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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컬처 시리즈에서 마인드는 거대한 우주선까지 조종하곤 합니다.]


소설 <플레바스를 생각하라>, <게임의 명수> 등은 이안 뱅크스가 쓴 스페이스 오페라입니다. 이른바 컬처 시리즈입니다. 스페이스 오페라에는 대부분 핵심 문명이 등장하고, 이 핵심 문명이 다른 외계인들과 전쟁을 벌인곤 합니다. 컬처 시리즈라는 이름답게 중심 문명은 컬처이고, 이들은 독특하게 공산주의 유토피아를 이룩했습니다. 아니, 독특하지 않고 당연하다고 해야 하나요. 어차피 항성 사이를 항해할 수 있을 정도로 기술이 발달했다면, 생산량도 엄청날 테니까요. 인류는 그런 생산량으로 충분히 놀고 먹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술이 발달하고 생산량이 엄청나도 그걸 제대로 분배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겠죠. 그런데 컬처 문명에서 생산과 분배를 담당하는 장본인은 인간이 아닙니다. 기계죠. 인공지능입니다. 은하계 곳곳에 퍼진 방대한 컬처 문명을 운영하는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인공지능입니다. 덕분에 이 컬처 문명은 사실 인류 세력이 아니라 인류가 기계에게 빌붙어 생활하는 세력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걸 싫어하는 외계인들도 많아요.


당연히 컬처 문명에서 인공지능은 다양한 역할을 맡습니다. 우주 함선의 운영 역시 인공지능의 몫입니다. 이걸 '쉽마인드'라고 부르죠. 인공지능들은 또 다른 인공지능을 지속적으로 만드는 한편, 우주선까지 운영합니다. 쉽마인드는 함선의 두뇌이고, 함선의 선체는 쉽마인드의 몸뚱이와 같죠. 그러니까 인공지능 함선을 아주 거대한 로봇이라고 불러도 될 겁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사이언스 픽션에서 흔히 로봇은 인공지능을 탑재한 인간형 기계로 등장하곤 합니다. 인공지능이 기계 몸뚱이를 조종한다면, 그건 로봇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봇은 인공지능과 기계 몸뚱이로 나뉠 수 있습니다. 만약 이 몸뚱이를 인간형 기계가 아니라 거대한 우주선으로 바꿨다고 가정하죠. 그래도 여전히 '인공지능이 기계 몸뚱이를 조종한다'는 개념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인공지능 함선을 로봇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이 '우주선 로봇'은 전통적인 의미의 로봇과 다르게 보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인공지능을 탑재해도 우주선은 로봇이라는 개념보다 탈것이라는 개념이 강하죠. 게다가 인간 승무원들이 탑승했기 때문에 인공지능은 자기 몸뚱이(우주선)를 스스로 통제하지 않습니다. 실제 우주선을 조종하는 장본인은 인간 승무원들이니까요. 하지만 이런 승무원들이 사라진다면 어떨까요.


마인드 같은 인공지능은 우주선을 홀로 운영할 수 있습니다. 양전자 두뇌가 인간형 몸뚱이를 조종하는 아시모프의 로봇처럼 마인드는 '우주선이라는 몸뚱이'를 다룰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승무원 없이 홀로 움직이는 우주선을 로봇으로 볼 수 있겠죠. 비록 인간 승무원들이 그 우주선을 조종한다고 해도 그 우주선은 전통적인 우주선과 다를 겁니다. 비상 사태에 돌입하면, 그러니까 인간들이 우주선을 조종할 수 없다면, 인공지능이 대신 조종을 담당하겠죠. 그럴 때 그 우주선은 사실 로봇이 되는 셈입니다. 아니, 그냥 우주선 로봇이 사람들을 태우고 다닌다고 해야 옳겠죠. 인공지능이 사람을 보조하는 수준이라면 모르지만, 인공지능이 우주선 운영을 총괄할 수 있다면 인간 승무원들의 역할은 대폭 줄어들 겁니다. 지금도 우리는 인간이 탑승하지 않는 무인 전투기를 킬러 로봇으로 부릅니다. 아마 미래에 굉장히 똑똑한 인공지능이 무인 전투기를 움직인다면, 여전히 우리는 그걸 로봇이라고 부를 겁니다. 전투기 로봇이겠죠. 그렇다면 스스로 움직이는 우주선을 로봇이라고 부르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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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선 인공지능이 스스로 몸뚱이를 움직일 수 있다면, 사실 그 함선은 로봇이겠죠.]


앤 렉키의 <사소한 정의>는 로봇 같은 함선 인공지능을 강조하는 소설입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병력 수송선 저스티스 토렌입니다. 저스티스 토렌은 수송선답게 매우 거대하고, 여러 장교들이 탑승했습니다. 저스티스는 함선 인공지능으로서 자기 자신을 관리하는 한편, 장교들도 보조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스티스는 보조체를 수족처럼 부립니다. 이 보조체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인간형 로봇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스티스 본체는 수많은 보조체들과 기억 및 감각을 공유합니다. 수많은 보조체들은 각각 독립된 함선 인공지능이고, 동시에 통합된 함선 인공지능입니다. 저스티스는 보조체들을 이용해 한꺼번에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1번 보조체로 소위의 옷을 다림질하는 한편, 2번 보조체로 화장실을 청소하고, 3번 보조체로 대위의 아침 식사를 차리고, 4번 보조체로 함장과 토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는 동시에 저스티스 자신도 우주선의 각 부문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점검할 수 있죠. 따라서 저스티스는 그 자신의 발달된 처리 능력과 수많은 보조체를 이용해 한꺼번에 여러 업무를 처리할 수 있고 여러 장소에 존재할 수 있습니다. 만약 8번 보조체가 이웃 행성에 갔다면? 저스티스는 그 행성을 둘러보는 셈입니다.


저스티스 토렌 함선에는 인간 함장이 탔고, 그 인간 함장이 대장입니다. 그러나 실질적인 관리자는 저스티스입니다. 저스티스는 관리자일 뿐이고 명령권자가 아니지만, 솔직히 인공지능이 함장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만약 인간 승무원들이 모두 죽어도 저스티스는 홀로 이동하거나 적과 싸울 수 있겠죠. 이쯤 되면, 그야말로 초거대 로봇에 가깝지 않나 싶습니다. 우주선 자체가 (문자 그대로) 하나의 캐릭터입니다.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라 우주선이 진짜 캐릭터가 될 수 있습니다. 자아도 있고, 지능도 높고, 통찰력도 있고, 몸뚱이도 있고, 수족과 같은 보조체들도 있으니까요. <사소한 정의>는 함선 인공지능을 깊게 파고드는 소설이 아니지만, 이런 설정은 꽤나 매력적입니다. 저는 이 소설을 읽을 때, 어떻게 인공지능이 우주선을 자기 몸뚱이로 인식하는지 자세히 설명했으면 싶었습니다. 은하 제국의 암투보다 오히려 그쪽이 흥미로웠습니다. 물론 함선 인공지능 자체는 스페이스 오페라에서 그리 드문 소재가 아닙니다. 이미 언급했듯 이안 뱅크스 같은 작가도 진작 써먹은 소재니까요.


하드 SF 소설들도 함선 인공지능을 논합니다. <블라인드 사이트>는 외계인을 찾아가는 인류 탐사대를 이야기하는 소설입니다. 인류 탐사대는 테세우스 우주선을 타고 로르샤흐라는 외계인을 찾아갑니다. 하지만 로르샤흐는 정체 불명의 생명체입니다. 아니, 생명체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습니다. 탐사 대원들은 골머리를 싸매지만, 아무리 조사해도 로르샤흐의 정체를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대원들은 로르샤흐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위험하거나 무모하거나 비인간적인 행위까지 감내합니다. 눈 앞에 외계인이 나타났는데, 그냥 지나칠 수 없잖아요. 그래서 목숨을 걸고 외계인의 소굴로 침투하거나, 외계인 견본을 포획하거나, 잔인한 실험을 감행합니다. 당연히 그 와중에 승무원들은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기거나 우울증에 시달립니다. 문제는 이 승무원들이 자발적으로 그런 행동을 하느냐는 겁니다. 탐사 대원들은 자신들이 자발적으로 행동한다고 생각하지만, 우주선 테세우스를 조종하는 진짜 장본인은 '인공지능 선장'입니다. 인공지능의 이름 자체가 '선장'입니다. 어쩐지 인간 승무원들보다 인공지능이 더 우위에 있는 듯한 느낌을 풍깁니다. 이름부터가 선장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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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이 우주선을 조종한다면, 인간 승무원의 역할은 뭘까요.]


선장은 두뇌이고, 우주선 테세우스는 선장의 몸뚱이입니다. 선장 역시 외계인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최대한 애씁니다. 그리고 선장 내부에는, 그러니까 선장의 몸뚱이 안에는 인간 승무원들이 탑승했죠. 이 승무원들은 인적 자원입니다. 그렇다면 선장이 인적 자원을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요. 어쨌든 탐사 대원들은 선장의 몸뚱이에 들어있는 자원이니까요. 물론 아시모프의 사려 깊은 로봇이라면 이런 생각을 하지 않겠지만, 선장은 아시모프의 양전자 두뇌가 아닙니다. <블라인드 사이트>에는 이런 인공지능의 뭔가 꺼림칙하고 모호한 면모가 종종 튀어나옵니다. 인간이 인공지능 우주선에 탄다면, 누가 그 우주선의 주도권을 쥐게 될까요. 아예 소설 속에서 생물학자가 '그토록 로봇이 뛰어난데, 왜 인간이 로봇을 조종하느냐'고 묻습니다. 또한 <기시감>도 이런 물음에 도전하는 소설입니다. <기시감> 역시 외계인을 찾아가는 인류 탐사대의 이야기지만, 사실 <기시감> 자체는 우주 탐사물이 아닙니다. 중요한 건 우주선 게이트와 그 게이트의 인공지능 로가디아입니다. 로가디아는 저스티스 토렌처럼 수많은 보조체들을 부리지 않지만, 그래도 게이트 우주선의 곳곳을 관리할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로가디아가 게이트를 자신의 몸뚱이로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몸뚱이는 세상을 인식하는 도구가 됩니다. 로가디아는 최첨단 인공지능이지만, 그래봤자 인공지능일 따름입니다. 실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두뇌만 있고, 몸뚱이가 없는 격이죠. 두뇌는 매우 중요한 부위지만, 두뇌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장님들도 두뇌가 있지만, 앞을 볼 수 없습니다. 귀머거리도 두뇌가 있지만,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인공지능이 세상을 인식하고 싶다면, 두뇌만 아니라 몸뚱이까지 필요합니다. 게이트는 물리적 실체가 있는 우주선이고, 따라서 로가디아는 게이트를 몸뚱이처럼 사용할 수 있습니다. 물론 로가디아가 아무리 게이트를 이용해도 로가디아는 인공지능입니다. 사고 방식 자체가 인간과 다르죠. 그래서 로가디아와 인간은 제대로 소통하지 못하고, 결국 이는 사고로 이어집니다. 게다가 로가디아는 몸뚱이로 오직 게이트만 이용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설정들은 로봇이라는 존재를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인공지능 두뇌와 기계 몸뚱이의 관계를 말입니다.


물론 이런 방식으로 전차 인공지능이나 건물 인공지능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굳이 우주선 인공지능을 이야기한 까닭은…. 우주선은 미지의 우주를 항해하고 그만큼 로망이니까요. 그런 로망 넘치는 탈것이 단순한 탈것이 아니라… 자아가 있는 존재죠. 그런 특징이 마음을 사로잡지 않나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