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뜨거운 거 싫어어어어~~~"

"조용히 좀 해! 집중이 안되잖아!"



겹겹으로 마법 방어막을 형성했음해도 불구하고,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절대적인 인페르노의 불길은 조금씩 조금씩 나를 태워가기 시작했다.



이거.. 이야깃거리가 될지도 모르겠는걸...

드래곤 미치광이의 애완용 드래곤 백여마리가 만들어낸 인페르노를 정면으로 맞고도 살아난 사람은 별로 없을테니까.



"화르륵"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방어벽 안의 식물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드라코니스의 건조한 환경에 의해 바짝 말라있던 조그마한 나무 몇그루와 마른 풀이 순식간에 타오르기 시작했고, 결계 안으로 불길이 직접적으로 들어오면서 훨씬 더 열기가 강해졌다.



그러나, 더 이상은 버티기 힘들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순간, 다행히도 불길은 조금씩 약해지기 시작했고, 얼마 후에는 지옥 밑바닥에 던져졌던 것처럼 뜨거웠던 열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렸다.



"휴우..."



나와 블루 포세이돈의 입에서 동시에 한숨이 새어나왔다.



"대단하네..."

"아무래도. 용기사 서넛에 최고 레벨의 드래곤 백여마리가 함께 만들어낸 인페르노였을 테니까"



인페르노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신나게 성벽과 결계를 부수던 얼음의 정령들이 모두 사라진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그나마 약간 남아있던 드라코니스의 1차 방어선마저도 완전히 '녹아'버렸다.

나무나 깃발과 같은, 탈 수 있는 물건들은 흔적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타버렸고,

성벽을 이루던 돌과 금속, 마법 결계를 만들던 각종 보석들은 벌건 용암으로 변해 흘러내리며 화산지대에서나 볼 수 있을법한 풍경을 연출했다.



인페르노와 일직선상에 있던 리치들 역시 온전하지는 못했다. 비록 일부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수백에 달하는 리치가 재로 변해버렸다.

언젠가는 다시 부활하겠지만, 완전히 사라져버린 육체를 되살리려면 한두세기 정도로는 힘들지도 모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데이모스의 효율적인 병력 배치로 인해 효과적으로 인페르노를 흘렸고, 덕분에 가장 선두에 섰던 리치들만 약간 희생되었다는 점일까...



하지만 이 파멸적인 위력의 인페르노는, 달리 생각하면 저 덩치 큰 도마뱀들이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총동원해서 만들어냈다는 뜻이고, 또한 저들이 이제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무식하게 달려들어 물어뜯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다.



물론, 테라 최강의 생물이 무식하게 달려든다는 사실은 또한 나름대로 무서운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과 같은 비장의 카드가 사라진 적과 싸우는 것은 얼마나 마음 편한일인가. 더구나 아군의 병력이 드래곤의 천적이라고 불리우는 차가운 손길의 언데드 마법사, 리치의 군단일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인페르노의 불길이 흽쓸고 지나가버린 것이 확인되자, 데이모스 달린의 망토 속에서 잠시 푸른 불꽃의 눈빛이 반짝인 듯 싶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지금껏 멀리서 지원 사격용 마법만 펼치며 소극적인 공격을 하던 리치들이 일제히 돌격하기 시작했다.



"크와아아아!!"



수천에 달하는 리치가 일시에 달려들자, 남아있는 한얼의 레드 드래곤 역시 질세라 크게 포효하며 드래곤 피어를 내뿜었다. 보통 사람들이 들었다면 그 자리에서 기절했을 정도로 강력한 공포감을 일으키는 용들의 울부짖음이 덮쳐왔지만, 이쪽은 이미 오래 전에 그런 감정이 메말라버린 마법사들. 드래곤 피어는 결국 공허한 메아리로 울릴 뿐이었다.



"자, 그러면 2차 방어선을 뚫어볼까나"



나는 다시 암흑의 오러를 끌어올리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일방적인 드래곤의 공격을 몸으로 막아가면서 요새를 파괴하던 얼음 정령들의 1차 방어선 공격때와는 달리, 2차 방어선 공성전은 곳곳에서 전투다운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미 최강의 마법력을 끌어모아 인페르노를 써버린 레드 드래곤들은 최후의 수단으로 무시무시한 속도로 돌격하여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로 리치들을 갈갈이 찢어버렸지만, 곧이어 리치들의 반격에 의해 하나 둘씩 무너지고 있었다.



얼음의 정령들이 뿜어내는 절대적인 냉기는 드래곤을 통째로 얼음 인형으로 만들어버렸던 반면, 지금 리치들이 구사하는 마법은 레드 드래곤의 심장만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얼려버리고 있다. 때문에 리치의 마법은 얼음의 정령들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드래곤을 시체로 만들 수 있었다.



절대적인 드래곤의 힘에 의해 한줄기 검은 연기로 소멸해버리는 리치들, 그 거대한 몸을 지탱해주던 드래곤 하트가 얼어서 산산히 부서져버리자 힘없이 쓰러지는 드래곤들. 드라코니스 2차 방어선 전역에 걸쳐 같은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사이를, 마치 산책하는 것처럼 천천히 걸어 지나갔다. 아니, 실제로 산책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좋겠군. 다른 사람들이 숲 속에서 나무의 기운을 빌어 삼림욕을 하듯, 나는 이들의 죽음을 즐긴다는 것이 다를 뿐이지.



"쿠우오오오오!"



가끔씩 흥분한 어린 드래곤이 아크메이지와 평범한 리치도 구별 못하고 지금처럼 내게 덤벼들곤 했지만 나는 별로 신경도 쓰지 않는다. 단지, 지금 들고 있는 마법 지팡이에 고도로 농축된 마나를 불어넣을 뿐.



"크와아아!"



기세 좋게 소리를 지른 그 레드 드래곤은 나를 향해 입을 크게 벌리고 달려든다. 하지만, 곧이어 내 지팡이 끝에서 검은 구형으로 어른거리는 마나에 막혀 더 이상 접근하지 못했다.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한 레드 드래곤. 녀석은 어떻게든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한껏 크게 벌린 입에 물린 나의 검은 색 마나는 절대 놓아주지 않는다.



"퍼억!"



동그랗게 몰려있던 마나가 한순간 드래곤의 입 속으로 빨려들어가는가 싶더니, 머리 뒤쪽으로 뚫고 나왔다. 그대로 무너지는 드래곤의 시체를 보며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계속 걸음을 옮겼다.



이런식으로 얼마쯤 걸었을까. 내가 2차 방어선의 마지막 성벽을 통과해 드라코니스 요새 본성에 도달할 때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멈춰라!"



지금까지 나와 마주쳤던 것중에서는 가장 큰 드래곤이 내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그 위에는 붉은 갑옷의 기사가 서 있었다.



"이 이상 나아가는 것은 최강의 드래곤 나이트인 내가 용납하지 않는다."



자기 소개를 하면서 당당하게 '최강'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것은 두가지 경우다. 엄청난 얼간이이거나, 그에 걸맞는 최고의 실력을 갖고 있거나. 물론 대부분은 전자의 경우다. 하지만 상황을 미루어 볼때, 지금은 후자일 확률이 지극이 높았다.



흠... 이 주변에 널려있는 원한에 가득찬 사념들을 보아하니, 적어도 수십에 달하는 리치가 저녀석 하나에게 막혀 소멸했군.



"네녀석, 처음 보는데.... 이름은?"

"훗. 이런 곳에서 이름을 밝히라는 소리를 들을 줄이야. 내 이름은 그라티우스. 마리아 그라티우스다."



마리아? 어쩐지, 목소리가 여자 목소리더라니. 흔치 않은 여성 용기사였군.

나는 피식 웃으며 농담처럼 말했다.



"그렇다면 레이디에게의 예의를 지켜야 하는건가?"

"무, 무슨 소리냐! 기사를 모욕하는 것인가!"



비록 얼굴은 투구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상당히 당황하는 듯 했다.



"흠... 그렇게 원한다면 기사로 대우해주지. 내 이름은 마스터N. 아크메이지."



나는 내 마법 지팡이의 마나를 빠른 속도로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지팡이를 손잡이 삼아 뻗어나오는 거대한 검은색 마나의 칼날. 나는 그 칼을 세워 얼굴 앞에 일직선으로 붙였다가 옆으로 쳐내리고 고개를 약간 숙였다.



"호오.. 이거 의외인데? 이런 곳에서 기사의 예의를 지키는 녀석을 만날 줄이야. 내 이름은 마리아 그라티우스. 그라티우스 가문의 17대 드래곤 나이트 중의 하나."



드래곤 위에 서있던 용기사 역시 나와 같은 동작을 취했다. 투구를 벗어 왼손에 든 다음, 오른손으로는 불타오르는 마법검을 수직으로 세웠다가 옆으로 쳐내린다. 감춰져있던 붉게 빛나는 긴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흘러내리며. 이와는 대조적으로 하얀 피부가 드러난다. 확실히 드래곤 나이트의 가문에는 미남, 미녀가 많다는 소문은 사실인 듯 하군.



"좋은 승부가 될 수 있기를."



결투의 신청을 하며 그녀가 고개를 숙이는 순간.



"프리즈 애로우!"

"아악!"



내 손에서 뻗어나온 얼음의 화살이 마리아 그라티우스를 꿰뚫었고, 비록 순간적으로 몸을 뒤틀어 치명상은 피했다고는 하지만. 상당한 중상을 입고 드래곤에서 굴러떨어진 이상, 전투는 이제 불가능해 보였다.



"크와아아아!!"



그녀가 타고 있던 거대한 레드 드래곤이 분노한 모습으로 내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나같으면 주인을 태우고 도망가기에도 바쁠텐데... 이렇게 덤빌 시간이 있나?"



내가 혼잣말처럼 중어거린 이 한마디에, 그녀석은 잠시 멈칫 하더니 곧 자신의 주인을 돌아보았다. 분한 표정으로 어깨를 꿰뚫린 채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는 마리아. 그리고 그 뒤쪽으로 다가오는 리치들.



녀석은 곧바로 자신의 주인을 목 위에 태우고 날아올랐다.



"크흑! 비겁한!"

"멍청하긴. 아크메이지가 언제 칼 들고 싸우는 것 봤나?"

"네녀석.. 마스터N. 잊지 않겠다!"



눈물을 흘리며 분해하는 마리아를 태운 드래곤은 곧장 하늘 저편으로 멀어져갔다.



"잊지 않겠다...라... 지옥에서 말인가?"



충분히 거리가 멀어지자, 나는 냉소를 머금은 채 아까부터 준비해두었던 마법을 시전했다.



"죽음의 손길"



빠른 속도로 마리아 그라티우스의 뒤를 쫓아가는 죽음의 마법. 역시 변경에 위치한 그라티우스 가문의 촌뜨기답게 내가 어떤 인물인지 하나도 모르고 있다. 나는 나중에라도 원한을 품은 상대가 내 목줄기를 노리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이대로 없애버리는 것이 좋을...



"마법 무효화!"



어디선가 터져나온 목소리가 들리자 마자, 거의 드래곤의 끝까지 다다랐던 검은색 마법의 기운이 산산히 흩어졌다.



"무슨... 짓이지?"



나는 분노를 억누르며 내 뒤에서 마법 무효화 주문을 외운 블루 포세이돈을 돌아보았다.



"여자잖아."

"그래서?"

"여자라구."

"여자가 휘두른 칼은 칼도 아니냐? 여자가 쓰는 공격 마법은 100% 빗나가주기라도 하냐구?네녀석이 방금 벌인 짓거리 때문에 내 목숨을 노리는 떨거지들 명단에 마리아 그라티우스라는 이름을 추가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단 말이다!"



내가 화를 내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는 블루 포세이돈. 단지 마리아 그라티우스가 사라진 방향을 볼 뿐이었다.



"하지만... 임신중이었어."

"뭐?"



그랬던건가? 그래서 그렇게 도망치도록 도와준 것인가?



"너... 아크메이지 맞긴 한거냐? 그렇게 남의 사정 봐주어가면서 일일이 살려보내다간 내 목숨이 남아나지 않는단 말이다! 그 여자 용기사가 임신을 했건, 쌍둥이를 낳건 내 알바가 아니란 말이야!"

"누가 그 사람이 임신했다고 했어?"



블루 포세이돈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레드 드래곤이 알을 배고있다는 말이야. 나도 사람은 별로 신경 안써."

"뭐야? 그러면 그 레드 드래곤 때문에?"

"해츨링이 얼마나 귀여운데..."

"크윽! 네녀석을 상대하는 내가 바보지...."



나는 또다시 머리가 아파지는 것을 느끼며 몸을 돌렸다.



어쨌건간에 성채로 이어지는 최후의 관문을 막고있던 장애물이 사라진 지금, 용의 문양이 조각되어있는 거대한 성문만이 내 앞에 놓여있을 뿐이었다.



"분쇄"



아마 강력한 마법이 걸려있었을 성문은 나의 이 한마디에 힘없이 먼지로 변해 흩날렸고, 리치들이 그 문을 통해 물밀 듯이 밀려들어갔다.



"시간이 모자라지는 않겠군"



어느 새 내 옆으로 다가온 데이모스 달린이 말했다.



"하지만 스승님. 아직도 불안한데요. 한얼이라는 자가 이대로 무너질 위인이 아닌데..."

"너무 지나친 걱정이야. 너도 알다시피 아마게돈을 시전하는데는 엄청난 마나와 시간이 든다. 아마 한얼은 그로 인한 마나 손실을 복구하지도 못하고 우리의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이렇게 쉽게 무너진 거겠지"

"난 드래곤 수집실 찾아갈래~"



블루 포세이돈이 또 다시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아직 그럴 때가 아니다. 우선 한얼의 목숨을 끊어 놓은 다음에 전리품을 챙겨도 늦지 않아. 어차피 마스터N의 군대가 다른 병력들의 접근을 차단하고 있으니 승자의 여유를 누리는 것은 느긋하게 해도 좋아."

"그래. 일단은 한얼의 마스터 타워로 가도록 하지."



내 말을 끝으로 우리는 성채 한가운데 위치한 가장 높은 탑, 한얼의 마스터 타워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거대한 한얼의 마스터 타워를 향해 올라가며 창 밖을 보니 전쟁터가 한눈에 들어왔다. 아직도 용암이 흘러내리며 인페르노의 여파를 과시하고 있었고, 곳곳에 거대한 드래곤의 시체가 누워있었다. 아직도 십여마리의 드래곤이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지만, 전쟁이 우리의 승리로 끝날 것은 분명하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드래곤이니만큼, 그정도로 강력하고 뛰어난 녀석들이겠지만, 드라코니스 본성에 들어온 리치를 제외하고도 수천의 리치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나는 더 이상 전투에는 신경쓰지 않고 한얼을 찾아내는 데만 주력하기로 했다. 과연 어디에 숨어있을 것인가. 시전된 아마게돈을 유지해야 할테니 마스터 타워 바깥으로 숨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하 미로에 숨어있을까? 아니면 서고?



그러나, 마스터 타워의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나는 한얼을 찾아 헤맬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스터 타워 1층에 위치한 접대용의 거대한 연회실. 그리고 연회실 끝의 가장 높은 자리에 이상하게 생긴 로브를 걸친 남자가 앉아있었다. 호리호리한 몸매.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은색 긴 머리, 약간은 창백한듯한 얼굴, 강인한 의지를 보여주는 짙은 눈썹.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의 앞에 놓여진, 눈부신 빛을 발하는 아마게돈 마법서. 이 모든 것이 그가 누구인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얼굴 한번 보기도 참 힘들군, 한얼."

"불청객에게 한해서일 뿐이야. 데이모스."



평범한, 지극히 평범한 목소리였다. 어쩌면 약간은 여리다고 여길 수도 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위엄이 느껴지는 그런 목소리.



"왕의 후예들... 그 지도자 한얼.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군."

"하지만 자네 이야기는 많이 들었네. 마스터N. 그리고 '그녀'와도 뭔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



흠칫.



"나도 확실하게 모르는... 그저 짐작만 하고 있을 뿐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건가?"

"아아... 나도 확실한 것은 모르지. 아마 자네가 알고 있는 정도일거야. 다만 그 진실에 대한 관점이 다르다고 할 수는 있겠지."

"도재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둘 다!"



영문 모를 대화에 짜증이 났는지, 블루 포세이돈이 끼어들며 말했다.



"한얼! 내놔!"

"뭘?"

"드래곤 수집실! 난 그걸 갖기 위해서 온거라구!"

"하하... 블루 포세이돈. 나같이 드래곤을 좋아하는 사람이 그렇게 잔인한 짓을 할 리가 없잖나? 드래곤을 박제로 만들어 수집을 한다니.. 말도 안되지."



의아한 표정으로 데이모스를 돌아보는 블루 포세이돈.



"거짓말... 한거야? 데이모스?"

"아니.. 네녀석이 미쳐 날뛰면 어떻게 될지 뻔히 아는 내가 무엇 때문에 거짓말을 했겠나. 모든 건 사실이다. 단지, 한얼 저녀석은 다양한 드래곤을 박제 대신 '산채로' 묶어두었을 뿐이지. 마법으로 말이야. 한얼의 드래곤 수집실에는 수십마리의 드래곤들이 혼이 빠져나간 상태로, 육체만 간신히 숨을 쉬며 묶여있지."



다시 의아한 표정으로 한얼을 바라보는 블루 포세이돈.



"드래곤을 좋아한다면서? 그런데도 그런 짓을 해도 아무렇지 않아?"

"훗.. 좋아한다는 감정의 표현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기 마련이니까."



이렇게 대화를 거듭하는 동안에도 한얼의 앞에 놓인 아마게돈 마법서는 점점 더 밝은 빛을 띄고 있었다. 흠.. 이쯤해서 즐거운 대화의 장은 그만 접어두는 게 좋겠군.



"자... 이제 평화로운 분위기는 걷어버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한얼, 아마게돈 마법서를 불사르고 목숨을 건지겠나, 아니면 끝까지 덤벼볼텐가?"



나는 이미 연회장 주변을 둘러싼 리치들과, 블루 포세이돈, 데이모스 달린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물론 결과는 뻔하지만... 선택은 자네 자유야."

"크큭... 크크큭..."



한얼은 뭐가 그렇게 우스운지 손을 이마에 짚은 채로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나?"

"훗.. 착각은 자유라더니... 너희가... 나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은가?"

"그건 내가 묻고싶은 질문인데. 이 많은 수의 리치와, 세명의 아크메이지를 상대로 혼자서 싸운다면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나?"

"후후... 와하하하핫!!"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리던 한얼. 우리는 잠시 그가 미친 것이 아닌가 의심해야 했다. 그러나, 곧 웃음을 멈추고 고개를 든 그를 본 순간,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금씩 은색으로 변해가는 그의 머리카락, 마치 파충류의 눈처럼 세로로 길게 이어진 눈동자, 잠깐 전에 얼핏 보인 끝이 두갈래로 갈라진 혓바닥. 그리고 무엇보다도, 온 몸에 돋기 시작한 비늘과, 점점 거대해지는 몸집. 데이모스가 던진 한마디가 모든 것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한얼... 네녀석.. 드래곤이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