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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문학관 - 작가 : nitrocity1
글 수 40
내가 신성기사단을 처음 보았던 것은 나의 세번째 부활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지금의 제국이 탄생하기 이전에 존재하던 고대 왕국 중 한 곳에서 창립되었던 단체로, 왕성에서부터 시끌벅적하게 기사들을 끌어모아 성대한 잔치를 벌려가며 창단식을 했던 것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그러나, 그 속사정을 살펴본다면 당시의 신성기사단은 그저 오크나 트롤 정도를 사냥하기 위한 단체로, 보통의 군대나 현상금 사냥꾼 만으로는 처치가 곤란한, 마성을 지닌 하급 생물들을 마을 주변에서 몰아내는 데 쓰일 뿐이었다.
은으로 특수처리한 검이나 하얀색의 갑옷 등은 멋있기는 했지만, 그야말로 짐승이나 다름없는 늑대인간들을 상대할 때라면 또 모를까, 나와 같은 상위 네크로맨서를 위협하기엔 턱없이 나약한 장비였고, 때문에 나를 비롯한 여러 흑마법사들은 신성기사단을 그저 약간 귀찮은 날파리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초대 신성기사단이 창설되고 약 45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왜 내가 그때 저놈들을 쓸어버리지 않았던가'라고 땅을 치며 후회를 할 정도로 막강한 세력을 지닌 단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솔직히 말해, 고대의 여러 왕국들이 멸망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새로 세워진 제국의 여왕이 마법사들끼리의 경쟁을 부추기며 서로 싸우는 것을 보고 즐기는 변태가 아니었더라면, 그리고 무엇보다도 테라의 여러 신들이 너무나도 약해진 백마법사들을 돕기로 결정하지 않았더라면, 그까짓 신성기사단 쯤은 아침 식사꺼리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테라의 신들은, 심지어는 사탄과 루시퍼 마저도 자신의 먹이인 인간들이 모두 파멸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백마법의 영역에 천사들을 지원하는 것을 승인하고야 말았고 그 결과는 흑마법사들이 지배하는 나라의 하늘에서 수많은 천사들이 쏟아져 내려오며 공격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말았다.
솔직히 그 당시의 나는 신들의 결정에 어느 정도는 찬성을 하고 있었다. 흡혈귀 약간만 적국 영토에 흘려보내도 밤마다 계속되는 공포의 나날을 견디지 못하고 국가 전체가 패망할 정도였으니, 그런 상태로 가다간 몇세기 지나지도 않아 인간의 씨가 마를 지경이었고, 때문에 흑마법사들의 활약을 마냥 기뻐만하던 삼류 악당들과는 달리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지 않으면 테라는 아마게돈을 맞이하기도 전에 먼저 멸망해버릴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천사와 대천사들이 전장에 나타나기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그래, 이정도는 되어야 싸울 맛이 나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도 않아 주천사 클래스가 그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데는 아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주천사라니...!
비록 신앙심이 깊지 않으면 불러낼 수 없는 존재라는 제약이 붙었다 하더라도, 천계 중급 클래스인 주천사를 지상에 지원하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9계급 중 4열에 속하는 권천사, 능천사들이... 최후의 심판 때 악마와 싸우기 위해 존재한다는 그들이 왜 벌써부터 나타나는 거냔 말이다!
주천사들이 그 모습을 드러낸 후로 전황은 우리에게 극도로 불리해졌다. '신이 내린 기적'을 직접 체험한 백성들은 백마법을 신봉하겠다며 우루루 몰려갔고, 전쟁에 있어서도 주 전력이었던 리치와 흡혈귀들은 천적이라 할 수 있는 천사들에게 씨몰살을 당해 연전연패를 기록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가장 열받는 것은 그동안 제국 각처에서 숨죽이고 있던 신성 기사단의 찌꺼기들이 천사의 권위를 등에 업고 독립된 세력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변변한 마법 하나 쓸 줄도 모르는 것들이 감히 아크메이지들이 지배하는 테라에 겁도 없이 발을 들여놓다니!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이렇게 생각했고, 심지어는 백마법사들조차 그들이 얼마 못가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모두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 버렸고, 신성 기사단은 그들 특유의 검술과 무력, 그리고 광신에 가까운 신앙심으로 마법력의 부족을 커버하며 테라의 백마법 세력 중 가장 강대한 무력 집단으로 자리잡아갔다. 제국 각처에서 자신만의 영역을 주장하며 나타난 이들은 현재 모두 13개의 기사단을 이루고 있고, 그들 하나하나가 왠만한 상위 아크메이지와 맞먹는 세력을 형성했다.
그리고..
지금 나에게 은촉 화살을 날린 저 기사가 (비록 거리가 멀어 그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바로 제 13 신성기사단의 단장인 "Cold Blood"인 것이다. 그의 본명은 지그프리트 폰 러쎌. 그러나 그의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잔인무도한 냉혈한. 공포의 이단 심판관. 잔혹한 천사의 단죄. 백마법사들이 주장하는 '사랑과 평화'와는 절대적으로 정반대에 위치한 인간. 그가 바로 콜드 블러드다. 그의 이단 심판은 너무도 잔혹해서, 지금까지 100여개의 마을에서 최소한 1700개 이상의 십자가가 이교도를 매달고 불태워졌다고 하니, 보통 사람들이 콜드 블러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더 난감한 사실은 제 13 신성기사단의 영지와 내 영토간의 거리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탓에 툭하면 서로 투닥거리며 전쟁을 벌이는, 매우매우 불편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데 있다. 절친한 동맹이라도 내가 지금 처한 곤경을 보면 '저걸 쳐서 한몫 잡아 봐?'라는 생각을 갖기 마련인데, 하물며 원한이 뼛속까지 깊게 사무친 앙숙 사이라면 두말할 나위도 없다.
"신성한 안식을 취해야 할 사자(死者)를 강제로 되살려 불결한 전쟁에 사용하는 것은 중대한 신성 모독! 더 이상은 용납할 수 없다! 제 13 신성기사단장의 이름으로, 이 사악하고 더러운 악마들을 그들이 원래 살던 지옥으로 돌려보낼 것을 명한다!"
팰러딘에게만 수여되는 오러 블레이드를 뽑아들고 진격 명령을 내리는 콜드 블러드. 그리고 그의 뒤를 따라 쏟아져 들어오는 흰색 갑옷의 기사단. 사실 저정도 병력은 좀비의 압도적인 숫자로 밀어붙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마스터! 하늘에서... 하늘에서부터 천사들이 침공을 시작했습니다!"
전령이 보낸 보고가 아니더라도, 내 눈에도 보인다. 언제나 하늘 가득히 뒤덮고 있던 먹구름이 걷히며 한줄기 햇살이 비쳐들어오는 것이. 그리고 그 빛줄기를 따라 수많은 천사들이 날개를 펄럭이며 내려오는 것 까지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천사는 인간보다 그 크기가 크다고 오해하고 있다. 그러나 천사의 육신을 이루는 부분은 인간의 그것과 거의 흡사하다. 단지 천사의 경우는 그 뒤에 따르는 빛과 오러로 인해 그 크기가 더 커보이는 것일 뿐. 따라서 아무리 거대해보이는 주천사라 할지라도 실제 크기는 그다지 큰 것이 아니다... 라는 사실은 알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상상을 초월하는 존재 앞에선 주눅이 들기 마련이다.
"신의 뜻에 따라, 테라를 어지럽히는 이 이교도의 국가를 소멸시킨다! 보라, 천상의 존재들이 우리의 정의를 입증하고 있다! 싸워라! 신의 뜻에 따라 싸우는 그대에게 천국이 보장되어있다!"
끊임없이 병사들을 독려하는 콜드 블러드의 목소리가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도 들려온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녀석의 우렁찬 목소리보다 주천사의, 거의 들릴락말락한 날개 소리가 더 무섭게 느껴진다. 거의 내 앞까지 다가온 주천사. 거대한 빛에 감싸여 그 본체는 잘 보이지 않지만, 존재감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이 지상에 머물러서는 안될 존재가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것이다.
"알고 있겠지. 당신들의 지상 강림 자체가 벌써부터 이 테라의 질서를 파괴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천사를 노려보며 씹어 뱉듯이 던진 한마디. 굳이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뜻밖에도 내 머릿속으로 직접, 명확한 의지가 전달되어져 왔다.
"우리들은 자의식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가 아닙니다. 테라의 질서와는 무관하게, 단지 신앙심에 의해 모습을 나타낼 뿐."
"그러나 아무리 천상의 존재들이라 하더라도 테라의 질서에 의해, 그리고 인과율에 의한 절대 법칙에 의해 구성되는 존재임에는 분명하지 않은가."
"우리의 강림이 결국 모든 존재의 소멸을 가져오게 된다 할지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나는 파멸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니까."
"그런가... 테라의 멸망을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런 식으로 나온다는 말이지... 결국 모든 원인은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마음대로 날뛰는 콜드 블러드같은 녀석들에게 있는 것이로군."
"그도 어렴풋이 알고는 있습니다. 단지 절대적인 신앙심에 의해 인정하지 않을 뿐."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없다는 듯이 주천사가 거대한 칼을 들어올렸다.
"자, 시간을 너무 끌었군요. 이제 끝을 내 볼까요?"
"날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을텐데."
"후훗. 벌써 말했지 않습니까. 나는 파멸로 가는 길이란 것을 알면서도 그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말을 끝마침과 동시에 나를 향해 휘둘러지는거대한 빛의 검. 그러나 그 거대한 검은 내가 발생시키는 검은 마나의 기류에 휩쓸려 순식간에 흩어져 버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주천사의 본체를 꿰뚫는 나의 마법.
다른 생명체와는 달리 비명도 지르지 않고, 피도 한방울 흘리지 않는다. 단지 수많은 빛의 덩어리로 분산되어 흩날릴 뿐.
"어차피 부활하겠지만, 그때까지만이라도 편안히 쉬어두라구."
주천사를 처리하고 나서 고개를 들자, 그 잠깐사이에 전황은 훨씬 더 안좋은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콜드 블러드를 비롯한 기사단은 좀비의 방어벽에 막혀 그다지 전진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하늘에서부터 수직으로 내려꽂히는 천사들의 공격엔 아무리 많은 좀비라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가끔씩 반격하는 좀비들에게 걸려 지상으로 추락하고 소멸하는 천사들도 있었지만 이는 극소수일 뿐. 멀쩡한 국력으로도 막아내기 껄끄러운 상대를, 연이은 침략으로 인해 만신창이가 된 군대로 막아낸다는 것은 애초부터 기대하기 힘든 일이었다.
"클라셋 프로스트(Clarsett Frost)경."
"네, 마스터."
신성기사단과 비슷한 갑옷을 입은 기사 한명이 내 뒤에서 대답했다. 백마를 타고 흰색 갑옷과 흰색 투구에 거대한 랜스(마상용 장창)를 장비한 채 우뚝 서있는 기사. 어둠의 기운 일색인 나의 군단에서 몇 안되는 백마법의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다.
내가 겨우겨우 설득시켜 영입한 백기사, 클라셋 프로스트. 처음에 그를 포섭할 때만 하더라도 그는 '백기사가 어찌 흑마법사의 아래 들어갈 수 있겠느냐'며 완강히 거절했었지만, 테라의 질서에 대해, 그리고 죽음이 그 질서의 한 부분이라는 것에 대해 설명하고, 내가 다른 네크로맨서들과는 달리 테라의 절대법칙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을 납득시키자 결국 나와 함께 일하게 된 인물이었다.
"저기서 설쳐대는 콜드 블러드라는 작자는 단지 신의 이름을 앞세워 테라의 질서를 파괴하는 광신도에 불과하다. 파괴의 법칙을 수호하는 내가 저따위 광신도에게 무너진다면 아마게돈이 벌어질 날도 머지 않았다는 거겠지. 그러나 불행히도 지금 상황은 그다지 낙관적이지 못해."
"알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면 세시간 이내로 모든 병력이 전멸하게 됩니다."
"그래. 불행히도 행운의 여신은 날 버린것 같다. 뭐, 원래 그따위 여신에게 별로 의존하지도 않았지만 말이야."
"하지만 그 대신 복수의 여신이 미소를 짓지 않습니까?"
"훗. 복수도 힘이 있어야 하는 법. 지금처럼 국가 존망이 위태로울 때는 복수의 여신이 아무리 도와준다고 해도 소용 없지. 자네도 보다시피 우리의 병력은 거의 궤멸 직전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은 단 하나뿐."
나는 뒤돌아서서 백기사, 클라셋 프로스트의 눈을,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투구에 나 있는 구멍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저 광신도의 우두머리, 콜드 블러드만 처리한다면 천사들은 모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마음같아서는 내가 직접 나서고 싶지만, 기사단 단장이라는 자와 일대 일로 칼부림을 했다간 나만 위험해지겠지. 그래서..."
"제가 그와 결투를 하면 되겠군요."
"할 수 있겠나?"
"이길 자신은 있습니다만..."
클라셋 프로스트의 시선이 전장 저 너머의 콜드 블러드에게 향했다.
"문제는 어떻게 저기까지 가느냐 하는 겁니다. 천사들이 길을 막고 있는데다가, 소멸시켜도 잠시 후면 부활해버리기 때문에 콜드 블러드에게 다가가기도 전에 제가 먼저 당할 확률이 큽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하겠네. 오래 끌지는 못하겠지만 1~20분 정도 천사들을 묶어놓을 수는 있을 거야."
"알겠습니다, 마스터."
백기사의 출진 준비가 끝나자마자 나는 곧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두가지 마법을 동시에 시전해야 하기 때문에 정신력 소모가 극도로 심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어둠의 장막!"
내가 모은 마나를 한순간에 방출시키자, 천사들이 내려오며 뚫어놓았던 먹구름들이 다시 뭉치며 빛을 차단시켰다. 천계와의 연결이 끊어지자 당황하기 시작하는 천사들. 그에 비해 언데드 군단은 한층 더 힘을 얻어 대응한다.
"그리고..."
잠시의 쉴 틈도 없이 품속에서 주술용 단검을 꺼내든 나는, 왼손에 그 단검을 꽂으며 주문을 걸었다.
"피의 저주"
내 손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연기처럼 변해 전장에 흩뿌려진다. 붉은 기운을 띈 탁한 안개가 전쟁터를 뒤덮자, 지금까지 곧바로 부활하던 빛의 덩어리들이, 천사로 재생되지 못하고 그대로 사라져갔다.
"부탁하네, 클라셋 프로스트 경."
"네, 마스터"
용맹하게 달려나가는 백기사. 전신에 번쩍이는 흰색 장비를 해서인지, 마치 하얀 화살을 쏘아보낸 것처럼 직선을 그리며 난전중인 전쟁터를 돌진해 나간다. 게다가 내가 걸어놓은 마법의 효과가 더해져서, 거의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콜드 블러드의 앞까지 가는 데 성공했다.
"콜드 블러드! 백기사 클라셋 프로스트가 너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네놈은! 감히 백기사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네크로맨서에게 영혼을 판 클라셋 프로스트!"
"훗. 이단 심판관의 가면을 쓰고 사람 불태우는 데 취미를 붙인 네놈에게 그런 소리를 듣고싶지는 않다."
"뭐라구! 신성 기사단에서 쫓겨난 파문 기사 주제에! 이 배신자!"
"자신의 위선에 빠져 광신도가 되어버린 네놈이, 테라 전체의 질서를 확립한다는 큰 뜻을 가진 나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도 않는다. 자, 덤벼라!"
그리고 곧이어 시작된 두 기사의 결투. 길이가 월등히 긴 랜스를 무기로 사용하는 클라셋 프로스트가 일반적으로 유리해 보였지만, 콜드 블러드가 사용하는 검은 오러 블레이드. 신성 기사단 단장에게만 허용되는, 신성력으로 휘감긴 장검에 베인다는 것은 그대로 죽음이라는 결과를 낳게 된다.
"하압!"
"찻!"
그 둘이 싸우는 곳과 내가 서있는 곳은 상당히 멀리 떨어져있지만, 나는 수정구를 통해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한번 치고 빠져서 거리를 유지한다음, 다시 달려들며 랜스로 스치고 지나가는 클라셋 프로스트와, 어떻게든 랜스를 쳐 내서 근접전으로 몰고 가려는 콜드 블러드. 장거리 공격과 단거리 공격이라는 차이 때문의 둘의 싸움은 장기전의 양상으로 치닫고 있었다. 양쪽의 말도 다 지치고, 두 기사의 갑옷 곳곳에도 크고 작은 상처가 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끝없이 계속될 것만 같았던 팽팽한 균형이 깨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휘익!"
"퍽!"
콜드 블러드의 손에서 한줄기 빛이 뻗어나와 클라셋 프로스트의 갑옷을 관통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 위에서 떨어지는 클라셋 프로스트. 그가 떨어짐과 동시에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콜드 블러드, 저자식이!"
처음에는 백마법을 쓴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지만, 백마법 중에는 저런 살상용 마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답은 단 한가지. 녀석이 들고있는 석궁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정당한 결투였다면 끝까지 상대했겠지만, 배신자를 상대로 시간을 끌 생각은 없다. 모두 진격!"
억지로 이유를 뜯어붙여서 자신을 합리화 시킨다 이건가. 역시 광신도다운 발상이야.
"크큿. 흑마법을 배웠으면 크게 될 놈이었군."
"마스터!"
내가 웃음을 흘리며 농담을 하자 사신 켄톤이 쌓여있는 시체더미 속에서 아지랑이처럼 홀연히 나타나며 말했다.
"마스터, 지금 그렇게 여유부리실 때가 아닙니다... 전 병력이 전멸의 위기에 놓여있습니다. 피신을 하실 것인지, 반격을 하실 것인지, 어서 빨리 결단을 내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여기서 도망친다고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다른 녀석같았으면 자신이 빼앗은 땅에 만족하고 그냥 주저 앉겠지만, 콜드 블러드, 저놈은 달라. 저녀석의 목적은 영토가 아니라 내 목숨이다."
"그러면?"
"끝났어. 모든 것이 다 끝난 거다."
"알긴 아는군!"
어느새 내 코앞에 다가선 콜드 블러드. 사방은 신성 기사단으로 포위되어 버렸다. 천사들 또한 내 머리 위를 날아다니고 있다. 하늘을 나는 재주가 있어도 도망치지 못할 정도의 철저한 포위망.
"제 13..."
"제 13 신성기사단 단장, 지그프리트 폰 러쎌이 네놈이라는 사실은 다 알고있으니 본론만 말해."
"좋아. 흑마법사 'N", 순순히 포기하고 이단 재판에 응해라!"
"이단 재판?"
"그렇다. 지금까지 네가 저지른 죄를 생각하면, 지금 이자리에서 즉시 처단해야 마땅하지만, 재판을 통해 회개의 기회를 주마."
"그래, 그 잘난 종교 재판을 빌미로 네가 그동안 해보고 싶었던 고문을 하나하나 다 실습해보고 싶은 모양이군?"
"무슨 소리냐!"
"다 알고있어. 이단 심판관치고 남의 고통에서 행복감을 느끼지 않는 놈이 없다는 것 정도는 말이야."
"이이... 결국 마지막 기회마져도 차 버리는 건가, 마스터 'N'."
"너도 알고 있을텐데. 어떤 것이 진정한 정의인지는 말이야."
"더 이상 말할 가치도 없다. 즉결 처단이다!"
더 이상은 참지 못하겠는지, 아니면 그 이상 말했다가는 자신이 절대적으로 믿고 있는 신념이 흔들릴 것이 두려웠는지, 콜드 블러드는 오러 블레이드를 치켜들었다.
푸른색의 밝은 기운이 감도는 롱 소드. 저기에 베이면 아무리 상위 네크로맨서라 하더라도 부활은 힘들 것이다. 하긴, 부활한다고 해도 모든 영토를 잃고 난 후일테니 애써서 부활할 필요도 없겠지.
그래, 이걸로 끝인가.
이상하리만치 담담해진 나는 눈을 감았다. 정지해버린 듯한 시간. 방금전까지만 해도 시끄럽던 전쟁터에 적막함만이 흐르고, 그 적막한 가운데서 콜드 블러드가 칼을 내려치는 소리만이 유난히 크게 들렸다.
마지막까지 버티면 콜드 블러드를 비롯한 성기사 몇명 정도는 같이 끌고 죽을 수도 있겠지만, 끝까지 살기위해 발악했다는 소리는 듣기 싫다. 그래, 그냥 조용히... 이걸로 끝내는 거다.
그런데...
칼을 내려치는 소리가 나고 꽤 시간이 흘렀는데도 내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 그 대신 이어지는 콜드 블러드의 비명 소리.
"으아악!"
내가 눈을 떴을 때, 콜드 블러드는 이미 강한 충격에 의해 말에서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내 앞에 선 회색 망토의 마법사.
"제가 약간 늦을 뻔 했군요."
"너는... 누구지?"
"제 이름을 아실 것까지는 없습니다. 그저 테라의 균형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유지 위원회의 한사람에 불과하지요."
"유지 위원회...라..."
들은 적 있다. 강대국이 약소국을 일방적으로 침략하는 것을 막기 위해 조직된 비밀 결사단체라는 말도 있고, 여러 국가가 한 나라를 연합 공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제국에서 파견된 엘리트 마법사 집단이라는 말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직접 보게 될 줄이야.
"마스터 'N'의 국가는 짧은 기간동안 너무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따라서 이 국가는 당분간 우리 유지 위원회의 보호하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보호기간 동안 시도되는 모든 침략 행위는 테라의 질서를 파괴하는 자에 의한 것으로 간주, 모두 무력화 시킬 것입니다."
회색 망토로 전신을 가리고, 후드를 푹 내려써서 얼굴도 보이지 않고, 심지어는 음성조차도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무미건조한 목소리. 이런 마법사 한명으로 모든 침략을 막아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걱정 마시길. 타 국가의 침입을 막는 것은 저 혼자로도 충분한 일입니다."
마치 내 마음속을 읽은 것처럼 말하는 유지 위원회의 마법사.
"말도 안돼, 이건!"
충격으로 인해 튕겨져 나갔던 콜드 블러드가 다시 일어나 달려들며 소리쳤다.
"신의 뜻에 거역하는 자는 처단한다! 그게 정의야!"
"아까까지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의 신의 뜻은 저렇습니다."
억양없는 목소리로 말하며 그가 가리키는 곳에선 천사들이 하나,둘씩 하늘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럴수가... 이번에야말로 이단을 뿌리뽑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콜드 블러드, 이제 당신의 국가로 돌아가십시요. 아니면 강제로 송환시키겠습니다."
"빌어먹을! 이대로 물러서야 한다니!"
울분을 삭히며 겨우 물러서는 콜드 블러드와 그의 기사단이 국경을 넘어 돌아가자, 내 국경 전역에 걸쳐 무색의 강렬한 마나가 솟아 나오기 시작했다.
"절대 방벽입니다, 마스터 'N'. 당신의 국가가 어느정도 회복할 때 까지는 이 방벽이 모든 공격으로부터 보호해 줄 것입니다."
"당신, 혹시 그 여자가 보낸건가?"
회색 망토의 마법사는 잠시 흠칫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지만, 그야말로 잠시일 뿐. 곧이어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분을 '그 여자'라고 지칭하시다니. 놀랍군요."
"맞는 건가?"
"글쎄요, 일단은 그렇다고 해 두죠. 하지만 당신이 아는 그분의 모습이 전부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겁니다."
"나도 대강은 예상하고 있었어, 보통 여자는 아니라는 걸. 겉보기에는 평범한..."
"더 이상 얘기하시면 신변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 알았어. 그만 두도록 하지. 언젠가는 모두가 알게 될 일이지만."
"과연, 그럴까요?"
미소를 띄우며,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미소를 띄웠다고 생각된다) 사라져버린 마법사. 그리고 그 뒤엔 강력한 방벽만이 남았다.
"마... 마스터,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소멸의 각오까지 해야했던 켄톤이 내게 질문했다.
"너무 많은 것을 알려고 하지는 마. 지금은 그저 운 좋게 시간을 벌었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야. 단지 그뿐이라구. 크크큭..."
웃지 않으려고 했지만, 웃음이 터져나왔다.
6000에이커를 상회하던 영토의 40% 이상을 빼앗기고, 130만에 달하던 좀비의 대군이 전멸당한데다가 마나, 겔드 모두가 바닥을 드러낸 지금. 배신자와 부상자를 제외하고도 영웅이 세명이나 죽어버린 암담한 이 현실 속에서도 웃음이 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래, 난 살아남았다. 이것으로 좋은 거야.
배신, 마나 폭주, 연이은 강대국들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난 살아있다.
다른 모든 문제는 뒤로 미룰 수 있다.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
비록 지금은 좀 쉬어야 할 때이지만...
난 반드시 다시 일어선다.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는 생각하지 마라...
은으로 특수처리한 검이나 하얀색의 갑옷 등은 멋있기는 했지만, 그야말로 짐승이나 다름없는 늑대인간들을 상대할 때라면 또 모를까, 나와 같은 상위 네크로맨서를 위협하기엔 턱없이 나약한 장비였고, 때문에 나를 비롯한 여러 흑마법사들은 신성기사단을 그저 약간 귀찮은 날파리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초대 신성기사단이 창설되고 약 45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왜 내가 그때 저놈들을 쓸어버리지 않았던가'라고 땅을 치며 후회를 할 정도로 막강한 세력을 지닌 단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솔직히 말해, 고대의 여러 왕국들이 멸망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새로 세워진 제국의 여왕이 마법사들끼리의 경쟁을 부추기며 서로 싸우는 것을 보고 즐기는 변태가 아니었더라면, 그리고 무엇보다도 테라의 여러 신들이 너무나도 약해진 백마법사들을 돕기로 결정하지 않았더라면, 그까짓 신성기사단 쯤은 아침 식사꺼리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테라의 신들은, 심지어는 사탄과 루시퍼 마저도 자신의 먹이인 인간들이 모두 파멸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백마법의 영역에 천사들을 지원하는 것을 승인하고야 말았고 그 결과는 흑마법사들이 지배하는 나라의 하늘에서 수많은 천사들이 쏟아져 내려오며 공격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말았다.
솔직히 그 당시의 나는 신들의 결정에 어느 정도는 찬성을 하고 있었다. 흡혈귀 약간만 적국 영토에 흘려보내도 밤마다 계속되는 공포의 나날을 견디지 못하고 국가 전체가 패망할 정도였으니, 그런 상태로 가다간 몇세기 지나지도 않아 인간의 씨가 마를 지경이었고, 때문에 흑마법사들의 활약을 마냥 기뻐만하던 삼류 악당들과는 달리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지 않으면 테라는 아마게돈을 맞이하기도 전에 먼저 멸망해버릴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천사와 대천사들이 전장에 나타나기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그래, 이정도는 되어야 싸울 맛이 나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도 않아 주천사 클래스가 그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데는 아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주천사라니...!
비록 신앙심이 깊지 않으면 불러낼 수 없는 존재라는 제약이 붙었다 하더라도, 천계 중급 클래스인 주천사를 지상에 지원하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9계급 중 4열에 속하는 권천사, 능천사들이... 최후의 심판 때 악마와 싸우기 위해 존재한다는 그들이 왜 벌써부터 나타나는 거냔 말이다!
주천사들이 그 모습을 드러낸 후로 전황은 우리에게 극도로 불리해졌다. '신이 내린 기적'을 직접 체험한 백성들은 백마법을 신봉하겠다며 우루루 몰려갔고, 전쟁에 있어서도 주 전력이었던 리치와 흡혈귀들은 천적이라 할 수 있는 천사들에게 씨몰살을 당해 연전연패를 기록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가장 열받는 것은 그동안 제국 각처에서 숨죽이고 있던 신성 기사단의 찌꺼기들이 천사의 권위를 등에 업고 독립된 세력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변변한 마법 하나 쓸 줄도 모르는 것들이 감히 아크메이지들이 지배하는 테라에 겁도 없이 발을 들여놓다니!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이렇게 생각했고, 심지어는 백마법사들조차 그들이 얼마 못가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모두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 버렸고, 신성 기사단은 그들 특유의 검술과 무력, 그리고 광신에 가까운 신앙심으로 마법력의 부족을 커버하며 테라의 백마법 세력 중 가장 강대한 무력 집단으로 자리잡아갔다. 제국 각처에서 자신만의 영역을 주장하며 나타난 이들은 현재 모두 13개의 기사단을 이루고 있고, 그들 하나하나가 왠만한 상위 아크메이지와 맞먹는 세력을 형성했다.
그리고..
지금 나에게 은촉 화살을 날린 저 기사가 (비록 거리가 멀어 그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바로 제 13 신성기사단의 단장인 "Cold Blood"인 것이다. 그의 본명은 지그프리트 폰 러쎌. 그러나 그의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잔인무도한 냉혈한. 공포의 이단 심판관. 잔혹한 천사의 단죄. 백마법사들이 주장하는 '사랑과 평화'와는 절대적으로 정반대에 위치한 인간. 그가 바로 콜드 블러드다. 그의 이단 심판은 너무도 잔혹해서, 지금까지 100여개의 마을에서 최소한 1700개 이상의 십자가가 이교도를 매달고 불태워졌다고 하니, 보통 사람들이 콜드 블러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더 난감한 사실은 제 13 신성기사단의 영지와 내 영토간의 거리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탓에 툭하면 서로 투닥거리며 전쟁을 벌이는, 매우매우 불편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데 있다. 절친한 동맹이라도 내가 지금 처한 곤경을 보면 '저걸 쳐서 한몫 잡아 봐?'라는 생각을 갖기 마련인데, 하물며 원한이 뼛속까지 깊게 사무친 앙숙 사이라면 두말할 나위도 없다.
"신성한 안식을 취해야 할 사자(死者)를 강제로 되살려 불결한 전쟁에 사용하는 것은 중대한 신성 모독! 더 이상은 용납할 수 없다! 제 13 신성기사단장의 이름으로, 이 사악하고 더러운 악마들을 그들이 원래 살던 지옥으로 돌려보낼 것을 명한다!"
팰러딘에게만 수여되는 오러 블레이드를 뽑아들고 진격 명령을 내리는 콜드 블러드. 그리고 그의 뒤를 따라 쏟아져 들어오는 흰색 갑옷의 기사단. 사실 저정도 병력은 좀비의 압도적인 숫자로 밀어붙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마스터! 하늘에서... 하늘에서부터 천사들이 침공을 시작했습니다!"
전령이 보낸 보고가 아니더라도, 내 눈에도 보인다. 언제나 하늘 가득히 뒤덮고 있던 먹구름이 걷히며 한줄기 햇살이 비쳐들어오는 것이. 그리고 그 빛줄기를 따라 수많은 천사들이 날개를 펄럭이며 내려오는 것 까지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천사는 인간보다 그 크기가 크다고 오해하고 있다. 그러나 천사의 육신을 이루는 부분은 인간의 그것과 거의 흡사하다. 단지 천사의 경우는 그 뒤에 따르는 빛과 오러로 인해 그 크기가 더 커보이는 것일 뿐. 따라서 아무리 거대해보이는 주천사라 할지라도 실제 크기는 그다지 큰 것이 아니다... 라는 사실은 알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상상을 초월하는 존재 앞에선 주눅이 들기 마련이다.
"신의 뜻에 따라, 테라를 어지럽히는 이 이교도의 국가를 소멸시킨다! 보라, 천상의 존재들이 우리의 정의를 입증하고 있다! 싸워라! 신의 뜻에 따라 싸우는 그대에게 천국이 보장되어있다!"
끊임없이 병사들을 독려하는 콜드 블러드의 목소리가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도 들려온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녀석의 우렁찬 목소리보다 주천사의, 거의 들릴락말락한 날개 소리가 더 무섭게 느껴진다. 거의 내 앞까지 다가온 주천사. 거대한 빛에 감싸여 그 본체는 잘 보이지 않지만, 존재감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이 지상에 머물러서는 안될 존재가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것이다.
"알고 있겠지. 당신들의 지상 강림 자체가 벌써부터 이 테라의 질서를 파괴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천사를 노려보며 씹어 뱉듯이 던진 한마디. 굳이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뜻밖에도 내 머릿속으로 직접, 명확한 의지가 전달되어져 왔다.
"우리들은 자의식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가 아닙니다. 테라의 질서와는 무관하게, 단지 신앙심에 의해 모습을 나타낼 뿐."
"그러나 아무리 천상의 존재들이라 하더라도 테라의 질서에 의해, 그리고 인과율에 의한 절대 법칙에 의해 구성되는 존재임에는 분명하지 않은가."
"우리의 강림이 결국 모든 존재의 소멸을 가져오게 된다 할지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나는 파멸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니까."
"그런가... 테라의 멸망을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런 식으로 나온다는 말이지... 결국 모든 원인은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마음대로 날뛰는 콜드 블러드같은 녀석들에게 있는 것이로군."
"그도 어렴풋이 알고는 있습니다. 단지 절대적인 신앙심에 의해 인정하지 않을 뿐."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없다는 듯이 주천사가 거대한 칼을 들어올렸다.
"자, 시간을 너무 끌었군요. 이제 끝을 내 볼까요?"
"날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을텐데."
"후훗. 벌써 말했지 않습니까. 나는 파멸로 가는 길이란 것을 알면서도 그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말을 끝마침과 동시에 나를 향해 휘둘러지는거대한 빛의 검. 그러나 그 거대한 검은 내가 발생시키는 검은 마나의 기류에 휩쓸려 순식간에 흩어져 버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주천사의 본체를 꿰뚫는 나의 마법.
다른 생명체와는 달리 비명도 지르지 않고, 피도 한방울 흘리지 않는다. 단지 수많은 빛의 덩어리로 분산되어 흩날릴 뿐.
"어차피 부활하겠지만, 그때까지만이라도 편안히 쉬어두라구."
주천사를 처리하고 나서 고개를 들자, 그 잠깐사이에 전황은 훨씬 더 안좋은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콜드 블러드를 비롯한 기사단은 좀비의 방어벽에 막혀 그다지 전진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하늘에서부터 수직으로 내려꽂히는 천사들의 공격엔 아무리 많은 좀비라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가끔씩 반격하는 좀비들에게 걸려 지상으로 추락하고 소멸하는 천사들도 있었지만 이는 극소수일 뿐. 멀쩡한 국력으로도 막아내기 껄끄러운 상대를, 연이은 침략으로 인해 만신창이가 된 군대로 막아낸다는 것은 애초부터 기대하기 힘든 일이었다.
"클라셋 프로스트(Clarsett Frost)경."
"네, 마스터."
신성기사단과 비슷한 갑옷을 입은 기사 한명이 내 뒤에서 대답했다. 백마를 타고 흰색 갑옷과 흰색 투구에 거대한 랜스(마상용 장창)를 장비한 채 우뚝 서있는 기사. 어둠의 기운 일색인 나의 군단에서 몇 안되는 백마법의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다.
내가 겨우겨우 설득시켜 영입한 백기사, 클라셋 프로스트. 처음에 그를 포섭할 때만 하더라도 그는 '백기사가 어찌 흑마법사의 아래 들어갈 수 있겠느냐'며 완강히 거절했었지만, 테라의 질서에 대해, 그리고 죽음이 그 질서의 한 부분이라는 것에 대해 설명하고, 내가 다른 네크로맨서들과는 달리 테라의 절대법칙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을 납득시키자 결국 나와 함께 일하게 된 인물이었다.
"저기서 설쳐대는 콜드 블러드라는 작자는 단지 신의 이름을 앞세워 테라의 질서를 파괴하는 광신도에 불과하다. 파괴의 법칙을 수호하는 내가 저따위 광신도에게 무너진다면 아마게돈이 벌어질 날도 머지 않았다는 거겠지. 그러나 불행히도 지금 상황은 그다지 낙관적이지 못해."
"알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면 세시간 이내로 모든 병력이 전멸하게 됩니다."
"그래. 불행히도 행운의 여신은 날 버린것 같다. 뭐, 원래 그따위 여신에게 별로 의존하지도 않았지만 말이야."
"하지만 그 대신 복수의 여신이 미소를 짓지 않습니까?"
"훗. 복수도 힘이 있어야 하는 법. 지금처럼 국가 존망이 위태로울 때는 복수의 여신이 아무리 도와준다고 해도 소용 없지. 자네도 보다시피 우리의 병력은 거의 궤멸 직전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은 단 하나뿐."
나는 뒤돌아서서 백기사, 클라셋 프로스트의 눈을,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투구에 나 있는 구멍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저 광신도의 우두머리, 콜드 블러드만 처리한다면 천사들은 모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마음같아서는 내가 직접 나서고 싶지만, 기사단 단장이라는 자와 일대 일로 칼부림을 했다간 나만 위험해지겠지. 그래서..."
"제가 그와 결투를 하면 되겠군요."
"할 수 있겠나?"
"이길 자신은 있습니다만..."
클라셋 프로스트의 시선이 전장 저 너머의 콜드 블러드에게 향했다.
"문제는 어떻게 저기까지 가느냐 하는 겁니다. 천사들이 길을 막고 있는데다가, 소멸시켜도 잠시 후면 부활해버리기 때문에 콜드 블러드에게 다가가기도 전에 제가 먼저 당할 확률이 큽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하겠네. 오래 끌지는 못하겠지만 1~20분 정도 천사들을 묶어놓을 수는 있을 거야."
"알겠습니다, 마스터."
백기사의 출진 준비가 끝나자마자 나는 곧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두가지 마법을 동시에 시전해야 하기 때문에 정신력 소모가 극도로 심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어둠의 장막!"
내가 모은 마나를 한순간에 방출시키자, 천사들이 내려오며 뚫어놓았던 먹구름들이 다시 뭉치며 빛을 차단시켰다. 천계와의 연결이 끊어지자 당황하기 시작하는 천사들. 그에 비해 언데드 군단은 한층 더 힘을 얻어 대응한다.
"그리고..."
잠시의 쉴 틈도 없이 품속에서 주술용 단검을 꺼내든 나는, 왼손에 그 단검을 꽂으며 주문을 걸었다.
"피의 저주"
내 손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연기처럼 변해 전장에 흩뿌려진다. 붉은 기운을 띈 탁한 안개가 전쟁터를 뒤덮자, 지금까지 곧바로 부활하던 빛의 덩어리들이, 천사로 재생되지 못하고 그대로 사라져갔다.
"부탁하네, 클라셋 프로스트 경."
"네, 마스터"
용맹하게 달려나가는 백기사. 전신에 번쩍이는 흰색 장비를 해서인지, 마치 하얀 화살을 쏘아보낸 것처럼 직선을 그리며 난전중인 전쟁터를 돌진해 나간다. 게다가 내가 걸어놓은 마법의 효과가 더해져서, 거의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콜드 블러드의 앞까지 가는 데 성공했다.
"콜드 블러드! 백기사 클라셋 프로스트가 너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네놈은! 감히 백기사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네크로맨서에게 영혼을 판 클라셋 프로스트!"
"훗. 이단 심판관의 가면을 쓰고 사람 불태우는 데 취미를 붙인 네놈에게 그런 소리를 듣고싶지는 않다."
"뭐라구! 신성 기사단에서 쫓겨난 파문 기사 주제에! 이 배신자!"
"자신의 위선에 빠져 광신도가 되어버린 네놈이, 테라 전체의 질서를 확립한다는 큰 뜻을 가진 나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도 않는다. 자, 덤벼라!"
그리고 곧이어 시작된 두 기사의 결투. 길이가 월등히 긴 랜스를 무기로 사용하는 클라셋 프로스트가 일반적으로 유리해 보였지만, 콜드 블러드가 사용하는 검은 오러 블레이드. 신성 기사단 단장에게만 허용되는, 신성력으로 휘감긴 장검에 베인다는 것은 그대로 죽음이라는 결과를 낳게 된다.
"하압!"
"찻!"
그 둘이 싸우는 곳과 내가 서있는 곳은 상당히 멀리 떨어져있지만, 나는 수정구를 통해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한번 치고 빠져서 거리를 유지한다음, 다시 달려들며 랜스로 스치고 지나가는 클라셋 프로스트와, 어떻게든 랜스를 쳐 내서 근접전으로 몰고 가려는 콜드 블러드. 장거리 공격과 단거리 공격이라는 차이 때문의 둘의 싸움은 장기전의 양상으로 치닫고 있었다. 양쪽의 말도 다 지치고, 두 기사의 갑옷 곳곳에도 크고 작은 상처가 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끝없이 계속될 것만 같았던 팽팽한 균형이 깨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휘익!"
"퍽!"
콜드 블러드의 손에서 한줄기 빛이 뻗어나와 클라셋 프로스트의 갑옷을 관통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 위에서 떨어지는 클라셋 프로스트. 그가 떨어짐과 동시에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콜드 블러드, 저자식이!"
처음에는 백마법을 쓴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지만, 백마법 중에는 저런 살상용 마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답은 단 한가지. 녀석이 들고있는 석궁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정당한 결투였다면 끝까지 상대했겠지만, 배신자를 상대로 시간을 끌 생각은 없다. 모두 진격!"
억지로 이유를 뜯어붙여서 자신을 합리화 시킨다 이건가. 역시 광신도다운 발상이야.
"크큿. 흑마법을 배웠으면 크게 될 놈이었군."
"마스터!"
내가 웃음을 흘리며 농담을 하자 사신 켄톤이 쌓여있는 시체더미 속에서 아지랑이처럼 홀연히 나타나며 말했다.
"마스터, 지금 그렇게 여유부리실 때가 아닙니다... 전 병력이 전멸의 위기에 놓여있습니다. 피신을 하실 것인지, 반격을 하실 것인지, 어서 빨리 결단을 내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여기서 도망친다고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다른 녀석같았으면 자신이 빼앗은 땅에 만족하고 그냥 주저 앉겠지만, 콜드 블러드, 저놈은 달라. 저녀석의 목적은 영토가 아니라 내 목숨이다."
"그러면?"
"끝났어. 모든 것이 다 끝난 거다."
"알긴 아는군!"
어느새 내 코앞에 다가선 콜드 블러드. 사방은 신성 기사단으로 포위되어 버렸다. 천사들 또한 내 머리 위를 날아다니고 있다. 하늘을 나는 재주가 있어도 도망치지 못할 정도의 철저한 포위망.
"제 13..."
"제 13 신성기사단 단장, 지그프리트 폰 러쎌이 네놈이라는 사실은 다 알고있으니 본론만 말해."
"좋아. 흑마법사 'N", 순순히 포기하고 이단 재판에 응해라!"
"이단 재판?"
"그렇다. 지금까지 네가 저지른 죄를 생각하면, 지금 이자리에서 즉시 처단해야 마땅하지만, 재판을 통해 회개의 기회를 주마."
"그래, 그 잘난 종교 재판을 빌미로 네가 그동안 해보고 싶었던 고문을 하나하나 다 실습해보고 싶은 모양이군?"
"무슨 소리냐!"
"다 알고있어. 이단 심판관치고 남의 고통에서 행복감을 느끼지 않는 놈이 없다는 것 정도는 말이야."
"이이... 결국 마지막 기회마져도 차 버리는 건가, 마스터 'N'."
"너도 알고 있을텐데. 어떤 것이 진정한 정의인지는 말이야."
"더 이상 말할 가치도 없다. 즉결 처단이다!"
더 이상은 참지 못하겠는지, 아니면 그 이상 말했다가는 자신이 절대적으로 믿고 있는 신념이 흔들릴 것이 두려웠는지, 콜드 블러드는 오러 블레이드를 치켜들었다.
푸른색의 밝은 기운이 감도는 롱 소드. 저기에 베이면 아무리 상위 네크로맨서라 하더라도 부활은 힘들 것이다. 하긴, 부활한다고 해도 모든 영토를 잃고 난 후일테니 애써서 부활할 필요도 없겠지.
그래, 이걸로 끝인가.
이상하리만치 담담해진 나는 눈을 감았다. 정지해버린 듯한 시간. 방금전까지만 해도 시끄럽던 전쟁터에 적막함만이 흐르고, 그 적막한 가운데서 콜드 블러드가 칼을 내려치는 소리만이 유난히 크게 들렸다.
마지막까지 버티면 콜드 블러드를 비롯한 성기사 몇명 정도는 같이 끌고 죽을 수도 있겠지만, 끝까지 살기위해 발악했다는 소리는 듣기 싫다. 그래, 그냥 조용히... 이걸로 끝내는 거다.
그런데...
칼을 내려치는 소리가 나고 꽤 시간이 흘렀는데도 내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 그 대신 이어지는 콜드 블러드의 비명 소리.
"으아악!"
내가 눈을 떴을 때, 콜드 블러드는 이미 강한 충격에 의해 말에서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내 앞에 선 회색 망토의 마법사.
"제가 약간 늦을 뻔 했군요."
"너는... 누구지?"
"제 이름을 아실 것까지는 없습니다. 그저 테라의 균형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유지 위원회의 한사람에 불과하지요."
"유지 위원회...라..."
들은 적 있다. 강대국이 약소국을 일방적으로 침략하는 것을 막기 위해 조직된 비밀 결사단체라는 말도 있고, 여러 국가가 한 나라를 연합 공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제국에서 파견된 엘리트 마법사 집단이라는 말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직접 보게 될 줄이야.
"마스터 'N'의 국가는 짧은 기간동안 너무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따라서 이 국가는 당분간 우리 유지 위원회의 보호하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보호기간 동안 시도되는 모든 침략 행위는 테라의 질서를 파괴하는 자에 의한 것으로 간주, 모두 무력화 시킬 것입니다."
회색 망토로 전신을 가리고, 후드를 푹 내려써서 얼굴도 보이지 않고, 심지어는 음성조차도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무미건조한 목소리. 이런 마법사 한명으로 모든 침략을 막아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걱정 마시길. 타 국가의 침입을 막는 것은 저 혼자로도 충분한 일입니다."
마치 내 마음속을 읽은 것처럼 말하는 유지 위원회의 마법사.
"말도 안돼, 이건!"
충격으로 인해 튕겨져 나갔던 콜드 블러드가 다시 일어나 달려들며 소리쳤다.
"신의 뜻에 거역하는 자는 처단한다! 그게 정의야!"
"아까까지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의 신의 뜻은 저렇습니다."
억양없는 목소리로 말하며 그가 가리키는 곳에선 천사들이 하나,둘씩 하늘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럴수가... 이번에야말로 이단을 뿌리뽑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콜드 블러드, 이제 당신의 국가로 돌아가십시요. 아니면 강제로 송환시키겠습니다."
"빌어먹을! 이대로 물러서야 한다니!"
울분을 삭히며 겨우 물러서는 콜드 블러드와 그의 기사단이 국경을 넘어 돌아가자, 내 국경 전역에 걸쳐 무색의 강렬한 마나가 솟아 나오기 시작했다.
"절대 방벽입니다, 마스터 'N'. 당신의 국가가 어느정도 회복할 때 까지는 이 방벽이 모든 공격으로부터 보호해 줄 것입니다."
"당신, 혹시 그 여자가 보낸건가?"
회색 망토의 마법사는 잠시 흠칫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지만, 그야말로 잠시일 뿐. 곧이어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분을 '그 여자'라고 지칭하시다니. 놀랍군요."
"맞는 건가?"
"글쎄요, 일단은 그렇다고 해 두죠. 하지만 당신이 아는 그분의 모습이 전부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겁니다."
"나도 대강은 예상하고 있었어, 보통 여자는 아니라는 걸. 겉보기에는 평범한..."
"더 이상 얘기하시면 신변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 알았어. 그만 두도록 하지. 언젠가는 모두가 알게 될 일이지만."
"과연, 그럴까요?"
미소를 띄우며,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미소를 띄웠다고 생각된다) 사라져버린 마법사. 그리고 그 뒤엔 강력한 방벽만이 남았다.
"마... 마스터,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소멸의 각오까지 해야했던 켄톤이 내게 질문했다.
"너무 많은 것을 알려고 하지는 마. 지금은 그저 운 좋게 시간을 벌었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야. 단지 그뿐이라구. 크크큭..."
웃지 않으려고 했지만, 웃음이 터져나왔다.
6000에이커를 상회하던 영토의 40% 이상을 빼앗기고, 130만에 달하던 좀비의 대군이 전멸당한데다가 마나, 겔드 모두가 바닥을 드러낸 지금. 배신자와 부상자를 제외하고도 영웅이 세명이나 죽어버린 암담한 이 현실 속에서도 웃음이 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래, 난 살아남았다. 이것으로 좋은 거야.
배신, 마나 폭주, 연이은 강대국들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난 살아있다.
다른 모든 문제는 뒤로 미룰 수 있다.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
비록 지금은 좀 쉬어야 할 때이지만...
난 반드시 다시 일어선다.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는 생각하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