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흐르는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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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화폐 제도가 18세기에나 실현되었다고 하는데, 사실 조선의 화폐 제도는 초기부터 진행되었습니다. 아니 더 정확히는 고려시대부터 이미 '포화(면포 등을 화폐처럼 사용하는 것)'가 유통되고 있었고, 조선시대에서는 '저화(종이돈)'을 비롯한 다양한 화폐를 시도했던 것입니다.
문제는 국왕을 비롯하여 정부 각처에서 화폐의 필요성을 느끼고 계속 추진했지만, 당시 국민들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무엇보다도 신뢰를 얻기 어려웠던 것이 문제입니다. 게다가 조선이라는 나라는(고려도 마찬가지지만) 대다수 시기에 걸쳐서 각 지역에서 자급자족이 충분한 나라였습니다. 이쪽의 물건을 저쪽으로 옮기고, 저쪽을 이쪽으로 옮길 필요성도 매우 낮았습니다.(덧붙여 상업이 물건을 여기서 저기로 옮기기만 하는 일이라는 인식으로 인해 천시되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더욱이, 조선은 자원이 부족한 나라이기도 했습니다. 중국처럼 은이라도 잔뜩 나왔다면 은을 조각으로 잘라서 무게를 재어서 화폐로 쓰는 방법이라도 가능했겠지만, 그럴만한 여력이 없었습니다. 그나마 생산되는 금이나 은은 조공품으로 되어 있었기에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구리와 철은 조선의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한 기반 자원이었습니다. 중국과 일본. 인구면에서 몇 배나 차이나는 두 나라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어있는 상황에서 조선은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해 바둥대야만 했으니까요.
여러가지 이유를 대긴 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조선은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기에 충분한 인구와 자원을 가진 나라가 아니었고 정부에 대한 신뢰가 충분히 높지 않았다는데 있습니다. 이를테면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인구는 약 500만 이하로 당시 일본의 절반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인구 규모가 두배가 넘는데다 여러가지 이유로 교역의 필요성이 높아지고, 지하 자원도 더 풍부한 일본에서조차 화폐 경제가 발달하기는 힘든 상황에서 중국의 지원이 없이 조선에서 화폐 경제가 발달하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솔직히 중국에서조차 명나라에 들어 겨우겨우 전국적인 화폐 경제가 가닥을 잡아가고 있었으니까요.
흔히 유럽과 비교하면 동양에서 화폐 경제가 뒤진 것처럼 보이지만, 유럽도 생각만큼 화폐 경제가 일찍부터 발달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로마부터, 아니 그 전부터 화폐는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충분한 신뢰를 가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실례로 영어로 봉급(Salary)라는 말이 소금을 뜻하는 라틴어(Sal)에서 왔는데, 그건 로마에서 병사들의 급여를 '화폐'가 아닌 '소금'이라는 현물로 지급했기 때문입니다. 로마에는 분명히 데나리라는 통화가 있었지만, 그 데나리 화폐가 화폐로서 역할을 하는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리게 됩니다.
로마가, 그리고 명나라가 자국을 대표하는 화폐를 갖게 된 것은 그들의 경제 규모가 크고 국가의 신뢰가 높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들의 화폐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귀금속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은"이라는 귀금속이 화폐에 사용되었기 때문이죠.
동이나 철 같은 금속은 고대 세계라면 모를까 중세 이후에는 이미 귀금속이 아니었습니다. 그만큼 충분한 가치가 없죠. 하지만 은이나 금은 고대세계부터 계속 귀한 물건이었습니다. 사실 은이나 금으로 먹고 살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사실 금이나 은은 근대 세계까지 활용도가 높지 않았죠.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장점은 있지만, 뭔가 물건을 만들기엔 너무 무릅니다. 고작해야 장신구나 종교의 상징물 같은 것외에는 쓸모가 없죠.
하지만 '반짝거리는 금속'으로서의 금과 은은 사치와 부의 상징이었던 만큼 누구나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상품이었습니다. 게다가 금이나 은은 그 양이 매우 작고 양을 쉽게 늘릴 수 없기에 가치가 떨어질 일도 거의 없습니다. 변하지 않는만큼 양이 늘어난다고 해도 인구가 증가하는 만큼 금과 은의 가치가 유지되기 쉽습니다. 아니, 도리어 더 올라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대 세계로부터 금과 은은 일종의 화폐 역할을 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금과 은을 '물물 교환'의 중계 수단으로 사용했습니다. 어느 나라건 금과 은이 풍족한 나라는 없었으니까요. (특히 금은 화폐로 쓸만큼 넉넉할 가능성이 매우 낮았습니다.)
로마의 데나리 화폐가 국제 통화로서 가치를 갖게 되고 로마 내에서 어느 정도 유통된 것은 데나리 화폐가 은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로마가 사치를 배우게 되면서 상황은 달라집니다. 로마에서 가장 인기 높은 사치품, 비단을 구매하기 위해서 대량의 은이 로마에서 빠져나갔기 때문입니다.
결과 로마에서는 은이 부족해지고 데나리 은화에 점차 구리를 섞기 시작합니다. 그에 따라 데나리 화폐의 가치는 폭락하게 됩니다. 고대 세계에서 구리도 엄청나게 흔한 금속은 아니었지만, 은처럼 귀한 물건은 아니었거든요.
데나리 화폐의 가치가 폭락하면서 로마의 경제는 흔들리고 결국에는 화폐 경제가 붕괴됩니다.
이러한 것은 사실 중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를테면 중국에서도 정말로 널리 쓰이던 화폐는 바로 '은'이었거든요. 은의 생산이 어느 정도 안정적이었던 일본에서도 역시 은을 화폐 대신 사용했습니다.
중세에서 근대에 이르는 기간, 유럽에서 화폐가 거래된 것도 역시 귀금속을 화폐로 썼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 가장 신뢰가 높은 통화는 베네치아의 두카토로, 베네치아는 지중해 교역을 사실상 장악하고 금을 엄청나게 수입하여 두카토 금화를 만듭니다. 로마 등의 사례를 통해서 화폐의 가치를 유지하는 것이 교역국가의 생명줄이라 생각한 베네치아는 이 화폐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야말로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게 됩니다.
당시 베네치아의 경제력은 조선과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났습니다. 한때 거대 제국인 오스만 투르크 이상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이만한 경제력을 가진 베네치아가 화폐 경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유럽의 교역 규모가 생각보다 크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소규모 도시 국가에서나 조금씩 거래가 진행되었으니까요. 게다가 매우 귀한 금이었던 만큼 작은 크기로도 충분한 가치를 가질 수 있었거든요.(순도 98%가 넘는 금으로 된, 사실상 작은 금덩어리라서 베네치아 공화국이 망하고 한참 뒤인 1차 대전때까지 유럽에서 널리 사용되었을 정도입니다.)
정말로 교역 인구가 많았다면, 베네치아가 아니라 최전성기의 오스만투르크라도 전국적 화폐 교역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조선이 18세기에 이르러 금이나 은과 같은 귀금속이 아닌 구리로 만든 화폐의 전국적인 유통이 진행되었다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조선 정부의 신뢰와 화폐 생산 능력이 그만큼 안정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화폐는 기술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화폐를 만드는 것은 석기시대라도 가능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장식품이 아닌 '화폐'로서의 가치를 갖기 위해서 '신뢰'를 가져야 한다는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거 돈이거든. 그러니까 이걸로 무슨 물건이든 살 수 있어(바꿀 수 있어).'라는 말을 사람들이 믿어주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도 그 신뢰가 깨어져선 안 됩니다.
때문에 신뢰할 수 있는 화폐는 쉽게 생겨나지 않습니다. 위에서 말했듯 강력한 국가였던 로마조차 중기 이후 화폐 가치가 폭락하면서 경제 위기를 맞이했을 정도이니까요.
때문에 금이나 은처럼 그 자체로 가치를 가진 귀금속이 아니면서 화폐로서의 가치가 있는 사회가 완성되기에는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사실상 금 본위제가 아니라 나라의 신용만으로 사용되는 신용화폐는 20세기에 들어서야 진정으로 완성된 것이니까요.
과거를 아는 이는 현재를 이끌어가고 미래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역사와 SF... 어딘지 어울리지 않을 듯 하지만, 그럼 점에서 둘은 관련된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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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그런데 구리 기반의 화폐는 청동기 문명 초반에 찍는 테크 아닌가요?
같은 기준으로 보면 중국은 조선보다 2500년 전에 이미 동기반 화폐로 경제 전쟁을 했죠.
물론 서양도 기원전 12세기 ~ 조선보다 3000년 정도 앞서서 이미 동기반 화폐가 널리 쓰였구요.
그리고 보통 제가 알기론
구리-은-금 이런 식으로 점점 귀금속으로 화폐가 발전합니다.
위에서 말한 무계 때문에요. ~
조선은 아니 한반도는 구리던 신용화폐던 어쨋던
물물 교환 테크를 늦게 벗어났다고 봐야 옳습니다.
상거래가 없이 어떻게 백성들이 잘 살까요?
그리고 더 문제는 실은 상평통보가 활용된 이후로도
쌀이나 포목이 화폐의 50% 이상을 담당했습니다.
심지어 6.25 때 까지고 화폐 개념이 정착안해서
돈 역시 하나의 상품으로 보고 쌀을 기본 화폐로 보는
낮은 단계의 문명을 가졌던 문화를 그대로 갖고 있었습니다.
화폐에 대해서 조선은 테크트리를 늦게 찍었다.
타 문명권에 비해 2000년 정도 뒤쳐져 있었다가 맞다고 봅니다.
중국도 은이 나지 않는 나라였습니다.
은 본위제를 했을 때 은 생산량이 대략 1톤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정확하진 않네요)
다만 동시대에 일본에서의 은 생산량이 50~100톤(1년에)
유명한 칠레에 포토 은광에서 1년에 100톤~
멕시코? 은광에서 100톤 ~
가장 많이 나올때는 400톤 까지 쏱아져 나왔구요.
명나라 역시 무역을 통해 저 은을 통해서 은 본위제를 구축했습니다.
인도도 마찬가지였구요.
즉 조선에서 은이 나지 않는다고? 은 본위제를 구축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일본에서 은이 가장 많이 나왔던 이와미 은광이 바로 포항에서 직선으로 동쪽에 있던
모리 가문의 것이였습니다.
선조때 한정이긴 했지만 당시 무역은 일본 사람들이 무역대금을 은으로 주겠다.
조선은 은으로 안받겠다. 입니다.
즉 애초에 자신의 나라의 은으로 은 본위제를 추구한 나라도 없고
당시 대부분의 은은 바로 일본과 , 포루투칼-스페인 에서 나왔습니다.
(당시 정치적 사정으로 포르투칼과 스페인은 나라는 다르지만 같은 왕을 모시는 나라였고 금과 은광의 소유권은 스페인 국왕의 것이였습니다.)
그럴 만한 여력이 없었다는 것은 변명입니다.
그리고 금과 은을 생산하면 빼앗길까 봐서 이지
애초에 조선도 은과 금이 꽤 많은 나라였습니다.
중국과 일본과 무슨 싸움이라도 하던 관계도 아니였는데
샌드위치처럼 군사력을 유지하다니???
상당한 국력과 의외로 큰 땅과 인구를 차지했던 나라였습니다.
오다 노부나가가 일본을 통일전쟁에서 말기 2년 정도를 제외하면
조선의 힘이 일본을 통일했던 오다 노부나가의 힘보다 더 쎘고
일본은 분열되어 있었고 명나라는 여진족좀 막아 달라고 했고
제 1동맹국으로 오히려 조선 경제력좀 키우고 군사력좀 키우라는 입장이였습니다.
당시 상황을 오판한 잘못된 해석입니다.
구리나 청동을 '무기'로 쓰는 것이 아니라, '화폐'로 쓰는 것이 청동기 문명 초반의 테크트리라는 것인가요?
....
.......얼마전까지 구리주화는 자주 쓰였습니다... 지금도 점점 귀금속으로 가고 있지도 않구요...
심지어 종잇장을 화폐랍시고 쓰다가 이제는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기록된 숫자로 화폐라고 하는 지금은 아주 원시시대로 돌입하는 건가요?
귀금속을 사용하는 화폐는 현물가치에 중점을 두는 구조이고 화폐의 일부를 훼손해 부스러기를 모으는 등의 변칙이 성행했습니다. 그것을 막기 위해 테두리에 빗금은 넣는 등의 안전장치를 마련하지만, 거래를 할 때마다 화폐를 저울로 재어 확인하는 등의 절차를 거쳐야 했구요.
화폐 자체의 물질적인 가치와 사회에서 통용되는 화폐로써의 가치가 분리되어 통용되는 쪽이 국가체제가 발달하고 정비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나요? =ㅅ=;;
표도기 님이 글을 열심히 썼지만
사실관계가 여럿 맞지 않습니다.
먼저 서양은 1300년대 정도 되면 인구 조사가 되어서
믿을 만한 인구 통계가 있습니다. 반면 조선은 문명 수준이 의심스러운데
인구 조사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임란때의 인구 추론은 500~1500만 정도 입니다.
500만은 그 중에서 최소 추론이고 보통 1000만 정도로 봅니다.
그리고 500만도 작은 인구가 아닙니다.
두번째는 명나라는 은이 많이 났던 것도 아닙니다.
제가 볼때는 축소 보고 하긴 했지만 대략 1~2톤 정도 나왔습니다
당시 명나라와 인도 그리고 유럽이 은 본위제를 구축했는데
대략 선조~효종(숙종)
이 즈음 일본에서 1년에 50톤 정도의 은이 그리고 멕시코와 칠레에서 100~300톤 정도의
은이 쏱아져 나왔습니다. 다들 이걸 무역을 통해 획득해서 은 본위제를 했습니다.
지식면에서 표도기 님은 잘못된 지식을 근거로 논지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논지 전개에서도 여럿 오류가 보이는데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해 바둥 되었다면?
상업과 공업을 육성했습니다. 오히려 군사력은 민생을 해친다는 논리로~~
상업과 공업이 민생을 해친다는 이유로 축소했습니다.
그 축소 과정에서 화폐나 공업이 융성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명나라는 우호적이여서
일본은 자기들 끼리 분리되어 있어서 ~ 조선은 군사력 성장에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 방해 받지 않는 다는 점을 군사력 축소로 방향을 잡는 실수를 했던 것이다. 라고 해야 옳습니다
그리고 역사를 살펴보면 군사력 유지를 위해 아둥바둥 대던 나라는
군사력 확보 때문에 상업과 공업을 발전시키고 화폐를 발전시키게 됩니다
원인과 결론을 잘못 연결 시킨 것입니다.
잘못 알고 있습니다.
물론 종교 때문이긴 하지만 종교 명부를 토대로
13세기에 이미 인구조사로 영국에서 둠스데이 북이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다른 나라들도 비슷하구요. (찾아 보니 1066년이군요- 이 즈음 부터 자기나라 인구가 얼마인지 어느정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수단과 방법은 좀 다르지만 어잿던 정확한 행정을 할 수 있던 근거나 정보가 있었죠.
18세기까지 인구조사를 이런식으로 하다가
근대 정부에서 조사하는 방식이 취해진 것이 최근입니다.
인구 측정이나 얼마의 인구를 가졌냐를 알았다는
정보의 정밀도 면에서는 조선에 비해 10배 이상 정확했습니다.
물론 조선은 그런 것 마져도 없구요. 현대를 기준으로 생각한 오류입니다.
둠즈데이 북은 토지대장에 더 가깝습니다. 이를 근거로 정확한 인구조사가 이루어졌다고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있어보입니다. 차라리 교회 세례명을 이야기하셨다면 더 그럴듯했을 텐데, 저런. 물론 세례명도 겹치는 것이 있지만요. 그리고 조선시대 인구조사가 형편없었다라... 그냥 네이버에 검색해도 무지막지한 크기의 인구조사표가 나오는데, 무엇을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상당히 의문입니다.
그리고 저번에도 드린 말씀입니다만, 도대체 무슨 책을 보고 공부하셨는지 그 책 이름 좀 알려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잘못 알고 있습니다.
둠즈데이북은 세금을 걷기 위해 재산조사를 한 것으로, 조선으로 따지면 양전사업과 비교해야 합니다. 둠즈데이북으로는 당시 잉글랜드의 인구가 얼마인지 알 수 없을 뿐더러,
http://www.domesdaybook.co.uk/life.html#6
둠즈데이북 이후에 그와 비슷한 수준의 정밀도로 인구나 재산의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가치가 더 돋보이는 것이죠. 18세기까지 둠즈데이북과 같은 방식으로 조사한 사료가 더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18세기까지 그런 식으로 조사했다는 말을 하면 안되죠.
저는 방정싴님의 판단은 관심없습니다. 방정싴님이 일리있다고 판단하게 만든 근거가 궁금한 겁니다. 그게 합당하다면 새로운 지식을 얻고 갈 것이고 아니라면 기존의 지식을 그대로 갖고 가게 되겠죠.
세례명부를 통해서 인구조사를 한 것도 17세기 후반, 근대에 들어섭니다. 이 때부터 조선은 서양과 큰 격차가 벌어집니다. 그건 맞죠. 그러나 그 이전에는 조선이나 서양이나 인구조사 정밀도는 별 차이 없단 말이죠. 제 말이 틀렸다면 근대 이전, 세례명부를 통한 신뢰할만한 인구조사 자료가 있다는 걸 보여주시면 됩니다. 스웨덴이든 어디든요.
오늘날에도 세계적으로 미국달러가 보편적인 화폐이고 영국 파운드화, 일본 엔화, 유럽 유로화정도가 굳이 더 추가하자면 중국의 위안화 러시아의 루블화정도나 각국간의 거래에 사용되지요.
심지어 러시아는 아르헨티나에게 밀, 소고기등을 받고 전투기를 빌려주고
태국은 닭을 주고 스웨덴전투기를 사오기도 합니다. 21세기 나라간에도요
http://nownews.seoul.co.kr/news/newsView.php?id=20150106601009
북한이나 짐바브웨의 화폐는 그 나라에서나 통용되지 다른나라에서는 화폐로서의 가치가 거의 없습니다.
북한조차도 북한돈보다는 달러 위안화를 선호하니까요.
표도기님의 말대로 화폐는 신뢰가 중요합니다.
때문에 조선시대의 주요화폐는 쌀, 옷감(?)이 당시 우리같은 보통사람들에게 통용되는 화폐였지요.
그건 눈으로 볼수 있고 만질수 있고 믿을수 있으니까요.
유럽중세시대나 이후의 시대에 화폐경제가 발달했다지만 당시 배경의 소설이나 관련책들을 읽어보면 포도주한병, 달걀, 밀이나 옥수수 등등으로 물물교환하는 장면이 종종나옵니다.물론 화폐사용하는 장면도 나오고요.
닭이랑 돼지염소같은 동물을 서로간에 교환하는 경우도 있고 19금적인 내용이지만 달걀이나 먹거리 옷감등등으로 매춘부를 사는 경우도 있다고 나옵니다.
우리같은 보통사람들이 평소에 어음이나 유가증권 주식등등을 거의 취급하지 않듯이 조선시대에 중세시대에
그런것이 필요한 사람들은 금과 은을 사용했을것입니다.
임진왜란당시에도 조선을 일본에 도자기, 옷감, 쌀, 책 등을 팔고 일본으로부터 구리 유황 은등을 받았구요.
나라간에도 물물교환을 했는데 일반 개인들이야 뭐라고 하겠습니까??
일본포르투갈역시 조총 무기 등등을 사는대신에 일본의 은, 노예, 구리, 도자기등으로 물물교환했다는 내용도 많이 나옵니다. 일본이나 유럽이라고 무조건 발달된것이 아닙니다.
다만 일본포르투갈 혹은 여러나라들간에 거래가 지속되면서 오늘날 국가간거래에 달러로 지불하듯이 당시에는 은으로 지불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그런것이 의외로 편하다고 생각되어 사회전체적으로 따라하게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됩니다. 조선은 외국과의 교역에 적극적이지 않아 그러한 시대흐름에 뒤쳐진것이긴합니다만.
자국 화폐가 아니면 다른 나라의 화폐를 이용하기도 합니다.
지금도 달라를 이용하는 것 처럼요.
그리고 전근대에는 이 현상이 더 심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는 자신의 깃발에 중국의 영락통보를 그려 놓앗죠.
중국에서 동전을 수입해서 일본에서 사용했습니다.
즉 현실적으로 사용하려고 했다면 방법이 없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렇게라도 동전을 사용하는 것이 백성들에게 이롭고
꼭 스스로 하지 않아도 됩니다.
따라서 문명에서 기본적인 요소인 화폐가 없었고
어느 정도 문명을 이루려면 화폐가 필수인데
조선은 화폐가 늦었기 때문에 문명 수준이 낮다 입니다.
화폐란 단순히 화폐를 찍어낼 수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행정력과 안정성 자원량에 따라 가능해지는거죠.
본문에도 써있지만 금이나 은같은 귀금속이 아닌 신용화폐는 서양에서도 사용화된지 얼마 안 됐죠. 이건 청동기 시대나 철시 시대의 무기 테크트리처럼 무슨 시대가 되면 반드시 써야 하는 그런것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이건 본질적으로 기술력보단 신용의 문젭니다. 청동기 시대에 안 찍으면 철기 시대로 업글이 불가능한 그런 업그레이드 버튼같은게 아닙니다.
.........
뭐 위에 다른 분들이 다 설명한 것이긴 하죠.
저기 밑에서 면포, 쌀이 화폐 역할을 어느정도 했다는 얘기는 저도 하려고 했는데( 아마 그게 북한에 풀린 초코파이의 역할로 보면 되려나요?) 대체화폐니까 안돼! 라고 할것 같아서 안 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