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역사 포럼
밀리터리, 군사 과학, 그리고 역사와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분들을 위한 게시판.
역사 속의, 또는 현대의 다양한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들과 관련한 뉴스 이외에 국내 정치 논쟁에 대한 이야기는 삼가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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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애국심에 대해 본 적이 있는데, 애국심은 종교와 같이 전투시에 더 과감하고
잔혹한 작전을 펼 수 있게 한다고 합니다. 애국심은 어디에서 처음 발명되었나요?
전에 애국심에 대해 본 적이 있는데, 애국심은 종교와 같이 전투시에 더 과감하고
잔혹한 작전을 펼 수 있게 한다고 합니다. 애국심은 어디에서 처음 발명되었나요?
근대 교육 기관들이 등장하여 국민들을 상대로 근대 교육을 실시하게 되면서 "애국심"이라는 환상이 주입되기 시작하였다 - 이건 제가 주장하는 게 아니라 버트란트 러셀이 한 말입니다. 그 양반 역시 자기 견해를 주장한 게 아니라 동시대의 식자들이 애국심 고취 교육에 대해 논의하던 중 나온 일반론을 그대로 옮긴 것이죠. 민족의 개념도, 애국의 개념도 오늘날처럼 사회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것은 뜻밖에도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꽤 자주 들려오기도 합니다. 뭐 그런 것이죠.
현대적인 애국심은 19세기 중엽 무렵 유럽에서 완성되었습니다. 그 완성에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은 국민 기초 교육과정과 대중언론기관이 태어나면서부터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국민 전체에게 퍼지는데는 좀 시간이 걸립니다.
물론 각 국가마다 시작은 좀다릅니다. 대표적인 두국가 애기를 애기를 예로 들까 합니다. 이 두 국가는 비슷한 시기에 애국심을 국민에게 주입하는 성공합니다.
애국심의 원형이라고 할수있는 것은 프랑스가 처음 테이블을 끊어버립니다. 프랑스는 혁명기때 사방의 국가가 적으로 들러싸이자 혁명가들이 홍보를 통해 대중에게 공포심과 위기위식을 심어주면서 혁명수호라는 개념을 혁명국가 프랑스 수호라는 개념으로 변질시키면서 국민군을 이끌어내기까지는 합니다만, 근본적으로는 일시적인광풍이었습니다. 수세기간 프랑스왕가가 열심히 심어놓은 왕에 대한 충성이 일시적으로 혁명정권으로 이양된 것뿐이었고 나풀레옹에게 다시 전이되어 버렸습니다. 유럽사에서 정말 애국심이라고 불릴만한 것이 만들어진 시기는 보불전쟁이 시초가 됩니다.
프랑스는 이전쟁으로 알사스로렌지방을 상실합니다. 문제는 유럽사 전체로 보자면 이정도는 일상적인 일이라는데 있습니다. 프랑스가 원래 현재와 같은 국경을 가진것도 얼마돼지 않았고 일반 대중은 먼나라애기였던 것이 지난 과거였던 것에 비해 , 보불전쟁이후 프랑스인들의 반응은 사뭇 달랐습니다.
마치 자기가 농사짓던 농토를 총칼로 빼앗겼다는 느낌을 전 국민이 공유하게 된 것입니다. 이게 바로 프랑스 애국심의 발단입니다. 이런 현상이 나올수있엇던 것은 신문이란 언론과 국민기초교육과정중에 형성된 프랑스의 영토는 영구적인 것이란 개념이 투여되면서 부터입니다. 그유명한 마지막 수업을 생각해 보시면 됩니다.
독일도 마찬가지인데 사실 보불전쟁이 있기 전만에 해도 현 독일 지역이라 불리는 구역은 두세개 커다란 국가와 수많은 작은 국가들이 모여있는 응집성 없는 군집 집단입니다. 프랑스가 이 집단을 위협하자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뭉쳐서 대항한 것인데 대승을 한 겁니다. 그것에 대중이 열광하면서 위대한 독일제국이란 신화가 독일 대중에게 꽉 박혀버린 겁니다. 이때부터 갑작스럽게 독일 제국이 형성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60년이 지난후에는 바로 두세대전 자신들의 할마버지 세대에서 서로 아웅다웅하던, 사람들이 대 독일이란 기치아래 애국심 운운하게 된 겁니다.
뭐 이렇듯 애국심이란 물건이 나온 시기는 19세기 말이라고 전 봅니다. 뭐 한세기 조금 지났군요.
물론 각 국가마다 시작은 좀다릅니다. 대표적인 두국가 애기를 애기를 예로 들까 합니다. 이 두 국가는 비슷한 시기에 애국심을 국민에게 주입하는 성공합니다.
애국심의 원형이라고 할수있는 것은 프랑스가 처음 테이블을 끊어버립니다. 프랑스는 혁명기때 사방의 국가가 적으로 들러싸이자 혁명가들이 홍보를 통해 대중에게 공포심과 위기위식을 심어주면서 혁명수호라는 개념을 혁명국가 프랑스 수호라는 개념으로 변질시키면서 국민군을 이끌어내기까지는 합니다만, 근본적으로는 일시적인광풍이었습니다. 수세기간 프랑스왕가가 열심히 심어놓은 왕에 대한 충성이 일시적으로 혁명정권으로 이양된 것뿐이었고 나풀레옹에게 다시 전이되어 버렸습니다. 유럽사에서 정말 애국심이라고 불릴만한 것이 만들어진 시기는 보불전쟁이 시초가 됩니다.
프랑스는 이전쟁으로 알사스로렌지방을 상실합니다. 문제는 유럽사 전체로 보자면 이정도는 일상적인 일이라는데 있습니다. 프랑스가 원래 현재와 같은 국경을 가진것도 얼마돼지 않았고 일반 대중은 먼나라애기였던 것이 지난 과거였던 것에 비해 , 보불전쟁이후 프랑스인들의 반응은 사뭇 달랐습니다.
마치 자기가 농사짓던 농토를 총칼로 빼앗겼다는 느낌을 전 국민이 공유하게 된 것입니다. 이게 바로 프랑스 애국심의 발단입니다. 이런 현상이 나올수있엇던 것은 신문이란 언론과 국민기초교육과정중에 형성된 프랑스의 영토는 영구적인 것이란 개념이 투여되면서 부터입니다. 그유명한 마지막 수업을 생각해 보시면 됩니다.
독일도 마찬가지인데 사실 보불전쟁이 있기 전만에 해도 현 독일 지역이라 불리는 구역은 두세개 커다란 국가와 수많은 작은 국가들이 모여있는 응집성 없는 군집 집단입니다. 프랑스가 이 집단을 위협하자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뭉쳐서 대항한 것인데 대승을 한 겁니다. 그것에 대중이 열광하면서 위대한 독일제국이란 신화가 독일 대중에게 꽉 박혀버린 겁니다. 이때부터 갑작스럽게 독일 제국이 형성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60년이 지난후에는 바로 두세대전 자신들의 할마버지 세대에서 서로 아웅다웅하던, 사람들이 대 독일이란 기치아래 애국심 운운하게 된 겁니다.
뭐 이렇듯 애국심이란 물건이 나온 시기는 19세기 말이라고 전 봅니다. 뭐 한세기 조금 지났군요.
그렇다면 임진왜란 당시 일어난 수많은 의병이나 행주대첩에서 같이 싸운 민간인들 같은 경우에는 어떻게 보는 것이 좋을까요? 그들이 과연 평생 자신을 위해 해준 일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백성들을 버리고 달아난 왕을 위한 충성심으로 그렇게 싸웠을지요. 그런 것을 굳이 애국심과 구분할 필요가 있을까요?
차라리 내 가족에 대한 사랑, 내 마을에 대한 사랑, 내 부족에 대한 사랑 등등 범위가 넓어진 것이 내 국가에 대한 사랑(애국심)으로 발전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근대적인 애국심의 개념은 단지 이것을 국가를 위해 사용하기 위해 권력자들이 이름을 붙이고 체계화시킨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내 가족에 대한 사랑, 내 마을에 대한 사랑, 내 부족에 대한 사랑 등등 범위가 넓어진 것이 내 국가에 대한 사랑(애국심)으로 발전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근대적인 애국심의 개념은 단지 이것을 국가를 위해 사용하기 위해 권력자들이 이름을 붙이고 체계화시킨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참솔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국가 개념이 체계화 되면서 단순한 게마인샤프트가 게젤샤프트로 전이되는 과정에서 애국심이라는 관념을 구체화, 교육 시켰을 뿐, 그 개념 자체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고 보아야겠지요.
결국 옛날 사람들이 생각하는 '국가의 범주'란게 어떤 것이냐라는 양적 차이일 뿐, 질적으로는 같다고 보아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국가 보다는 마을이 먼저, 마을보다는 가족이 먼저라는 당연한 마인드 자체가 이미 애국심의 다른 이름이란거죠.(아니, 그 보다는 그런 마음의 다른 이름이 애국심이겠군요.)
현대 사회야 그런 하위 개념들이 때때로 집단 이기주의라는 시각으로 간주되며, 더 거대한 이기주의의 테두리 안에 들어올 것을 강요받고 있지만, 오히려 그런 모순이나 고민이 없던 옛날이라면 오히려 애국심이 더 강했을수도 있죠.
개인이라면 몰라도, 고을이나 촌락이 한순간에 왕을 바꾸거나 혹은 왕을 위해 죽을때까지 싸우는 행위 모두, 자신이 생각하는 국가의 범주 안에서는 최상의 애국이어서였다가 아니면 설명이 불가능하니까요.
결국 옛날 사람들이 생각하는 '국가의 범주'란게 어떤 것이냐라는 양적 차이일 뿐, 질적으로는 같다고 보아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국가 보다는 마을이 먼저, 마을보다는 가족이 먼저라는 당연한 마인드 자체가 이미 애국심의 다른 이름이란거죠.(아니, 그 보다는 그런 마음의 다른 이름이 애국심이겠군요.)
현대 사회야 그런 하위 개념들이 때때로 집단 이기주의라는 시각으로 간주되며, 더 거대한 이기주의의 테두리 안에 들어올 것을 강요받고 있지만, 오히려 그런 모순이나 고민이 없던 옛날이라면 오히려 애국심이 더 강했을수도 있죠.
개인이라면 몰라도, 고을이나 촌락이 한순간에 왕을 바꾸거나 혹은 왕을 위해 죽을때까지 싸우는 행위 모두, 자신이 생각하는 국가의 범주 안에서는 최상의 애국이어서였다가 아니면 설명이 불가능하니까요.
임진왜란 당시 의병의 성격이 근왕군이냐, 지역방위군이냐는 논란이 있긴 합니다만 그걸 근대적인
의미의 '애국심'과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좀 생각해봐야 할 문제인 것 같습니다. '애국심'이나
'민족주의'가 단순히 '공동체주의'의 확장이라고 보면 원시부족사회에도 '애국심'이 있는 것이겠지요.
역사의 전개가 단순화시켜서 보면 별 차이가 없습니다. 구분되는 면도 봐야 하지 않을지요.
의미의 '애국심'과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좀 생각해봐야 할 문제인 것 같습니다. '애국심'이나
'민족주의'가 단순히 '공동체주의'의 확장이라고 보면 원시부족사회에도 '애국심'이 있는 것이겠지요.
역사의 전개가 단순화시켜서 보면 별 차이가 없습니다. 구분되는 면도 봐야 하지 않을지요.
프라우더님이 역사 전공이시니 아마 맞는 말씀이긴 하겠습니다만, 저로서는 '관념의 개념화'라는 시각에서 바라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요. 좀 억지같이 들리시겠지만,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촌락같은 부족 중심주의 사회에서 갖는 마음 역시 애국심과는 본질적으로 다를게 없다는 생각입니다.
오히려 근대에 이르러 사회 규모가 확장되면서 그러한 관념의 일원화를 통한 도구적 성격이 강해져 애국심이라는 것이 관념이 아닌 개념(혹은 이념)으로 변질 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하긴 이렇게 말해놓고 보니, 변질이 아니라 그 자체가 애국심의 정의라고 볼 수도 있겠군요. 아무튼 그 기저에 깔린 본질적 관념은 그렇지 않겠냐는게 제 주장입니다.
오히려 근대에 이르러 사회 규모가 확장되면서 그러한 관념의 일원화를 통한 도구적 성격이 강해져 애국심이라는 것이 관념이 아닌 개념(혹은 이념)으로 변질 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하긴 이렇게 말해놓고 보니, 변질이 아니라 그 자체가 애국심의 정의라고 볼 수도 있겠군요. 아무튼 그 기저에 깔린 본질적 관념은 그렇지 않겠냐는게 제 주장입니다.
-황산(黃山)[현재의 충남 논산지역] 벌에 이르러 양쪽의 군대가 서로 대치하자 아버지 품일이 말하기를 “너는 비록 어린 나이지만 뜻과 기개가 있으니 오늘이 바로 공명을 세워 부귀를 취할 수 있는 때이니 어찌 용기가 없을손가?” 하였다.
-관창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아까 내가 적지 가운데에 들어가서 장수의 목을 베지 못하고 그 깃발을 꺾지 못한 것이 깊이 한스러운 바이다. 다시 들어가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 하고 손으로 우물물을 움켜 마시고는 다시 적진에 돌진하여 민첩하게 싸우니 계백이 잡아서 머리를 베어 말 안장에 매어 보내었다.
품일이 그 머리를 손으로 붙들고 소매로 피를 닦으며 말하기를 “우리 아이의 얼굴과 눈이 살아 있는 것 같다. 능히 왕실의 일에 죽었으니 후회가 없다.”
공명, 부귀, 용기, 왕실. 현대적인 애국심과는 조금 거리가 있죠?
-관창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아까 내가 적지 가운데에 들어가서 장수의 목을 베지 못하고 그 깃발을 꺾지 못한 것이 깊이 한스러운 바이다. 다시 들어가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 하고 손으로 우물물을 움켜 마시고는 다시 적진에 돌진하여 민첩하게 싸우니 계백이 잡아서 머리를 베어 말 안장에 매어 보내었다.
품일이 그 머리를 손으로 붙들고 소매로 피를 닦으며 말하기를 “우리 아이의 얼굴과 눈이 살아 있는 것 같다. 능히 왕실의 일에 죽었으니 후회가 없다.”
공명, 부귀, 용기, 왕실. 현대적인 애국심과는 조금 거리가 있죠?
우리가 현재 생각하는 애국심이 '근대사회' 가 만든 것이라는 데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서구 근대에서 형성된 '애국심' 개념과 한국 전통사회의 '애국심' 을 구분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분명 각종 외침에 민중들이 저항한 것은- 그것이 비록 향토방위의 의미가 있다 할지라도 - 최소한의 민족주의적(?)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럽, 특히 서유럽과 달리 우리나라의 경우 민족개념 - 근대적 민족개념이라기 보다는 저들과 우리를 구분하는 정도의 개념 - 이 일찍 형성됬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임진왜란 의병에 대해 재 개인적이며 상당히 파격적이고 파멸적인 견해를 애기해 드리자면 전 의병을 일으킨 선비들이 조선 왕권에 대한 충성과 의리에 의해 일어났겠지만 부대의 핵심인 평민들은 마을의 어른이자 거부며 중앙정권과의 교섭자이자 중계자의 뜻에 동조해 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국가의 충성심의 사례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제 의견의 한계는 당시 대중들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 도저히 알수없다는 것때문이지만 임진왜란이후 지방에 뿌리내린 왕을 위해 의를 행하던 양반층들이 붕괴한 하고 난뒤에 호란떄 의병 활동이 거의 없다시한 것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뭐 비교적 빨리 끝난덕도 있고 조선의 경기 이북지역 차별정책덕도 크게 영향을 준 탓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한마디로 조선의병은 어떤 의미로는 사병적인 성격도 가지고 있으며 그건 의병을 일으킨 선비들의 개인적인 영향력이라고 봐야하지 않나 싶습니다. )
또한 애향심등이 애국심으로 발전했다고 보는 견해도 조금 회의적입니다. (이견해도 파별적인 의견겠지만) 차라리 국민국가가 복제했다고 보는게 더 맞을지 모릅니다. 발전이라기보다는 동등이라고 보고 전자는 자연 발생적인 특성을 지니지만 후자는 인위적이라는 특성을 띤다고 전 봅니다.
또한 애향심등이 애국심으로 발전했다고 보는 견해도 조금 회의적입니다. (이견해도 파별적인 의견겠지만) 차라리 국민국가가 복제했다고 보는게 더 맞을지 모릅니다. 발전이라기보다는 동등이라고 보고 전자는 자연 발생적인 특성을 지니지만 후자는 인위적이라는 특성을 띤다고 전 봅니다.
다만, 과거에는 '국가'라는 것에 대해서 충성한다기보다는 '같은 부족', '같은 마을' 등 비교적 제한된 범위에 대해서 적용되었기에 현대적인 개념의 "애국심"이라고 하기는 어렵겠습니다.
현대적인 "애국심"이 군대라는 면에서 적용된 것은 역시 프랑스와 영국 사이의 100년 전쟁에서 처음 시작되지 않았나 합니다. 당시만 해도 프랑스인이라는 개념은 없었고 '지방의 영민' 정도 밖에는 되지 않았지요.
하지만, '잔다르크'가 등장하여 '왕에 대한 충성'을 주장하면서 이른바 '프랑스인'이라는 개념이 정립되기 시작했고, 영주에 대한 의무(세금, 부역)에 따라서 전쟁에 나서는 것이 아니라 프랑스인으로서 국왕에게 충성을 바치기 위해서 전쟁터에 나선다는 "국민군" 개념이 처음으로 도입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