에서 끙끙 앓거나, 아니면 무허가 병원을 이용할 수 밖에 없었다. 일반인보다 수십 배는 자주 병원 신세를 져야 하는 프로스트 역시 이 점에서는 어쩔 수 없는 크리퍼였다.
여기는 무허가 병원 중에서도 외과를 전문으로 하는 곳이기 때문에 평소에는 환자가 많지 않았다. 다만 군소 조직간의 항쟁이나 양아치들 간의 패싸움이 일어났을 때에는 그야말로 이곳저곳이 부러지고 피칠갑을 한 장정들로 발 디딜 틈도 없는 곳이 되어 버렸지만 말이다. 그리고 외과의 특성상 보통 여기에 오는 환자들은 비시민권자들 중에서도 상당히 거칠고, 또 비정상적인 -물론 크리퍼의 삶에서도 정상적인 삶의 형태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삶을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의 주 업무 시간은 주로 야간이었다. 주간에 일을 하는 사람들은 일을 마친 오후 늦게나 자유 시간이 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야간에 일을 하는 이들은 일을 마친 아침에서 낮 정도의 시간대에야 짬을 내어 병원에 갈 수가 있었다. 그래서 오후 일곱 시가 좀 넘은 늦은 시각인 지금 이 병원에 있는 환자는 프로스트 뿐이었다.
프로스트는 전신을 타고 흐르는 은은한 진통에 눈을 찌푸리며 자신의 몸 이곳저곳을 훑어 보았다. 크고 작은 상처. 혹은 오래된 상처와 새로운 상처. 부러진 왼팔에는 깁스를 했고 어깨 가까이의 상처에는 붕대를 감았다. 둔기에 얻어맞은 오른팔은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다. 심한 타박상에 오른쪽 허벅지 위에서부터 블랙진이 너덜너덜하게 뜯겨져 나갔으며 무릎에 매어 두었던 철제 보호대는 완전히 으스러져 덜렁거리고 있다. 쇠사슬에 쓸린 허리깨에는 불에 데인 듯한 흔적이 남아 허리를 구부릴 때마다 쓰라림이 온몸으로 퍼지고 찢긴 왼쪽 눈두덩이 부어올라 제대로 눈을 뜨기도 힘들다. 그 외의 수많은 자잘한 상처에는 노란 활성호르몬제들이 덕지덕지 발라져 있다. 한마디로, 엉망진창이었다.
치료가 대충 끝났는지 의사는 몸을 뒤로 젖혀 의자에 기대며 담배를 빼물었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숨을 깊게 들이쉬자 담뱃불이 빨갛게 타들어갔다. 그렇게 한참 동안 멍하니 허공에 퍼지는 담배 연기를 응시하던 의사는 길게 연기를 내뿜으며 입을 열었다.
“정말이지 하루도 성한 날이 없군, 자네는.”
“…….”
“이번엔 그래도 운이 좋았어. 지독하게 두들겨 맞았는데도 운좋게 치명상은 다 피했더군. 살아 있는 것이 용할 정도야.
왼팔은 부러졌지만 뼈가 으스러지진 않았으니 제대로 붙일 수 있고 오른쪽 무릎은 예상과는 달리 심한 타박상 정도다. 복부도 장파열은 피했어. 피하출혈이 심각해서 당분간 허리는 못 쓰겠지만. 허리를 조금만 굽혀도 아마 죽고 싶도록 아플 걸?”
“…….”
“분명히 분열활성화제도 잘 듣고 회복력도 좋아. 쓸만한 유전자에 튼튼한 몸이야. 그건 나도 인정하지. 하지만 세포분열이 활성화될 수록 수명은 줄어들고 신체가 입은 충격은 누적될 뿐 좀처럼 사라지지 않아. 이미 여러번 이야기 했을텐데.”
프로스트는 고개를 돌려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하든지 관심이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러나 이런 태도에는 익숙한지 의사는 주름진 눈꺼풀을 조금 찡그릴 뿐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난 이 바닥에 오래 있었다. 밑바닥의 인간들은 많이 다칠 수 밖에 없지. 먹고 사는 것 자체가 전쟁이니까. 검투사 같은 직업을 가졌다면 말할 것도 없지. 하지만…….”
프로스트는 그를 표정 없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말끝을 흐리던 의사는 빠른 어투로 말을 이었다.
“……몸을 함부로 굴리는 놈일수록 빨리 죽더군. 이것은 15년 동안 두 눈으로 보아온 진리야. 너보다 훨씬 강하고 맷집이 좋은 녀석도 많이 봤다. 하지만 자기 몸을 함부로 굴리는 녀석 치고 오래 사는 꼴은 못 봤다.”
“……그래서?”
“너는 너무 몸을 막 굴려. 아마 요 두 달 동안에 최소한 열 댓번은 여기에 찾아왔을 걸. 내가 아는 가장 험악하게 사는 녀석들도 그렇게 자주 몸을 망가뜨리지는 않아. 애초에 일주일에 한 번 이상 투기장에 선다는 것 자체가 자살행위야. 검투사에게는 기본적인 상식일텐데. 지난 번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새로운 상처를 한가득 만들어서 날 찾아오더군. 도대체 왜 그렇게 죽기살기로 싸워대는 겐가?”
“별거 없어. 돈 때문이지.”
프로스트가 부러진 왼팔의 주먹을 쥐어보려 노력하며 말했다. 머릿속이 온통 하얗게 변하는 듯한 고통을 참으며 손의 근육을 아무리 긴장시켜도 주먹이 쥐어지지는 않는다. 부러진 뼈가 아직 붙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남자는 그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는 것을 응시하면서 물었다.
“그래? 이름이 유명해졌으니 대전료도 꽤 짭짤할 텐데. 크리퍼치고 그만큼 받는 검투사는 별로 없지. 그렇게 모아서 어디에 쓰려는 거지? 뭔가 돈이 나갈 곳이라도 있는 겐가?”
프로스트는 아무 대꾸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깁스를 감은 왼팔 때문에 제대로 꿸 수 없는 검은 비닐 코트에 오른팔만을 간신히 밀어넣고 나머지를 어깨 위로 대충 걸쳤다. 그리고 강철제 기타케이스를 집어들고 다리를 끌면서 문가로 다가갔다.
“얼마지?”
“……50크레딧. 거기에 있는 약 가져가. 어떻게 쓰는 건지는 말 안해도 알지? 그리고 담배 피지 마. 몸에 나빠.”
“당신도 피잖아.”
“난 의사니까 괜찮아.”
프로스트는 앞뒤가 안 맞는 그의 말에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비교적 멀쩡한 오른손으로 꾸깃꾸깃한 지폐 뭉치를 꺼내어 몇 장을 집어 옆의 선반에 내려놓은 다음 약 봉지를 집어들었다. 약 봉지를 깁스를 해 ㄴ자로 기울인 왼팔 위에 대충 올려두고 오른팔로 기타케이스를 힘겹게 들어올렸다. 양손에 모두 물건을 들어 손으로 문을 열 수가 없자 그는 발로 현관문을 밀고는 문 밖으로 사라졌다.
방안에 혼자 남은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의 남자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애꿎은 담배만 뻑뻑 빨아대고 있었다.
프로스트는 왼발을 조금 끌면서 절룩거리며 걷고 있었다. 다친 무릎 아래가 부들부들 떨려서 제대로 걷기가 힘들었다. 허리와 왼팔에 한 깁스 때문에 움직임이 고정되어 걸음을 옮길 때마다 거북한 느낌이 왔다. 파타 한쌍을 집어넣은 철제 기타 케이스는 내용물을 합쳐 무게가 20키로그램은 간단히 넘어갔기에 팔이 자꾸만 축 쳐져 내려갔다.
프로스트는 벙커-감마 거리를 걷고 있었다. 왜 이런 이름이 붙었는지 아무도 모르는 이 거리는 시내의 일부이기에 비교적 깨끗하고 번화한 곳이었다. 그런 만큼 여기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대부분 시민들일 뿐 크리퍼는 거의 없었다.
행인들의 시선이 힐끔힐끔 그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어떤 이들은 시내에 크리퍼가 돌아다니는 꼴이 못마땅하다는 듯 노골적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군데군데 찢어진 낡은 검은색 비닐 코트에 이곳저곳에 친친 감은 붕대, 그리고 성한 곳을 찾아보기가 더 힘들 정도로 많은 상처들과 얼룩덜룩한 핏자국들. 그리고 폐병 환자보다도 더 창백한 하얀 얼굴. 사람들의 주의를 끌어 모으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질 정도의 참으로 볼 만한 행색이었으나 그 모습에서 풍기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 때문인지 정면으로 시비를 걸어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힘겹게 걷고 있는 프로스트의 눈에 極東銀行이라고 세겨진 커다란 간판이 달린 건물이 보였다. 그 글자 아래 작게 ‘극동은행’이라는 한글이 씌어져 있었으나 글을 잘 모르는 그에게는 한자건 한글이건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건물의 1층 유리창에는 아마도 광고일 것이 분명한 종이 포스터가 여러 장 붙어 있었으나 이 역시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극동은행은 야쿠자가 경영하는 금융기관이었다. 번지르르한 외관만 봐서는 보통의 은행과 별 다를 것이 없지만 그 업무에 있어서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은행에서 돈을 빌릴 만한 신용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고리대금업이나 신체담보 대출, 가능한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한 부채회수대행업 따위가 이 은행에서 주로 취급하는 일이었다.
비시민을 위한 저축 서비스 역시 이 은행의 주요 업무 중 하나였다. 예금을 하면 이자를 얹어 주기는커녕 오히려 상당 액수의 보관료를 받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은행에 돈을 맡기는 크리퍼의 수는 결코 적지 않았다. 비시민권자는 금융 기관의 이용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만약 돈을 안전하게 보관하고 싶다면 어쩔 수 없이 시(市)의 묵인 하에 운영되는 이런 불법금융기관을 이용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하루하루를 살아가기에도 급급한 많은 크리퍼들에게는 잃어버릴 만한 돈조차 없었지만. 그런 면에서 저축을 위해 여기를 자주 이용하는 프로스트는 그나마 부유한 크리퍼인 셈이었다.
프로스트는 어깨로 정면의 유리문을 밀고 들어섰다. ‘대시민 대출 영업부’라고 적힌 팻말이 붙은 철문 옆에는 험악한 인상의 사내 두명이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여기는 주로 시민을 대상으로 한 고리대금업을 수행하는 곳이다. 프로스트는 이곳에는 용건이 없었기에 관심을 두지 않고 계단으로 향했다. 크리퍼를에게 현금 보관 서비스를 제공하는 부서는 5층에 있었고, 당연히 저금을 하려면 5층까지 계단으로 걸어 올라가야만 했다. 프로스트는 묵묵히 계단을 하나하나 올라가기 시작했다.
드디어 5층에 도달했을 때, 프로스트의 이마는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제대로 걷기도 힘든 다리로 무리를 한 그는 벽에 기대어 한참 동안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시멘트의 차가움에 날뛰던 심장이 어느정도 잦아들자 프로스트는 ‘대 비시민 행복저축 사업부’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넓은 곳이었다. 한쪽에는 쇠창살로 막힌 여섯 개의 창구가 있었지만 늦은 시간이기 때문인지 직원이 있는 창구는 하나뿐이었다. 나머지 빈 공간에는 몇 가지 신청서가 비치되어 있는 테이블 두 개와 가지런히 놓여 있는 여러 개의 긴 의자가 있었다. 바닥과 벽은 언제 청소를 했을지 의심스러워질 정도로 지저분했으며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하게 빛나는 사무용 집기들은 코팅이라도 한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야말로 비시민권자의 위상을 대변해 준다고 할만한 장소였다.
늦은 시간이라서 그런지 다행히 사람은 많지 않았다. 자기까지 포함해도 이곳에 있는 크리퍼는 다섯 뿐이었다. 프로스트가 들어서자 잠시 시선을 돌렸던 그들은 곧 낯선 자에게서 관심을 끊고 자신들의 피로와 우울 속으로 되돌아갔다.
프로스트는 테이블로 다가가 엷은 빨간색 선이 그려져 있는 종이조각을 하나 집어들었다. 빨간 종이는 돈을 넣는 것, 파란 종이는 돈을 꺼내는 것. 잊지 않기 위해 몇 번이나 되뇌었기에 그는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코트 안주머니에서 싸구려 볼펜을 꺼내어 기억대로 종이의 빈칸을 채워 나갔다.
첫 번째 칸은 왼쪽 글자에 동그라미. 두 번째 칸은 오른쪽에 동그라미. 세 번째는 글자를 써야 하지만 글을 모르니 일단 비우고, 네 번째는 넣어야 할 돈의 액수를 숫자로 채운다. 9와 5 그리고 0이 하나, 둘, 셋…… 세 개. 다음칸은 계좌번호. 재킷에서 꼬깃꼬깃한 수첩을 꺼내어 한자 한자 옮겨 적는다. 마지막 칸은 이름. 수첩 맨 앞페이지에 적어둔 자신의 이름을 손에 힘을 자뜩 주고 배껴 ‘그린다’. 이 이름은 몇 년 전 어느 도시의 의사에게 부탁하여 적어 둔 것이었다.
프로스트는 자신이 완성한 예금 신청서를 바라보았다. 다섯 살짜리 시민 어린아이라도 그것보다는 잘 쓸 것 같은 삐뚤빼뚤한 글씨였지만 그는 그저 귀찮고 짜증나는 작업을 마쳤다는 것에 안도할 뿐이었다.
프로스트는 번호표를 뽑아들고 구석 가까이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저 앉는다는 단순한 행동도 몸의 상태에 따라서는 몹시 힘겨울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저분한 실내와 마찬가지로 긴 의자 위에 띄엄띄엄 흩어져 앉아 있는 크리퍼들의 행색은 남루하기 그지 없었다. 몇칸 건너 옆자리에 앉아 있는 남자는 분명 어느 공사 현장인가의 노동자로 보인다. 남자의 바지와 점퍼에는 시멘트 반죽일듯한 회색 얼룩이 지저분하게 묻어 있었다. 머리카락과 얼굴에도 역시 회색 먼지가 엉겨붙어 있어 한층 더 늙어 보이는 그는 몹시 피곤한지 의자에 비스듬히 등을 기대고 고개를 푹 수그린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저 앞에서 투정을 부리는 어린아이를 달래고 있는 젊은 여자는 싸늘한 늦가을에 걸맞지 않게 몹시 추워보이는 옷을 입고 있다. 아마도 하루하루 몸을 팔아 삶을 연명하는 거리의 매춘부일 것이다. 그 삶에는 저 아이의 생계 역시 포함되어 있겠지, 하고 프로스트는 생각했다. 아무리 짙게 화장을 해도 눈가에 묻어 있는 짙은 피로까지 감출 수는 없다.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여자의 몸짓에는 그녀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힘겨움이 엿보였다.
생각이 거기까지 진행되었을 때 창구 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834번 손님, 1번 창구로 오세요.”
프로스트는 그것이 자신이 가진 대기표의 번호임을 확인하고는 창구로 다가가 여직원에게 빨간 종이쪽지와 통장, 그리고 돈 한 무더기를 내밀었다. 지루한 얼굴을 한 그녀는 그것을 스윽 훑어보더니 종이를 프로스트에게 도로 내밀었다.
“거기 글자로 금액 쓰는 데가 비었잖아요. 구만 오천이라고 써와요.”
“나는 글을 잘 모르는데. 대신 써주면 좋겠어.”
여직원은 잠시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앞에 서 있는 남자의 얼굴을 쳐다보았지만 상처 투성이인 그의 심상치 않은 인상을 보고는 황급히 눈을 내리깔고 빈칸을 직접 채워나갔다. 그리고는 얼마간 이것저것을 옮겨적고 주판을 튕겨 계산한 후에 통장에 도장을 쾅 찍어 빨간 종이와 함께 내밀었다.
“거기 예금증표에 사인하세요.”
프로스트는 건네받은 종이조각의 빈칸을 찾아 볼펜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또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신중히 펜을 내리그었다. 가위표. 그가 쓸 줄 아는 몇 안되는 글자 중 하나였다.
그는 통장을 들고 뒤로 돌아섰다. 마치 함부로 다루면 부서지는 물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통장을 열어 보았다.
그의 차가운 인상에 작은 미소가 번져나갔지만, 그것은 나타났을 때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는 문을 열고 바깥으로 천천히 사라져갔다.
Everything is clearer now
Life is just a dream, you know
That's never ending.
I'm ascen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