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혁명과 관련해 아래 댓글에서 표도기님이 기술분야의 후폭풍에 대해 적으셨더라구요. 


토카막에 들어가는 기술만 봐도 장난이 아니죠. 섭씨1억도 초고온을 유지시켜야 하고 초전도체 코일로 플라즈마 이온을 가둔다는 SF영화급의 기술이니까요. 그런 면에서 말씀해주신 부분은 좋은 지적입니다. 에너지의 혁명은 곧 기술의 혁명이고 사회에 더 큰 파장을 던지는 건 에너지 자체보다는 거기 수반되는 기술이죠. 그럼 당연히 관심이 가는 부분은 차세대 에너지원에 수반될 기술은 어떤 것일까 하는 점이겠죠.  


안정적인 차세대 에너지원의 특징은 전기입니다.

헬륨3이 됐건 중수소핵융합이 됐건, 태양에너지가 됐건 그 원천에 상관없이 바로 전기 에너지의 형태로 바꿔 활용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전기의 특징은 뭘까요? -> "저장하기 어렵지만 수송하기 편하다" 



지금은 석유 퍼내서 수송하는데 막대한 노력이 듭니다. 대신 일단 가져다가 저장해놓으면 몇백년 흘러도 다시 꺼내 쓸 수 있죠.

하지만 차세대 에너지원은 저장비용이 생산비용을 초과합니다.

현재의 에너지원인 석유의 < 생산비용 / 운송비용 / 저장비용 >이 각각 <상 / 상 / 하> 라면 차세대 에너지원은 < 상 / 하 / 상 >의 구조입니다.

따라서 on-demand의 형태로 체제가 전환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를 들어 고정 항로를 운항하는 상업용 선박 같은 경우 지금은 중유를 엄청 싣고 다니는데 차세대에는 그냥 항로 인근 등대에서 빔으로 쏴주면 됩니다. 그 빔을 받아서 모터를 돌리면 되니 동력실이 엄청나게 작아지고 그만큼 짐을 더 실을 수 있게 됩니다. 자동차도 마찬가집니다. 지금은 전기차들이 무거운 배터리를 싣고다니지만 내연기관이 완전히 퇴출되면 핸드폰 기지국처럼 기지국에서 에너지를 그때 그때 받아서 운행하게 될 가능성이 높죠. 그런 시기가 오면 < 오프로드 - 즉, 길이 아닌 곳에서도 달릴 수 있다는 것 >의 개념이 완전히 새로워질 거구요.


설비의 규모라는 측면에서 핵융합은 석탄이나 석유 못지않게 중후장대합니다.

티끌만큼도 안되는 원료를 걸러내기 위해 어마어마한 양의 바닷물을 화학처리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달에 가서 아주 티끌만큼 함유되어있는 원료를 추출하기 위해 산더미같은 바위와 흙을 부숴서 걸러내야 해요.

그렇게 채굴한 원료를 실어날라다가 각각의 소비처에서 에너지로 전환하는 방법도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비효율적이죠.

그냥 그 자리에서 전기로 만들어 쏴주는 게 속편합니다.


그리고 핵융합로를 여기저기 마구 싣고다닐 수 없는 아주 중요한 다른 이유가 있어요. 

핵융합로는 원자로와 마찬가지로 "한번 켜면 끌 수 없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태양을 껐다가 다시 켠다는 얘기 못들어보셨죠? (음.. 생각해보니 그런 영화가 있긴 하군요.)

섭씨 1억도 초고온을 일단 달성하고 나면 그 뒤에는 자체적인 핵융합에너지로 그 온도를 유지합니다.

처음 시동 걸 때 무지막지한 에너지가 들고, 그걸 일단 한번 끄면 다시 켜는데 피눈물 쏟아야 합니다.

따라서, 몇군데 거점에 거대한 설비를 지어놓고 에너지를 필요한 곳에 쏴주는 게 합리적이죠.


이는 곧 인류사회가 유래없는 에너지 중앙집중을 경험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뜻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인터넷 서버 관리하듯, 에너지를 통제하는 시대가 오게 될 수도 있습니다. 

만약 테러범들이 차타고 도망가잖아요? 현대의 경찰들은 도망치는 그 차를 멈출 방법이 없습니다.

왜냐면 각각의 차는 < 독립적인 에너지원을 갖고 있는 자립적인 구동기관 >이니까요.

하지만, 위에 적은 것처럼 에너지의 중앙집권화가 이뤄진 사회에선 간단합니다. 그냥 그 차만 에너지를 끊으면 꼼짝도 못하게 되죠.

지금은 뭐든 통합하려면 복잡하고 까다롭습니다.

하지만 단일 에너지원을 사용하는 사회에선 모든 통합이 간단해집니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과 자동차와 집과 직장이 하나의 운영체제로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안방 전깃불 끄고 현관문 잠글때 그냥 스마트폰 꺼내서 탁탁 누르면 되는 거죠.

비싼 고급 주택이나 첨단 빌딩은 이미 그런 기능이 있지만

중요한 건 그게 누구에게나 가능해진다는 겁니다.



또 다른 측면은 '에너지 단위의 통합'입니다.

에너지의 단위가 하나로 통합되고, 그 소비를 정확히 계량, 추적할 수 있게 되죠.

지금은 "내가 오늘 하루 동안 도시가스 3입방미터와 개솔린 2리터와 전기 3메가와트를 썼구나"라고 생각하는 사람 없죠?

전술한 세상에선 내가 에너지를 얼마나 썼나 정확히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이는, 개인뿐 아니라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이 에너지의 흐름이 곧 통화의 흐름과 맞먹는 중요성을 갖게 되리란 점은 자명한 일이에요.

지금은 경기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 석유소비량을 따지죠?

하지만 석유소비는 실시간도 아닐 뿐더러, 비축이 가능하므로 지표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전기시대엔 그런 거 얄짤 없습니다. 민간 전력소비 10% 증가? 그럼 경제 활동도 그만큼 증가한 겁니다. (아님 날씨가 추워졌거나..)

효율성에 대한 얘기도 지겹게 듣게 되겠죠.

에너지소비를 정확히 계량한다는 건 비효율적인 곳이 어딘지 찾아내기도 쉽다는 뜻이니까요.


그런가하면 에너지통합은 또 다른 위기를 불러옵니다. 

중앙집중은 충격에 약하죠.

예를 들어 달에 건설해놓은 거대한 에너지 설비에 운석이 떨어진다면? 

혹은 동해안에 건설해놓은 커다란 핵융합 발전소가 관리인의 실수로 1분쯤 정지된다면 엄청난 파국이 찾아옵니다.

인류가 품종개량으로 먹거리를 단순화시킨 결과 광우병같은 질병에 취약해진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국제역학 측면에서는 해양지배의 의미가 퇴색하게 될 겁니다. 

현재 미군은 에너지의 안정적인 확보를 위해 엄청난 정력을 쏟아붓고 있고 그 핵심은 해군입니다. 해상수송이 곧 생명선이니까요.

그런데 당장 내일이라도 석유가 퇴출되면 미군은 인도양에서 철수해도 돼요. 자국 연안에서 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게 되고

에너지 문제는 자본과 기술의 문제가 됩니다. 지금처럼 지정학적인 문제가 아니란 뜻이죠.

누가 더 큰 자본과 우월한 기술력을 투입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고 후진국이나 개발도상국들에게 절망적인 상황이 됩니다. 

여전히 해상수송은 중요하겠지만 대양해군의 존재의의는 많이 퇴색하게 될 겁니다.

대양해군이 활약한 시대는 식민지 자원에 대한 의존이 높았던 시대니까요.


마지막으로...

에너지 온 디맨드의 시대는, 한국과 같은 작은 나라에게 엄청난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구요? 그 이유는 각자 찾아보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