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암흑문학관 - 작가 : nitrocity1
글 수 40
차라리 흑마법사나, 하다못해 적마사가 공격을 하는 것이었다면 마음이 약간은 편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겉보기에는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실은 그저 마음 내키는 대로, 눈에 띄는 대로 죽인다. 즉, 숨죽이고 몰래 숨어있거나 약삭빠르게 도망만 잘 친다면 살 가능성이 있다는 소리다.
그러나 백마법사들, 특히 템플 나이트의 공격은 '완벽한 전멸'을 목표로 한다. 성직자들이 마을을 초토화해야 할 필요성이 생길 경우, 예를 들어 가혹한 세금을 이기지 못한 농민 반란이 일어난다거나, 이번처럼 특별한 보물이나 아이템을 압수해야 할 경우, 그들의 잔혹성이 탄로나지 않기 위해 목격자는 모두 죽이는 것을 원칙으로 하기 때문이다.
공식 발표로는 '이단에 물든 배교자들을 처형하고, 가엾게도 이들의 속임수에 넘어간 마을 사람들은 조용하고 한적한 수도원으로 보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전부 사살이라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얼마 안되고, 때문에 신전과 성기사들의 이미지는 언제나 맑고 깨끗하지만, 다행히도 나는 진실을 알고 있고, 때문에 이렇게 죽을 힘을 다해 도망가치는 중이다.
'마력만 돌아왔어도!'
필사적으로 도망치면서 마력을 끌어올려보지만, 이렇게 타이밍 딱 맞게 마법력이 짠! 하고 돌아와줄리 없지. 지금 돌아와있는 마력으로는 데스틴 에보크는 커녕, 템플 나이트 한명이 내 앞을 가로막아도 이기기 힘든 실정이다.
그리고, 더 안좋은 일은, 앞에서 말했듯이 '완벽한 학살'을 목표로 하는 기사단이 2차 경계선을 만들지 않을 리 없다는 것이다. 곧이어 내 눈앞에 펼쳐지는 기사단의 포위망. 비록 전투력은 템플 나이트보다 떨어지지만 광역 포위망을 만드는데는 전투력보다 머릿수가 중요한 만큼, 성기사 약간과 꽤 많은 수의 기사들이 마을 외곽을 삥 둘러싸고 있다.
나는 일단, 건물 뒤에 몸을 숨기고 상황의 변화를 지켜보기로 했다. 마을 중심부에서는 소수의 정예 템플 나이트들이 백기사의 지휘 아래 양민들을 체계적으로 학살하며 몰이꾼 역할을 하고, 마을 외곽에서는 기사들이 놀라 도망치는 마을 사람들을 사냥한다.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체로 변해버렸다.
'시체인 척 해봤자... 확인 사살 후에 시체는 모조리 불태워 버릴테니 그건 안되겠고... 역시 조금 남은 마력이나마 제대로 써서 포위망을 뚫는 수밖에 없는 건가...'
오래간만에 진한 피냄새가 마을 전체에 흐르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향기를 음미하고 있을 시간은 없다. 피냄새가 난다는 것은 템플 나이트들이 그만큼 더 가까이 왔다는 뜻이니까.
'좋아. 템플 나이트와 마주치기 전에... 바로 지금이다!'
나는, 그야말로 이러한 상황에 처한 평범한 어린 아이 흉내를 내며 달려나갔다.
"우아앙! 살려줘요!!"
큰 소리로 울며, 평범한 어린 아이의 속도에 맞춰 달리는 시늉을 한다.
기사들의 무표정한 감정이 차가운 투구 뒤의 시선에서 느껴진다. 어떠한 동정심이나 머뭇거림도 없는, 그저 나무를 베려는 듯한 무감각한 반응. 그러나 다행히도, 천만 다행으로 긴장하는 녀석은 하나도 없다. 만에 하나 처음 살인하는 녀석이 저 사이에 끼어서 잔뜩 긴장이라도 하고 있으면 허를 찌르기 힘들 텐데, 모두들 교과서대로 행동할 뿐이다.
"성인 남성은 두걸음 앞에서, 여자와 어린 아이는 한걸음 앞에서. 칼을 들어 위에서 아래로 힘껏 내려친다."
기사단 정규 교과인 폭동 진압, 사교 처단편에 나와있는 말이다. 그리고 기사들은 절대 이를 어기는 일이 없다. 때문에 나는 그들이 나의 두걸음 앞으로 다가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여유있게 마법을 쓸 수 있었다.
"포스 볼트!"
내 손에서 파지직거리며 일어난 번갯불이 구불구불하게 굽이치며 커지기 시작한다.
"가라앗!"
굽이치는 번개의 공이 어른 머리정도의 크기로 커졌을 때, 나는 그것을 내 앞의 기사들에게 힘껏 집어던졌다.
"크아악!!"
갑옷으로 무장한 채 밀집 대형을 이루고 있던 기사 대여섯명이 감전되어 쓰러졌다. 마음같아서는 체인 라이트닝, 아니 하다못해 라이트닝 블래스트라도 날려 저들을 새까맣게 구워버리고 싶었지만, 지금의 내 마력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저 포스 볼트로 기절이나 시키는 수밖에.
어쨌거나 내 목적은 달성되었다. 기사단이 이루고 있던 포위망의 일부가 무너지자, 나는 더 이상 어린 아이 흉내를 내지 않고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
"헤이스트!"
안그래도 무거운 갑옷을 입은 상태로는 내 뒤를 쫓아올 수 없었을텐데, 헤이스트까지 걸어놓고 도망을 치니, 기사단과 나의 거리는 순식간에 멀어졌다.
'말 탄 성기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정도의 거리라면 쫓아오기엔 이미 늦었다. 후훗. 겨우 도망쳐 나온 것 같군.'
뒤를 돌아보니, 얼마 도망치지도 않았는데 까마득하게 멀어 보이는 기사단이 보였다. 그러나.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다시 앞을 보는 순간,
"아아악! 내 눈!"
갑자기 눈부신 섬광이 내 눈 앞에서 번쩍였다.
"어, 어떻게?!"
눈물을 흘리며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시야로 겨우 앞을 바라보니... 맙소사... 그곳에는 기마병에 투석기까지 동원된 세번째 포위망이 자리잡고 있었다.
"어, 어째서, 이따위 조그만 마을 하나 때문에 이렇게 많은 병력이 투입된 거냐아!!"
눈부신 섬광의 여파로 인해 쓰러졌던 나는, 다시 일어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소리질렀다. 이젠 글렀다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지배했다.
"후후... 이 마법의 파장은, 왠지 낯설지가 않군 그래."
반쯤은 쉬어버린 목소리. 왠지 모르게 사람의 신경을 날카롭게 만드는 이 소리는...
나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로 말했다.
"화려하군, 화려해. 템플 나이트에 기사단, 드래곤 슬레이어인 데스틴 에보크에... 투석기와 기마대로 이루어진 삼중 방어선. 그리고 이것으로도 모자라 최고위급 성직자인 이단심판관 에릭 클레이튼까지 등장하셨군그래."
"하핫, 뭘 그리 황송해하시나, 마스터N? 자네라면 이정도쯤이야 간단하게 해치울 수 있지 않은가?"
"..."
내 앞에 서있는 화려한 법복을 입은 장년의 남자. 하얀 수염과 이마에 패인 주름살만 놓고 본다면 평범한 마을 아저씨와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사람을 꿰뚫어 보는듯한 날카로운 눈매와, 실제로 진실과 거짓말을 완벽하게 가려낼 수 있는 능력으로 인해 최고위급 이단 심판관의 자리에 오른 남자가 바로 이 사람, 에릭 클레이튼이다. 그리고 과거의, 내가 아직 성질 고약한 늙은 네크로맨서 밑에서 수련을 빙자한 고문을 당하고 있을 때, 아주 안좋게 만난 사이이기도 하다.
"내가...여기에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나?"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마음씨 좋은 듯한 미소를 띄고, 그러나 아는 사람이 본다면 소름이 끼치는 미소를 띄고 에릭 클레이튼이 되물었다.
"자네는 어째서 그런 어린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거지? 또 누군가를 속여먹기라도 한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거야? 다 알고 온 것 아닌가?"
"천만의 말씀. 난 자네가 여기 있는 것은 모르고 파견된 거야. 만약 알았다면 겨우 이정도 병력만을 이끌고 오진 않았겠지."
사실 그렇다. 기사나 투석기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어느정도 이상의 마법사에게는 무의미할 뿐이다. 물론 혼자서 전멸시키지는 못하겠지만, 괴멸적인 피해를 입히고 유유히 사라지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아무리 데스틴 에보크와 에릭 클레이튼이 함께 왔다고는 해도, 나를 상대하기 위한 병력이라고 보기엔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
"솔직히 말해, 난 저쪽에서 마스터N의 마력 파장을 가진 어린 아이가 뛰어올 때부터 도망칠 궁리만 했다네. 전멸당하기 딱 좋은 병력이니까. 실제로 기사들이 자네 앞을 막아설 때엔 '막지마!'라고 소리치려던 것을 간신히 참았을 정도야. 하지만 자네가 포스 볼트를 쓰는 것을 보고는 마음이 바뀌었지."
미소를 더욱 짙게 띄우며 클레이튼이 말했다.
"견습 네크로맨서 시절부터 악명이 자자해서 교단의 요주의 대상인 마스터N이 사라진지도 벌써 몇년이나 지났는데, 이제야 저런 꼬마의 모습으로 나타나 포스 볼트따위나 쏘아댄다면, 뭔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 마력을 봉쇄당한 것은 아닐까, 라고 말이야. 설마 자네가 기사들의 안전을 걱정해서 라이트닝 블래스트를 아낀 것을 아닐 테니까. 그렇지 않나?"
"그렇다면, 이 많은 병력이... 원래는 전부 개간 마을 하나를 밟아버리기 위해서 동원된 거란 말이야?"
클레이튼이 주위를 한번 스윽 둘러보더니 말했다.
"좀 많은가?"
"조, 좀이 아니잖아! 이정도 병력이면 거의 공성전을 벌여도 될 정도라구!"
"흠... 하지만 고대인의 유물인 아이언 골렘을 얻기 위한 거라면 이정도 준비는 기본이라고 생각하는데?"
"고대인의 유물?"
"그래. 자네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 교단의 1급 기록서에 보면 고대인이 제작한 아이언 골렘에 대한 문서가 남아있지. 어느 정도 이상의 마력이나 염력을 주입하면 영원히 그 일만을 반복하는 아이언 골렘에 대한 기록이. 마법사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골렘 안내서는 그중에서 단지 '전투용 골렘'만을 제작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일 뿐이야."
"그런 거였나... 그래서 아이들에 의해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이었군..."
"내가 듣기로는 이번 골렘은 농경용으로 깨어났다던데... 뭐, 마력 생산용으로 깨어났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황무지 개간용이라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네. 여차하면 연구용으로도 쓸 수 있고 말이야."
내가 지금까지 몇년간 살았던 마을이 불타는 모습이 보였다. 곧이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
"이봐, 클레이튼. 이건 예전부터 궁금했던 것인데 말이야... 어째서 교단은 유물이나 아이템을 압수할 때 저런식으로 모조리 몰살시키는 거지?"
"훗. 아무래도 고대인의 유물을 정식으로 압수하려면 이단 심판의 형식을 거쳐야 하거든. 그런데 그러자면 민간인의 재산을 빼앗는다는 소리가 나올 뿐 아니라, 나중에 그 유물을 교단에서 사용하기도 좀 껄끄럽다구. 차라리 이렇게 몰살시키는 편이 신전의 이미지 관리 차원에서나 효율성 측면에서나 더 낫다구."
"단지 그뿐인가?"
"왜, 공포의 네크로맨서께서 그동안 저 마을에 정이라도 드신 건가?"
"그저.. 궁금했을 뿐이야..."
"좋아, 좋아.... 어쨌거나..."
클레이튼의 미소가 한결 더 차가워졌다.
"이제 자네의 질문이 끝났다면, 내 차례인 것 같군. 어째서 그런 꼴이 된 것이지?"
"왜, 늙어가니까 젊은 몸이 부럽기라도 한건가?"
"퍼억!"
클레이튼의 발길질이 내 복부에 내려 꽂혔다.
"쿨럭!"
"질문에 대답만 하도록 해. 나도 성심껏 답변해 줬잖나?"
클레이튼의 미소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저 인간은 저렇게 웃으며 사람을 살아있는 횃불로 만든다는 것을...
"내 직위가 무엇인지 잊지 말아주길 바라네. 마스터N."
그는 품속에서 기묘하게 생긴 몇가지의 고문 도구를 꺼내어 내 눈앞에 들이대며 말했다.
"마음같아서는 자네에게도 이 기구들의 가치를 온몸으로 느끼게 해주고 싶네만, 보시다시피 시간이 없어서 말이야. 뭐, 굳이 체험해 보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겠네만."
"쿨럭, 쿨럭... 젠장. 네놈 교구에서는 어린 아이를 이런 식으로 다루나?"
"지금까지 자네 마을에 살던 어린 아이들이 지금 받고있는 대우를 함께 받고 싶다는 건가?"
클레이튼의 미소가 짙어지기 시작했다.
"아, 알았어! 말하면 되잖아, 말하면!"
"좋아... 내가 거짓말은 무척 싫어한다는 것만 명심해주게."
어차피 거짓말을 해봤자 통하지도 않는 인간이고 해서, 나는 지금까지 내게 있었던 일들을 사실대로 말했다. 드래곤의 레어에서 마법을 훔치다가 브레스에 맞아 죽어버리고, 부활한 후에 지금까지 겪었던 모든 일들을...될 수 있는 한 자세하게 이야기했다.
"흠... 자네는 운이 좋군."
내 이야기를 다 들은 클레이튼이 내게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퍼억!"
"컥! 쿨럭!"
아니, 말한게 아니라 발로 다시 한번 찬 거군. 젠장.
"마음같아서는 지금 당장에 죽여버리고 싶지만, 우리 교단에서도 자네가 목숨을 버려가며 훔쳐온 지식이 쓰이게 될지도 모르니... 잠시 살려주도록 하지. 이봐, 이놈에게 마력 구속구를 착용시키도록!"
"넷!"
성직자 몇명인가가 마력 제어구를 가져오기 위해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클레이튼은 쓰러진 나를 보며 말했다.
"잔뜩 기대해도 좋아. 뇌 세척을 시켜서 모든 정보를 다 긁어낸 후에, 이단 심판을 할 때 쓰는 고문을 종류별로 다 맛보게 해줄테니까."
"큭..."
"뭐라구?"
"킥킥킥... 푸핫... 푸하하하하하하!"
나는 쓰러진 채로,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뭐야, 미쳐버린건가? 겨우 이정도 협박에?"
"하하하하! 나, 나를 뭘로 보고... 푸하하핫! 그런 소리를 하는... 큭! 크크크... 하하하하!"
"그렇다면, 뭐가 그렇게 우스운 거지?"
나는 겨우 웃음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크큭.. 아까 잊고 한가지 말하지 못한 것이 있는데..."
"그게 뭐지?"
"나, 방금 전에 마력이 돌아와 버렸어."
"무슨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그런 기적같은 일이 일어날 리가 없...."
역시 거짓말을 판별해낼 줄 아는군. 차갑게 미소짓던 클레이튼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어, 어서! 마법 제어구를!"
"이미 늦었다!"
마력 제어구를 들고 달려오던 성직자들이 바로 내 앞까지 도달해 있었지만...
"분쇄!"
내 말 한마디에 의해 단번에 마력의 구속장치는 먼지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내가 클레이튼에게 말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마력이 돌아오기 시작했는데, 완전히 돌아올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이야기를 자세히 말한 것을, 다행하게도 클레이튼은 눈치채지 못했다. 역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지 못하는 이상, 겨우 진실과 거짓을 판별하는 능력만으로 자만하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자, 각오는 되어 있겠지?"
"모, 모두들 싸워! 아직 저녀석은 마력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이봐, 이봐.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치면서 그렇게 말하면 별로 설득력이 없다구.
"모두들 싸워라! 나는 지원군을 불러올테니, 그때까지만 버텨!"
"시끄럽군. 이제 그만 죽엇!"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클레이튼은 그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오래간만에 쓰는 마법이라서 그런지, '파워워드 킬(=죽음의 손가락)' 같은 고급 마법을 쓰니 강렬한 마력이 온 몸을 뒤흔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크아... 역시 마법이란... 좋군."
지휘권을 갖고있던 상급자가 죽어버리자, 기사단은 완전히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대부분은 도망치기 시작했고, 몇몇은 아직도 버티고 있었지만, 내 말 한마디에 죽어버리는 상위 성직자를 보고, 감히 덤빌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너희들, 뭘 그렇게 보고있는 거냐?"
"네?"
"마력이 돌아온 기념으로 오늘만은 그냥 살려줄테니 빨리 사라져 버려."
"저, 정말입니까?"
"왜, 싫은가?"
"아, 아닙니다!"
곧이어 모든 기사들이 무기를 버리고 허겁지겁 도망치기 시작했다. 역시. 쥐는 궁지에 몰아넣으면 물지만, 구멍을 뚫어주면 도망친다. 그리고 그 구멍을 내가 뚫어준 경우엔... 함정 파기도 쉽지.
"어둠의 존재들이여... 맹약에 따라 그 모습을 내 앞에 나타내도록 하라...."
해는 이미 저버렸다. 어둑어둑해지는 초저녁. 도망치는 희생자들을 사냥하기에는 흡혈귀가 제일이지.
"오래간만입니다, 마스터."
서늘한 바람이 부는가 싶더니, 어느새 내 옆에 박쥐 한마리가 날아와 말했다.
"그동안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까?"
"그 이야기는 나중에. 일단 지금은 사냥부터 할 때다."
"그렇군요... 그러면, 지금은 일단 실례하도록 하겠습니다."
곧이어 수십마리의 박쥐떼가 도망치는 기사단을 뒤쫓아 날아갔다.
"그러면 나는..."
해가 지자 불타는 마을이 훨씬 더 선명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복수라고 하기엔 뭣하지만... 슬슬 가볼까나..."
마력이 일단 완전히 돌아오고 나니, 이정도 거리의 텔레포트는 거의 무의식으로 이루어졌다. 내가 내려앉은 곳은 기사들이 모여 시체를 쌓아두기 시작하는 마을 광장.
나는 시체더미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뭐야, 저기 좀 봐! 아직 생존자가 남아있잖나! 빨리 끝내도록!"
"데스틴 에보크. 정의의 백기사 주제에 동정심이 너무 없군 그래."
"너, 너는 설마?! 어째서 여기에...!"
그제서야 알아차린 듯, 데스틴의 투구 뒤로 보이는 눈이 놀라움으로 인해 커지는 것이 보였다.
"마스터N! 네가 어떻게 알고..."
"먼저 시비를 걸어온 것은 너희들이라구."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더미. 저기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지르려던 거겠지.
"나는 상대방이 먼저 걸어온 싸움은 피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애니메이트 언데드!"
원통한 표정의 시체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별로 정의의 사자 흉내따위는 내고 싶지 않다만, 너희에게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에 의해 생을 마감하는 것도 괜찮겠지. 안그래?"
하나 둘씩 일어나는 시체들. 배가 갈리고, 목이 잘려 너덜거리는 시체들이 일어나 템플 나이트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겁먹지 마라! 이들은 단지 언데드일 뿐이다! 모두 정신차리고 대응하도록!"
오호. 역시 백기사라 다르긴 다르군. 하지만 그것도 상대가 일반적인 언데드일 때나 통하는 이야기지. 자신이 방금 죽인 따끈따끈한 시체가 일어나 자신을 노린다면 패닉 상태에 빠져들지 않고는 못 배긴다구. 더구나...
"블러드러스트..."
그 상대가 피에 미쳐 발광하는 좀비들일 경우에는...
"끄아아아악!"
나는 데스틴을 포함한 템플 나이트들이 지르는 최후의 비명 소리를 등뒤로 한 채 걸음을 옮겼다.
불타는 마을과 피투성이가 되어버린 농장. 그 가운데서 아이언 골렘이 묵묵히 땅을 고르고 있었다. 불길이 비쳐 붉게 번쩍이는, 아니 어쩌면 사람들의 피를 뒤집어써서 붉게 보이는 것인지도 모르는 아이언 골렘이... 마치 테라의 시작부터 계속 그래왔던것 마냥 논밭을 만들고 있었다.
"결국에는... 그 아이들의 염원이 너를 통해서 항상 살아있다는 건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고도 할 수 있을, 지난 몇년간의 일들이 잠시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원래대로라면 이런 감상에 젖을 리 없는 나였지만, 지금만큼은 왠지 씁쓸한 기분이 드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훗... 그래. 지난 몇년간, 몸은 피곤했지만 그리 나쁘지는 않았어. 하지만..."
점점 멀리까지 땅을 고르며 멀어지는 아이언 골렘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그 기억은 너와 함께 떠나보내주지. 잘 가라구, 나의 짧은 추억."
몇년만에 겨우 다시 나의 마스터 타워로 텔레포트할 준비를 하며 말했다.
"나는 이제부터 또다시 가야할 나의 길이 있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나는 또 다시 교단의 공적, 암흑의 네크로맨서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아이언 골렘을 만들고 있는 지금의 내 모습처럼.
"마스터?"
종자 하나가 내 얼굴을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아이언 골렘이 완성되었습니다. 어서 명령을..."
방금 용광로에서 걸어 나온 아이언 골렘이 눈을 맞아 수증기를 뿜어가며 내 앞에 서있다.
잠시 아이언 골렘을 바라보던 나는 명령을 내렸다.
"농장을 만들어봐."
아이언 골렘이 한순간 멈칫, 하는듯한 행동을 취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이어 땅을 파기 시작했다.
"그만."
나는 내 눈앞에 깊게 파인, 생명력이 고갈된 시체 구덩이를 보며 말했다.
"역시... 추억은 추억으로 남겨두는 편이 낫다는 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견습 마법사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나는 다시 소리쳤다.
"뭘 꾸물거리는 건가! 빨리 추가 작업을 시작하도록!"
다시 생성이 시작되는 아이언 골렘들. 내가 앞으로 그들에게 내릴 명령은 파괴가 전부겠지.
"뭐, 이것도 나쁘지는 않아. 안그래?"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추억에서 현실로 돌아온 내 머리 위로, 눈발이 한층 더 거세게 날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백마법사들, 특히 템플 나이트의 공격은 '완벽한 전멸'을 목표로 한다. 성직자들이 마을을 초토화해야 할 필요성이 생길 경우, 예를 들어 가혹한 세금을 이기지 못한 농민 반란이 일어난다거나, 이번처럼 특별한 보물이나 아이템을 압수해야 할 경우, 그들의 잔혹성이 탄로나지 않기 위해 목격자는 모두 죽이는 것을 원칙으로 하기 때문이다.
공식 발표로는 '이단에 물든 배교자들을 처형하고, 가엾게도 이들의 속임수에 넘어간 마을 사람들은 조용하고 한적한 수도원으로 보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전부 사살이라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얼마 안되고, 때문에 신전과 성기사들의 이미지는 언제나 맑고 깨끗하지만, 다행히도 나는 진실을 알고 있고, 때문에 이렇게 죽을 힘을 다해 도망가치는 중이다.
'마력만 돌아왔어도!'
필사적으로 도망치면서 마력을 끌어올려보지만, 이렇게 타이밍 딱 맞게 마법력이 짠! 하고 돌아와줄리 없지. 지금 돌아와있는 마력으로는 데스틴 에보크는 커녕, 템플 나이트 한명이 내 앞을 가로막아도 이기기 힘든 실정이다.
그리고, 더 안좋은 일은, 앞에서 말했듯이 '완벽한 학살'을 목표로 하는 기사단이 2차 경계선을 만들지 않을 리 없다는 것이다. 곧이어 내 눈앞에 펼쳐지는 기사단의 포위망. 비록 전투력은 템플 나이트보다 떨어지지만 광역 포위망을 만드는데는 전투력보다 머릿수가 중요한 만큼, 성기사 약간과 꽤 많은 수의 기사들이 마을 외곽을 삥 둘러싸고 있다.
나는 일단, 건물 뒤에 몸을 숨기고 상황의 변화를 지켜보기로 했다. 마을 중심부에서는 소수의 정예 템플 나이트들이 백기사의 지휘 아래 양민들을 체계적으로 학살하며 몰이꾼 역할을 하고, 마을 외곽에서는 기사들이 놀라 도망치는 마을 사람들을 사냥한다.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체로 변해버렸다.
'시체인 척 해봤자... 확인 사살 후에 시체는 모조리 불태워 버릴테니 그건 안되겠고... 역시 조금 남은 마력이나마 제대로 써서 포위망을 뚫는 수밖에 없는 건가...'
오래간만에 진한 피냄새가 마을 전체에 흐르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향기를 음미하고 있을 시간은 없다. 피냄새가 난다는 것은 템플 나이트들이 그만큼 더 가까이 왔다는 뜻이니까.
'좋아. 템플 나이트와 마주치기 전에... 바로 지금이다!'
나는, 그야말로 이러한 상황에 처한 평범한 어린 아이 흉내를 내며 달려나갔다.
"우아앙! 살려줘요!!"
큰 소리로 울며, 평범한 어린 아이의 속도에 맞춰 달리는 시늉을 한다.
기사들의 무표정한 감정이 차가운 투구 뒤의 시선에서 느껴진다. 어떠한 동정심이나 머뭇거림도 없는, 그저 나무를 베려는 듯한 무감각한 반응. 그러나 다행히도, 천만 다행으로 긴장하는 녀석은 하나도 없다. 만에 하나 처음 살인하는 녀석이 저 사이에 끼어서 잔뜩 긴장이라도 하고 있으면 허를 찌르기 힘들 텐데, 모두들 교과서대로 행동할 뿐이다.
"성인 남성은 두걸음 앞에서, 여자와 어린 아이는 한걸음 앞에서. 칼을 들어 위에서 아래로 힘껏 내려친다."
기사단 정규 교과인 폭동 진압, 사교 처단편에 나와있는 말이다. 그리고 기사들은 절대 이를 어기는 일이 없다. 때문에 나는 그들이 나의 두걸음 앞으로 다가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여유있게 마법을 쓸 수 있었다.
"포스 볼트!"
내 손에서 파지직거리며 일어난 번갯불이 구불구불하게 굽이치며 커지기 시작한다.
"가라앗!"
굽이치는 번개의 공이 어른 머리정도의 크기로 커졌을 때, 나는 그것을 내 앞의 기사들에게 힘껏 집어던졌다.
"크아악!!"
갑옷으로 무장한 채 밀집 대형을 이루고 있던 기사 대여섯명이 감전되어 쓰러졌다. 마음같아서는 체인 라이트닝, 아니 하다못해 라이트닝 블래스트라도 날려 저들을 새까맣게 구워버리고 싶었지만, 지금의 내 마력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저 포스 볼트로 기절이나 시키는 수밖에.
어쨌거나 내 목적은 달성되었다. 기사단이 이루고 있던 포위망의 일부가 무너지자, 나는 더 이상 어린 아이 흉내를 내지 않고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
"헤이스트!"
안그래도 무거운 갑옷을 입은 상태로는 내 뒤를 쫓아올 수 없었을텐데, 헤이스트까지 걸어놓고 도망을 치니, 기사단과 나의 거리는 순식간에 멀어졌다.
'말 탄 성기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정도의 거리라면 쫓아오기엔 이미 늦었다. 후훗. 겨우 도망쳐 나온 것 같군.'
뒤를 돌아보니, 얼마 도망치지도 않았는데 까마득하게 멀어 보이는 기사단이 보였다. 그러나.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다시 앞을 보는 순간,
"아아악! 내 눈!"
갑자기 눈부신 섬광이 내 눈 앞에서 번쩍였다.
"어, 어떻게?!"
눈물을 흘리며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시야로 겨우 앞을 바라보니... 맙소사... 그곳에는 기마병에 투석기까지 동원된 세번째 포위망이 자리잡고 있었다.
"어, 어째서, 이따위 조그만 마을 하나 때문에 이렇게 많은 병력이 투입된 거냐아!!"
눈부신 섬광의 여파로 인해 쓰러졌던 나는, 다시 일어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소리질렀다. 이젠 글렀다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지배했다.
"후후... 이 마법의 파장은, 왠지 낯설지가 않군 그래."
반쯤은 쉬어버린 목소리. 왠지 모르게 사람의 신경을 날카롭게 만드는 이 소리는...
나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로 말했다.
"화려하군, 화려해. 템플 나이트에 기사단, 드래곤 슬레이어인 데스틴 에보크에... 투석기와 기마대로 이루어진 삼중 방어선. 그리고 이것으로도 모자라 최고위급 성직자인 이단심판관 에릭 클레이튼까지 등장하셨군그래."
"하핫, 뭘 그리 황송해하시나, 마스터N? 자네라면 이정도쯤이야 간단하게 해치울 수 있지 않은가?"
"..."
내 앞에 서있는 화려한 법복을 입은 장년의 남자. 하얀 수염과 이마에 패인 주름살만 놓고 본다면 평범한 마을 아저씨와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사람을 꿰뚫어 보는듯한 날카로운 눈매와, 실제로 진실과 거짓말을 완벽하게 가려낼 수 있는 능력으로 인해 최고위급 이단 심판관의 자리에 오른 남자가 바로 이 사람, 에릭 클레이튼이다. 그리고 과거의, 내가 아직 성질 고약한 늙은 네크로맨서 밑에서 수련을 빙자한 고문을 당하고 있을 때, 아주 안좋게 만난 사이이기도 하다.
"내가...여기에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나?"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마음씨 좋은 듯한 미소를 띄고, 그러나 아는 사람이 본다면 소름이 끼치는 미소를 띄고 에릭 클레이튼이 되물었다.
"자네는 어째서 그런 어린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거지? 또 누군가를 속여먹기라도 한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거야? 다 알고 온 것 아닌가?"
"천만의 말씀. 난 자네가 여기 있는 것은 모르고 파견된 거야. 만약 알았다면 겨우 이정도 병력만을 이끌고 오진 않았겠지."
사실 그렇다. 기사나 투석기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어느정도 이상의 마법사에게는 무의미할 뿐이다. 물론 혼자서 전멸시키지는 못하겠지만, 괴멸적인 피해를 입히고 유유히 사라지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아무리 데스틴 에보크와 에릭 클레이튼이 함께 왔다고는 해도, 나를 상대하기 위한 병력이라고 보기엔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
"솔직히 말해, 난 저쪽에서 마스터N의 마력 파장을 가진 어린 아이가 뛰어올 때부터 도망칠 궁리만 했다네. 전멸당하기 딱 좋은 병력이니까. 실제로 기사들이 자네 앞을 막아설 때엔 '막지마!'라고 소리치려던 것을 간신히 참았을 정도야. 하지만 자네가 포스 볼트를 쓰는 것을 보고는 마음이 바뀌었지."
미소를 더욱 짙게 띄우며 클레이튼이 말했다.
"견습 네크로맨서 시절부터 악명이 자자해서 교단의 요주의 대상인 마스터N이 사라진지도 벌써 몇년이나 지났는데, 이제야 저런 꼬마의 모습으로 나타나 포스 볼트따위나 쏘아댄다면, 뭔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 마력을 봉쇄당한 것은 아닐까, 라고 말이야. 설마 자네가 기사들의 안전을 걱정해서 라이트닝 블래스트를 아낀 것을 아닐 테니까. 그렇지 않나?"
"그렇다면, 이 많은 병력이... 원래는 전부 개간 마을 하나를 밟아버리기 위해서 동원된 거란 말이야?"
클레이튼이 주위를 한번 스윽 둘러보더니 말했다.
"좀 많은가?"
"조, 좀이 아니잖아! 이정도 병력이면 거의 공성전을 벌여도 될 정도라구!"
"흠... 하지만 고대인의 유물인 아이언 골렘을 얻기 위한 거라면 이정도 준비는 기본이라고 생각하는데?"
"고대인의 유물?"
"그래. 자네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 교단의 1급 기록서에 보면 고대인이 제작한 아이언 골렘에 대한 문서가 남아있지. 어느 정도 이상의 마력이나 염력을 주입하면 영원히 그 일만을 반복하는 아이언 골렘에 대한 기록이. 마법사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골렘 안내서는 그중에서 단지 '전투용 골렘'만을 제작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일 뿐이야."
"그런 거였나... 그래서 아이들에 의해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이었군..."
"내가 듣기로는 이번 골렘은 농경용으로 깨어났다던데... 뭐, 마력 생산용으로 깨어났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황무지 개간용이라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네. 여차하면 연구용으로도 쓸 수 있고 말이야."
내가 지금까지 몇년간 살았던 마을이 불타는 모습이 보였다. 곧이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
"이봐, 클레이튼. 이건 예전부터 궁금했던 것인데 말이야... 어째서 교단은 유물이나 아이템을 압수할 때 저런식으로 모조리 몰살시키는 거지?"
"훗. 아무래도 고대인의 유물을 정식으로 압수하려면 이단 심판의 형식을 거쳐야 하거든. 그런데 그러자면 민간인의 재산을 빼앗는다는 소리가 나올 뿐 아니라, 나중에 그 유물을 교단에서 사용하기도 좀 껄끄럽다구. 차라리 이렇게 몰살시키는 편이 신전의 이미지 관리 차원에서나 효율성 측면에서나 더 낫다구."
"단지 그뿐인가?"
"왜, 공포의 네크로맨서께서 그동안 저 마을에 정이라도 드신 건가?"
"그저.. 궁금했을 뿐이야..."
"좋아, 좋아.... 어쨌거나..."
클레이튼의 미소가 한결 더 차가워졌다.
"이제 자네의 질문이 끝났다면, 내 차례인 것 같군. 어째서 그런 꼴이 된 것이지?"
"왜, 늙어가니까 젊은 몸이 부럽기라도 한건가?"
"퍼억!"
클레이튼의 발길질이 내 복부에 내려 꽂혔다.
"쿨럭!"
"질문에 대답만 하도록 해. 나도 성심껏 답변해 줬잖나?"
클레이튼의 미소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저 인간은 저렇게 웃으며 사람을 살아있는 횃불로 만든다는 것을...
"내 직위가 무엇인지 잊지 말아주길 바라네. 마스터N."
그는 품속에서 기묘하게 생긴 몇가지의 고문 도구를 꺼내어 내 눈앞에 들이대며 말했다.
"마음같아서는 자네에게도 이 기구들의 가치를 온몸으로 느끼게 해주고 싶네만, 보시다시피 시간이 없어서 말이야. 뭐, 굳이 체험해 보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겠네만."
"쿨럭, 쿨럭... 젠장. 네놈 교구에서는 어린 아이를 이런 식으로 다루나?"
"지금까지 자네 마을에 살던 어린 아이들이 지금 받고있는 대우를 함께 받고 싶다는 건가?"
클레이튼의 미소가 짙어지기 시작했다.
"아, 알았어! 말하면 되잖아, 말하면!"
"좋아... 내가 거짓말은 무척 싫어한다는 것만 명심해주게."
어차피 거짓말을 해봤자 통하지도 않는 인간이고 해서, 나는 지금까지 내게 있었던 일들을 사실대로 말했다. 드래곤의 레어에서 마법을 훔치다가 브레스에 맞아 죽어버리고, 부활한 후에 지금까지 겪었던 모든 일들을...될 수 있는 한 자세하게 이야기했다.
"흠... 자네는 운이 좋군."
내 이야기를 다 들은 클레이튼이 내게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퍼억!"
"컥! 쿨럭!"
아니, 말한게 아니라 발로 다시 한번 찬 거군. 젠장.
"마음같아서는 지금 당장에 죽여버리고 싶지만, 우리 교단에서도 자네가 목숨을 버려가며 훔쳐온 지식이 쓰이게 될지도 모르니... 잠시 살려주도록 하지. 이봐, 이놈에게 마력 구속구를 착용시키도록!"
"넷!"
성직자 몇명인가가 마력 제어구를 가져오기 위해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클레이튼은 쓰러진 나를 보며 말했다.
"잔뜩 기대해도 좋아. 뇌 세척을 시켜서 모든 정보를 다 긁어낸 후에, 이단 심판을 할 때 쓰는 고문을 종류별로 다 맛보게 해줄테니까."
"큭..."
"뭐라구?"
"킥킥킥... 푸핫... 푸하하하하하하!"
나는 쓰러진 채로,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뭐야, 미쳐버린건가? 겨우 이정도 협박에?"
"하하하하! 나, 나를 뭘로 보고... 푸하하핫! 그런 소리를 하는... 큭! 크크크... 하하하하!"
"그렇다면, 뭐가 그렇게 우스운 거지?"
나는 겨우 웃음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크큭.. 아까 잊고 한가지 말하지 못한 것이 있는데..."
"그게 뭐지?"
"나, 방금 전에 마력이 돌아와 버렸어."
"무슨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그런 기적같은 일이 일어날 리가 없...."
역시 거짓말을 판별해낼 줄 아는군. 차갑게 미소짓던 클레이튼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어, 어서! 마법 제어구를!"
"이미 늦었다!"
마력 제어구를 들고 달려오던 성직자들이 바로 내 앞까지 도달해 있었지만...
"분쇄!"
내 말 한마디에 의해 단번에 마력의 구속장치는 먼지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내가 클레이튼에게 말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마력이 돌아오기 시작했는데, 완전히 돌아올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이야기를 자세히 말한 것을, 다행하게도 클레이튼은 눈치채지 못했다. 역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지 못하는 이상, 겨우 진실과 거짓을 판별하는 능력만으로 자만하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자, 각오는 되어 있겠지?"
"모, 모두들 싸워! 아직 저녀석은 마력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이봐, 이봐.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치면서 그렇게 말하면 별로 설득력이 없다구.
"모두들 싸워라! 나는 지원군을 불러올테니, 그때까지만 버텨!"
"시끄럽군. 이제 그만 죽엇!"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클레이튼은 그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오래간만에 쓰는 마법이라서 그런지, '파워워드 킬(=죽음의 손가락)' 같은 고급 마법을 쓰니 강렬한 마력이 온 몸을 뒤흔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크아... 역시 마법이란... 좋군."
지휘권을 갖고있던 상급자가 죽어버리자, 기사단은 완전히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대부분은 도망치기 시작했고, 몇몇은 아직도 버티고 있었지만, 내 말 한마디에 죽어버리는 상위 성직자를 보고, 감히 덤빌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너희들, 뭘 그렇게 보고있는 거냐?"
"네?"
"마력이 돌아온 기념으로 오늘만은 그냥 살려줄테니 빨리 사라져 버려."
"저, 정말입니까?"
"왜, 싫은가?"
"아, 아닙니다!"
곧이어 모든 기사들이 무기를 버리고 허겁지겁 도망치기 시작했다. 역시. 쥐는 궁지에 몰아넣으면 물지만, 구멍을 뚫어주면 도망친다. 그리고 그 구멍을 내가 뚫어준 경우엔... 함정 파기도 쉽지.
"어둠의 존재들이여... 맹약에 따라 그 모습을 내 앞에 나타내도록 하라...."
해는 이미 저버렸다. 어둑어둑해지는 초저녁. 도망치는 희생자들을 사냥하기에는 흡혈귀가 제일이지.
"오래간만입니다, 마스터."
서늘한 바람이 부는가 싶더니, 어느새 내 옆에 박쥐 한마리가 날아와 말했다.
"그동안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까?"
"그 이야기는 나중에. 일단 지금은 사냥부터 할 때다."
"그렇군요... 그러면, 지금은 일단 실례하도록 하겠습니다."
곧이어 수십마리의 박쥐떼가 도망치는 기사단을 뒤쫓아 날아갔다.
"그러면 나는..."
해가 지자 불타는 마을이 훨씬 더 선명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복수라고 하기엔 뭣하지만... 슬슬 가볼까나..."
마력이 일단 완전히 돌아오고 나니, 이정도 거리의 텔레포트는 거의 무의식으로 이루어졌다. 내가 내려앉은 곳은 기사들이 모여 시체를 쌓아두기 시작하는 마을 광장.
나는 시체더미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뭐야, 저기 좀 봐! 아직 생존자가 남아있잖나! 빨리 끝내도록!"
"데스틴 에보크. 정의의 백기사 주제에 동정심이 너무 없군 그래."
"너, 너는 설마?! 어째서 여기에...!"
그제서야 알아차린 듯, 데스틴의 투구 뒤로 보이는 눈이 놀라움으로 인해 커지는 것이 보였다.
"마스터N! 네가 어떻게 알고..."
"먼저 시비를 걸어온 것은 너희들이라구."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더미. 저기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지르려던 거겠지.
"나는 상대방이 먼저 걸어온 싸움은 피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애니메이트 언데드!"
원통한 표정의 시체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별로 정의의 사자 흉내따위는 내고 싶지 않다만, 너희에게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에 의해 생을 마감하는 것도 괜찮겠지. 안그래?"
하나 둘씩 일어나는 시체들. 배가 갈리고, 목이 잘려 너덜거리는 시체들이 일어나 템플 나이트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겁먹지 마라! 이들은 단지 언데드일 뿐이다! 모두 정신차리고 대응하도록!"
오호. 역시 백기사라 다르긴 다르군. 하지만 그것도 상대가 일반적인 언데드일 때나 통하는 이야기지. 자신이 방금 죽인 따끈따끈한 시체가 일어나 자신을 노린다면 패닉 상태에 빠져들지 않고는 못 배긴다구. 더구나...
"블러드러스트..."
그 상대가 피에 미쳐 발광하는 좀비들일 경우에는...
"끄아아아악!"
나는 데스틴을 포함한 템플 나이트들이 지르는 최후의 비명 소리를 등뒤로 한 채 걸음을 옮겼다.
불타는 마을과 피투성이가 되어버린 농장. 그 가운데서 아이언 골렘이 묵묵히 땅을 고르고 있었다. 불길이 비쳐 붉게 번쩍이는, 아니 어쩌면 사람들의 피를 뒤집어써서 붉게 보이는 것인지도 모르는 아이언 골렘이... 마치 테라의 시작부터 계속 그래왔던것 마냥 논밭을 만들고 있었다.
"결국에는... 그 아이들의 염원이 너를 통해서 항상 살아있다는 건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고도 할 수 있을, 지난 몇년간의 일들이 잠시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원래대로라면 이런 감상에 젖을 리 없는 나였지만, 지금만큼은 왠지 씁쓸한 기분이 드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훗... 그래. 지난 몇년간, 몸은 피곤했지만 그리 나쁘지는 않았어. 하지만..."
점점 멀리까지 땅을 고르며 멀어지는 아이언 골렘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그 기억은 너와 함께 떠나보내주지. 잘 가라구, 나의 짧은 추억."
몇년만에 겨우 다시 나의 마스터 타워로 텔레포트할 준비를 하며 말했다.
"나는 이제부터 또다시 가야할 나의 길이 있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나는 또 다시 교단의 공적, 암흑의 네크로맨서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아이언 골렘을 만들고 있는 지금의 내 모습처럼.
"마스터?"
종자 하나가 내 얼굴을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아이언 골렘이 완성되었습니다. 어서 명령을..."
방금 용광로에서 걸어 나온 아이언 골렘이 눈을 맞아 수증기를 뿜어가며 내 앞에 서있다.
잠시 아이언 골렘을 바라보던 나는 명령을 내렸다.
"농장을 만들어봐."
아이언 골렘이 한순간 멈칫, 하는듯한 행동을 취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이어 땅을 파기 시작했다.
"그만."
나는 내 눈앞에 깊게 파인, 생명력이 고갈된 시체 구덩이를 보며 말했다.
"역시... 추억은 추억으로 남겨두는 편이 낫다는 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견습 마법사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나는 다시 소리쳤다.
"뭘 꾸물거리는 건가! 빨리 추가 작업을 시작하도록!"
다시 생성이 시작되는 아이언 골렘들. 내가 앞으로 그들에게 내릴 명령은 파괴가 전부겠지.
"뭐, 이것도 나쁘지는 않아. 안그래?"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추억에서 현실로 돌아온 내 머리 위로, 눈발이 한층 더 거세게 날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