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게돈. 그것도 탑텐급의 아크메이지 네명이 동시에 소멸된 관계로 엄청난 권력 공백현상이 벌어진 아마게돈의 시작은 거의 모든 마법사들에게 한줄기 부직없는 희망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평소대로의 아마게돈이었다면 이미 확고하게 굳어진 탑텐급 아크메이지들의 아성을 무너뜨릴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중위권 마법사들조차 '이번에는 어쩌면...'이라는 생각에, 자포자기식의 전쟁이 아닌, 뭔가 위로 치고 올라갈 발판을 마련하기 위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때문에 제 4세기의 파이널 워는 이전의 그 어느때와도 달리 더욱 더 치열하고 잔혹한 접전이 되어갔다. 여느때 같았더라면 평소에 원한이 깊었던 마법사들끼리만 벌어지던 전면전과 소멸전이, 이제는 자국의 국력을 올리기 위해 상대를 가리지 않고 곳곳에서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절대적인 아마게돈 마법에 의한 연이은 자연 재해와,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한층 더 잔혹한 전쟁은 이제 곧 아크메이지들이 머물게 될 지옥의 풍경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노력하는 듯 했다.



그러나...



"뚜벅. 뚜벅. 뚜벅"



은색의 갑옷으로 온 몸을 감싸고, 고급스러운 망토를 휘날리며 왕성 안을 걸어가는 금발의 로열 나이트 한명은 곧이어 전 테라에 불어닥칠 파괴의 불길과 자신은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이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없이 이어질듯한 화려한 복도를 지나자 눈부시게 빛나는 거대한 홀이 나타났다. 기사는 홀 안에 들어서자 마자 맞은편 끝쪽에 조그맣게 보이는 옥좌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여왕 폐하께 영광을. 모든 것은 여왕 폐하의 뜻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켄톤 경, 더 가까이 오도록 하세요."



여왕의 목소리가 홀 안에 울려퍼졌다. 아름답고 약간은 가냘픈,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위엄있는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켄톤은 황송하다는듯이 몸을 일으키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이 커다란 접견실 안에 있는 것이라고는 자신과 여왕, 단 둘뿐. 다른 왕들이 근위병에 의해 겹겹이 둘러싸여 보호를 받고 있는 것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그녀가 근위병의 보호를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강하기 때문이다. 지금 옥좌에 앉아있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테라 최강의 마법사이자 최고의 권력자. 제국의 여왕이었다.



"이번 일에 대해서는 켄톤 경에게 상당히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군요. 아무리 일이 중요하다지만 그 잘생긴 얼굴을 가리고 사신 역할을 맡겼으니 말이예요."



"화, 황송한 말씀이십니다. 저는 여왕 폐하를 위해서라면 이 한몸 다 바쳐서 지옥 끝까지라도..."



"후훗.."



어울리지 않게 허둥지둥거리며 대답하는 로열 나이트의 모습을 보자, 여왕은 못 참겠다는 듯이 소리내어 웃었고, 켄톤은 사람의 혼을 빼가는 듯한 고운 웃음소리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살짝 들었다.



스무계단 남짓 되는 단 위에 옥좌가 높다랗게 자리잡고 있었고, 그 위에 천사의 날개를 연상시키는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여왕이 앉아있었다. 홀 내부에 유일하게 그림자가 드리워져있는 옥좌의 윗부분은 교묘하게 여왕의 얼굴을 감추고 있었지만, 어깨를 지나 허리까지 내려오는 부드러운 금발과, 눈처럼 빛나는 우아한 목선까지는 감추지 못했다. 기껏해야 열 여섯살에서 열 일곱살? 전체적인 모습으로 봐서는 여왕이라기보다 공주라고 해야 어울릴 정도의 나이임이 분명했다. 더 자세한 나이는 얼굴을 봐야 알 수 있겠지만, 홀 내부를 밝히는 샹들리에 불빛의 유일한 사각지역이 기둥의 장식물이 만들어내는 그림자와 맞물리며 그녀의 얼굴을 마치 제국 최고의 보물을 감추듯 숨기고 있었다.



물론 여왕의 얼굴을 그림자가 가리고 있다고는 하지만, 고도의 수련을 쌓은 로열 나이트인 켄톤이 마음만 먹는다면 못 볼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이 미처 떠오르기도 전에 무언가 거대한 위압감이 그의 머리를 다시 숙이게 만들었다.



"레이디의 얼굴을 함부로 훔쳐보면 못써요, 켄톤 경"



"죄, 죄송합니다. 이런 불충을..."



"아, 괜찮아요, 어차피 제 얼굴을 진짜로 봤다면 지금쯤 켄톤 경은 죽어있었을 테니까요."



귀여운 어투의 아름다운 목소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살벌한 내용을 서슴없이 말하는 여왕 앞에서, 켄톤은 그 말이 절대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등 뒤로 한줄기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구체적인 결과는 어떻게 되었나요?"



"대성공입니다. '단군의 후예'들은 청룡의 소멸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2~3세기 정도는 자신들이 현재 차지한 동쪽 지역을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좋아요, 언젠가는 그들도 테라에 융화되겠지만, 너무 갑작스러운 변화가 미치는 것은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지요."



"하지만 상당히 아슬아슬했습니다. 설마 블루 포세이돈의 계획이 그런 것이었을줄은..."



"다 짐작하고 있었던 사실이예요. 블루 포세이돈의 다중인격도, 실제로는 규칙성을 띄고 있으니까요. 그가 마지막 승자가 되기 위해서 뭔가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지요."



"오오... 과연 여왕폐하이십니다. 거기까지 내다보고 계셨..."



"하지만, 예상 밖의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은 아니예요."



"무슨 말씀이신지?"



"마스터N. 그가 설마 고대인의 유물을, 그것도 최강의 파괴 무기인 원자 폭탄을 발굴해 냈을줄은 몰랐거든요. 켄톤 경이 그의 모든 정보를 다 빼냈다고 믿고 있었죠."



"죽을 죄를 지었사옵니다. 하오나 폐하, 그는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실제로 제가 사신으로 그의 보좌관 역할을 하면서도 정작 중요한 정보는 하나도 접할 수 엇었습니다."



"상관없어요. 어차피 이번 일의 목적은 기존의 아크메이지 세력과 단군의 후예들의 사이를 벌려 놓는데 있었으니까. 만약 그 두세력이 힘을 합쳤더라면 '진실'에 대해 상당히 가까운 곳까지 근접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죠"



"그렇다면, 이번에 반드시 손에 넣으라고 이르신 물건도..."



"아, 그걸 잊어버릴 뻔 했군요. 어디 한번 보여주겠어요?"



켄톤이 품 속에서 얇은 마법서를 한권 꺼내자, 그것은 곧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려 여왕의 손으로 날아들었다.



"흠... 그런 것이었군요..."



단지 마법서에 손을 한번 댄것만으로 모든 내용을 읽어버린 여왕이 말했다.



"역시, 우리의 생각보다 상당히 많은 것을 알고 있었어요. 아마 절반 정도는 눈치챘다고 보는 것이 좋겠군요."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역시 그 기록을 영원히 봉인시키는 것이..."



"아니예요. 이 마법서의 사본을 제작해서 테라에 흘려보내도록 하세요. 절반 정도의 진실이 모두에게 공개되면 언제나 왜곡되고 부풀려져서 가장 확실한 은폐의 수단이 되는 법이니까요. 너무 흔해도 신빙성이 떨어지고, 너무 귀해도 효과가 적을테니, 레어 아이템의 수준 정도로 복사하는 것이 좋겠군요."



"명을 받들겠습니다. 하오면, 마스터N에 대한 조치는 어떻게 취하시겠습니까?"



"특별히 신경쓸것까지는 없어요. 어차피 이번 세기는 종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고, 다음 세기가 시작된 후로도 당분간은 그가 진실을 알아내기 위한 별다른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여왕 폐하, 차라리 그를 영원히 소멸시켜 버리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렇게 한다면 편하기야 하겠지만..."



순간, 여왕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러면 재미가 없잖아요?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변수 한두개 정도는 갖고 있는 편이 게임의 흥미를 더해주기 마련이니까요. 그대로 놔두도록 하세요. 그가 어디까지 올 수 있는지 지켜보도록 합시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여왕 폐하."



켄톤이 접견실을 나가자, 거대한 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혼자 남게된 여왕은 마법 영상을 띄워 테라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종족과 직업, 이상과 목적에 상관없는 전쟁이 계속되고, 그들 위로 최후의 심판, 아마게돈이 점점 더 다가오는 중이었다. 절망, 공포, 분노. 모든 이들의 최후를 장식하는 마지막 전쟁(Final War)은 그렇게 최후를 맞이하고, 이를 지켜보는 여왕의 미소는 한층 더 짙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