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흐르는 카페
이곳은 무엇이든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자유 게시판입니다. (댓글 기능을 다시 활성화시켰습니다.)
예전에는 (아니, 지금도?) 러브크래프트 작품집이라면 동서문화사가 유명했습니다.
지금이야 황금가지 쪽이 더 원판에 가깝다곤 하지만, 작품 수는 상대가 안 되죠.
동서문화사는 추리/미스테리 쪽으로 발이 넓은데, 러브크래프트에도 호의적입니다.
동서문화사 번역본의 최대 단점은 번역이 상당히 안 좋다는 것인데, 중역 같습니다.
듣기로는 영어판을 번역한 게 아니라 일어판을 번역해서 그렇다는 소리도 있더군요.
게다가 크투르프(크툴루/크툴후) 같이 고유명사를 엉뚱하게 옮겨놓아 많은 비판을 받았죠.
이건 별로 언급하지 않는 점인데, 동서문화사의 또 하나 단점은 삽화가 아닌가 합니다.
<공포의 보수>를 비롯해 각 작품마다 첫머리에 펜으로 그린 듯한 작은 삽화가 들어갑니다.
그리고 책 속표지에도 큼지막하게 있고요. 서명을 보니 아마 외국 작가가 그렸나 봅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이 삽화들은 정작 책 내용이나 설정이랑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다섯 권을 전부 다 살펴본 건 아니지만, 그나마 읽은 것들 중에는 엉뚱한 삽화만 들어있습니다.
아무리 봐도 삽화가가 책을 안 읽었다거나 편집인이 엉터리로 기획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예시를 들자면, <크툴루의 부름>이라면 어떤 삽화가 좋을까요? 당연히 크툴루 그림이겠죠.
크툴루가 르리에에서 잠든 그림이라거나 책에 나오는 크틀루 조각상도 괜찮을 겁니다.
아니면, 선원들이 목격했다는 해저 도시 르리에의 장대한 경관을 담아내는 것도 좋습니다.
하지만 책에는 웬 남자가 해골을 보는 그림이 있습니다. 소설에는 해골이 나오지도 않는데요.
이거야 그렇다 치더라도 <인스머스의 그림자>에 왜 관을 짊어지고 가는 사람이 있는 거죠?
쓰러져가는 어촌 그림이나 거대한 다곤의 모습, 해저인의 모습 등 그릴 거리는 넘쳐 납니다.
그런데 왜 그런 그림을 빼고 작품 내용이랑 전혀 상관도 없는 관이 나오냐는 겁니다.
크툴루 관련 소설만 그런 게 아니라 <냉기>나 <우주에서 온 색> 같은 작품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너머에서>에서는 웬 꼬깔모자 쓴 할아버지가 침대에 앉아있는데, 전혀 상관이 없죠.
<신전>에서는 관에 바퀴가 달린 자동차를 그려놨는데,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건지 모르겠습니다.
이 책들의 삽화를 맡은 작가는 이렇듯 노인, 해골 등 별 의미없는 그림만 계속 나열합니다.
만약 러브크래프트를 잘 모르는 사람이 삽화를 봤더라면 오해할 소지가 충분한 그림이었습니다.
그나마 <벽 속의 쥐> 같은 작품은 유인원 삽화를 그렸으니까 어느 정도 관련이 있는 셈이죠.
하지만 이런 작품은 별로 없고, 대부분은 뜻도 모를 아리송한 그림만 되풀이할 뿐입니다.
표지그림도 문제입니다. 그로테스크하긴 한데, 아무리 봐도 크툴루랑 연관이 없거든요.
<공포의 보수> 표지그림은 기이하게 생긴 인간들 조각상인데, 이게 뭘 의미하는 걸까요.
수록 작품 중 <인스머스의 그림자>나 <어둠 속에서 속삭이는 자>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그러면 <벽 속의 쥐>일까요. 하지만 조각이랑 별로…. 조각이 딱히 중요한 소재가 아닙니다.
그러면 <크툴루의 부름>일까요. 그러나 르리에의 조각이라고 하기에도 무리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한 눈에 딱 봐서 크툴루와 관련이 있다는 느낌이 오지 않습니다. 그냥 흉측할 뿐.
동서문화사가 다량의 작품집을 내준 것은 고맙지만, 삽화를 왜 저렇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삽화 때문에 소설 내용이 변하는 건 아닙니다만, 그래도 책을 구성하는 요소임은 분명하죠.
좋은 삽화가 소설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건 비단 라이트 노벨에만 해당하는 사항이 아닙니다.
인기 있는 고전에는 좋은 삽화가 따르기 마련이죠. 하지만 동서문화사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궁금해서 여기저기 찾아봐도 삽화에 관련된 이야기는 없네요. 다들 불만이 없는가 봅니다.
저 혼자만 이상하다고 느끼는 건지, 아니면 번역이 하도 엉망이라 삽화 문제는 뒷전인지….
황금가지는 삽화가 없고, 표지그림도 크툴루라고 한 눈에 딱 알 수 있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면, 촉수를 여기저기 늘어뜨린 그 그림이 크툴루란 생각이 들기도 하죠.
동서문화사도 이렇게 하거나 혹은 해외의 유명한 크툴루 삽화를 가져왔다면 좋았을 텐데요.
우리나라 장르 독자들은 삽화에 신경을 안 쓰는 건지, 아니면 출판사 쪽이 그러는 건지….
여하튼 국내 나오는 책들 중 표지그림이나 삽화 중에 마음에 드는 게 별로 없네요. 으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