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역사 포럼
밀리터리, 군사 과학, 그리고 역사와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분들을 위한 게시판.
역사 속의, 또는 현대의 다양한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들과 관련한 뉴스 이외에 국내 정치 논쟁에 대한 이야기는 삼가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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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있던 글을 조금 편집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읽었던 글이라서. 이런 곳에 올리기 적절한 글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주시길. 참고로 원문(영어)은 생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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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야마모토를 격추시켰다 - 토마스 G. 랜피어 2세
I shot down the Yamamoto - By Thomas G. Lanphier, Jr.
비가 뿌리는 을씨년스러운 날의 알링턴 국립묘지, 동생의 관을 덮은 성조기가 차가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묘소 곁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내가 나란히 서 있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것은 4년 전이었으나 내 동생 찰스의 유해는 그때서야 남태평양에서 돌아왔던 것이다. 조사를 읽는 군목의 엄숙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동생과 나의 인생이 솔로몬 군도의 외딴 섬, 부갠빌 섬과 우리 두 형제가 한 번도 직접 만난 적이 없었던 사나이,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와 얼마나 기구하게 얽혀졌던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이 태평양전쟁에 말려들게 되자, 1차대전 때 항공장교였던 부친을 가진 나와 찰스가 파일럿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찰스가 해병대 전투조종사 훈련을 받고 있을 무렵 나는 육군 P-38 전투비행중대의 일원으로 과달카날에 배속되었다. 그리고 1943년 3월경, 전투정찰임무에서 귀환하던 중 나는 귀에 익은 목소리가 무전기에서 들려오는 것을 들었다. 찰스였다. 그도 과달카날 상공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 후 우리는 비행 중에 자주 마주쳤었다. 한 번은 함께 일본군의 제로전투기 편대와 공중전을 벌였던 적도 있었다. 또 언젠가 동생이 일본군 점령하의 솔로몬 군도의 산타 이사벨 섬 상공에서 비상탈출했을 때 나는 동생의 구조를 도왔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지금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게 아니다.
1943년 4월 17일 오후 늦게 나는 핸더슨 필드 기지의 지하 작전 참호에 보고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제339전투비행중대장으로 과달카날에서 손에 꼽는 에이스인 존 미첼 소령과 함께 그곳에 들어섰다. 지하 특유의 곰팡내가 나는 참호에 들어섰을 때, 무언가 중요한 일이 이야기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과달카날에 배속된 모든 고급장교들이 다 와 있었던 것이다. 긴장된 얼굴의 해병대 소령이 1급 기밀 표시가 된 전문 한 장을 건네주었다.
전문에는 야마모토와 그의 고위 참모장교들이 4월 18일 비행기편으로 부갠빌에 도착한다고 알리고,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이를 포착하여 격추시켜야 함, 대통령도 이 작전을 대단히 중요시"라고 적혀 있었다. 이어 야마모토 일행이 제로전투기 6대의 엄호를 받는 2대의 베티 폭격기를 이용할 것이라고 밝히고 그들의 비행스케줄도 상세히 나와 있었다. 그리고 전문 끝에는 프랭크 녹스 해군 장관의 서명이 되어 있었다.
실내에 긴장감이 감돌았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야마모토야말로 일본 해군 최고 지휘관일 뿐만 아니라 진주만 기습공격을 몸소 계획하여 태평양함대를 절름발이로 만들고 2000명 이상을 죽게 만든 장본인이 아닌가! 미첼 소령과 나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부갠빌까지 거리는 약 300마일. 과달카날 기지에 있는 미군기 중 야마모토 일행을 요격하고 돌아올 수 있는 항속거리의 항공기는 우리 중대의 록히드 P-38 라이트닝뿐이었다.
당시 59세였던 야마모토는 땅딸막하고 표정이 없는 인간으로 현대 일본 해군을 건설한 인물이었다. 그는 야간전투와 어뢰공격전술을 이용하여 미 해군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또한 그는 일본의 항공 전술 개척자로서, 제로전투기의 개발에 기여했으며 항공모함에 크게 의존하는 전술로 해전 양상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사실 야마모토는 미국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하버드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으며 워싱턴 주재 일본 대사관부 무관으로 재직할 때에도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영어 실력이 뛰어났으며 포커와 야구를 즐겼다. 일본 군부의 극단적인 군국주의자들이 그를 친미주의자로 여기고 암살해버리겠다고 협박한 일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일본과 미국 사이에 전쟁이 터지고 나자, 그는 헌신적으로 일본 해군을 이끌어 미군에 대항했다.
야마모토의 탑승기를 요격하기로 한 결정은 결코 가볍게 내려진 것이 아니었다. 그를 공격할 수 있는 기회는 미국의 암호 전문가들이 일본측 암호를 해독해내 적의 비밀 메시지를 낱낱이 풀이한 데서 얻어졌는데, 이는 2차 세계 대전 중 최고의 비밀이었다.
암호 해독 이후 야마모토가 우리의 공격 거리 안에 들어온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 군부는 즉시 루즈벨트 대통령 및 어네스트 J. 킹 해군참모총장과 협의를 거쳤다. 문제의 핵심은 야마모토가 탄 비행기를 격추시키는 것이 전쟁 수행인지, 아니면 그저 살인에 불과한지로 좁혀졌다. 마침내 체스터 W. 니미츠 제독이 가장 적절한 질문을 제기했다. "일본에 그의 자리를 대체할만한 인물이 있나?"
결론은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일본의 전쟁 수행에 있어 반드시 있어야 할 인물이었고, 따라서 우리는 그를 없애야만 했다.
일단 결정이 내려지자 과달카날의 지하 작전실에서는 가장 효과적인 작전계획을 둘러싸고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야마모토는 다음날 아침 9시 45분에 부갠빌의 카힐리 공군기지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우리는 그의 도착 예정 시각 10분 전에 카힐리 공군기지 북방 35마일 상공에서 그를 요격하기로 결정했다. 모험이었다. 우리 중대에서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던 P-38기는 고작해야 18대뿐이었으나 일본군이 카힐리 공군기지에 배치한 전투기는 100대가 넘었다. 또한 보조연료탱크를 탑재하여 연료를 가득 싣고 출발한다 할지라도 목표지점에서 적기와 교전하며 시간을 끌만큼의 충분한 연료를 확보할 수 없었다. 결국 필요한 것은 시계바늘보다 더한 정확성이었다.
작전계획 이후, 활주로 근처의 풀밭에 중대원들을 모두 불러모은 미첼 소령이 우리들에게 짤막한 지시를 내렸다. "아침 7시 25분에 이륙한다. 내가 지휘하는 14대가 2만 피트 고도에서 카힐리에서 이륙하는 일본 제로기들을 맡겠다. 그리고 랜피어 대위가 지휘하는 4대가 1만 피트에서 야마모토 일행의 비행기를 요격한다."
뒤이어 육군 정보장교 한 사람이 야마모토가 일본에서 얼마나 중요하며, 또 그가 죽게 되면 적의 사기에 얼마나 큰 타격을 줄 것인지에 대해 강조했다. 그는 야마모토가 철저한 완벽주의자라는 사실을 주지시키며, "우리가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그는 시간관념이 아주 철저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정시에 그곳에 도착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4월 18일 일요일, 작전 개시일에 과달카날의 하늘은 맑았으나 습도는 높았다. 애기를 몰고 진흙투성이의 철판 활주로 위로 택싱하는 동안 내 윙맨인 렉스 바버 중위가 나를 향해 싱긋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미첼 소령의 라이트닝이 활주로 위로 떠오른 것은 7시 25분 정각이었다. 그 다음이 바버 중위였고 내가 그 뒤를 따랐다. 그러나 내 편대의 4대 가운데 2대는 이륙에 실패했다. 한 대는 활주로의 이물질에 타이어가 터져버렸고 다른 한 대는 연료공급펌프에 고장이 생겼던 것이다. 작전을 개시하기도 전에 2대가 피격당한 꼴이었다. 할 수 없이 미첼 소령은 자기 휘하의 제2편대의 베스비 홈스 중위와 레이몬드 하인 중위에게 나의 편대에 합류하도록 손짓으로 지시했다.
일단 이륙하고 나자 우리들은 일본군의 레이더망을 피해 파도를 스칠 듯한 초저공비행으로 북을 향했다. 편대는 카힐리 상공의 랑데부 지점을 향해 갈지(之)자 형태로 비행하기 시작했다.
한낮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밀집진형으로 비행중인 우리 편대의 16기의 라이트닝기들은 일체의 무전 교신을 끊고 철저한 침묵을 유지했다. 거의 2시간 이상 육지가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에서의 초저공비행. 여느 때처럼 전투 이전에 느끼는 순간적인 불안감이 좁은 콕핏 안의 온몸을 엄습해왔다.
그때까지 100회 가까이 출격하면서 전투에 임하는 조종사의 용기는 때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어떤 때에는 극도로 용감해져 목숨을 건 도박을 감행할 용기가 솟아나는가 하면 또 어떤 때는 그렇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날만은 모두가 모든 것을 바칠 결의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트레저리 섬(보물섬? -_-)이 서북쪽 수평선에 나타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뒤에 부갠빌 섬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거진 밀림이 해안까지 덮은 거대한 섬이었다. 부갠빌의 해안선을 지나고 나자 미첼 소령은 작전계획대로 급상승하며 2만 피트 고도로 치솟아올랐다. 나의 편대도 그 뒤를 따라 1만 피트까지 상승했다. 계기판 시계는 9시 33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작전 개시 2분 전이었다.
9시 34분. 작전 개시 1분 전. 광활한 하늘에 보이는 것은 오직 몇 조각의 한가로운 뭉게구름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힐리 기지 주변의 일본군 전투기들이 우리를 포착해낼 것이었다. 그런데 완벽주의자라던 그 제독은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건가?
바로 그때, 한 파일럿이 침묵을 깨트렸다.
"적기, 10시 방향 고고도에(Bogeys, Ten o'clock high)."
과연 멀리 V자 대형을 이룬 검은 점들이 보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것들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6대의 제로전투기의 호위를 받으며 비행중인 녹색으로 위장한 2대의 쌍발 베티폭격기였다. 계기판 시계는 9시 3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야마모토 제독은 정확히 시간을 지킨 것이다. 그리고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 끝에 드디어 우리는 정확한 시간에 예정대로 광활한 태평양 상공의 정확한 목표지점에 도착한 것이었다. 이제 남은 모든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었다.
나는 무거운 보조연료탱크를 투하하고 공격 준비를 시작했다. 거리는 꽤 가까웠지만 일본기들은 우리를 미처 알아채지 못한 채 고고도에서 정면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대단한 행운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행운은 불운으로 변했다. 홈스 중위의 연료탱크가 분리되지 않았던 것이다. 보조탱크를 떼어내 보려고 기체를 이리저리 흔들고 돌리던 그는 결국 편대에서 이탈하여 해안 쪽으로 향했고 그의 윙맨이었던 하인 중위는 망설였지만 부득불 그를 쫓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제 임무를 수행할 사람은 나와 바버 중위의 두 사람뿐이었다.
바버 중위와 내가 일본기 편대에 돌진, 1마일 거리까지 접근했을 무렵 제로기들도 우리를 발견했다. 일본군 전투기들은 보조탱크를 투하하며 우리와 맞서려고 강하했다. 그런데 이때 2대의 폭격기 중 앞쪽의 폭격기가 고도를 낮추며 밀림 쪽으로 급강하하기 시작했다. 다른 한 대의 폭격기는 그대로 우리를 향해 왔지만, 나는 직감적으로 밀림 쪽으로 도망친 폭격기를 쫓기 시작했다. 그런데 3대의 제로기가 나를 향해 돌진해 내려왔다.
나는 즉시 제일 앞의 제로전투기에 기관포를 퍼부었다. 거의 정면충돌할 정도의 거리에서 적기는 오른쪽 날개가 떨어져나갔고, 내 기체 아래로 떨어져 내려가더니 뱅글뱅글 돌면서 화염과 연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거의 수직으로 상승하면서 기체를 뒤집어 제로전투기들과 교전하느라 놓쳐버린 폭격기를 찾기 시작했다. 인간은 극한상황에서 놀라운 능력을 발휘한다고 했던가. 남은 두 대의 적기가 여전히 나에게 날아드는 것을 보면서도 옆에서 바버 중위가 3대의 제로기와 교전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도 명확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아래쪽으로 밀림 위에 무언가 검푸른 물체가 스쳐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나무 위를 스치듯 지나가며 도망치는, 아까 놓쳐버렸던 그 폭격기였다.
나도 나무에 닿을 만큼 급강하하여 쫓아가면서 쉴새없이 기관포탄을 퍼부었다. 포탄 세례에 명중당한 오른쪽 엔진과 날개가 화염에 휩싸였고, 결국 오른쪽 날개가 떨어져 나가면서 폭격기는 밀림 속에 추락했다.
그 사이 바버 중위도 나머지 한 대의 폭격기를 바다 속으로 집어넣고 있었다. 이제 그곳을 급히 빠져나가야만 하는 것이다. 나는 밀림 위로 미끄러지듯 선회하면서 추격해오는 제로기들을 떼어버리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먼지가 일면서 눈앞을 가렸다. 엉겁결에 카힐리 공군기지 바로 위까지 와 버렸던 것이다. 일본 전투기들이 우리를 요격하려고 벌떼처럼 이륙하는 통에 일어난 먼지였다. 당황한 나는 곧장 항구를 가로질러 바다로 나갔다. 그리고 라이트닝기의 목적에 걸맞는 고속 상승을 시도했고, 우리를 쫓던 제로기들은 하나둘씩 뒤로 떨어져 나갔다.
귀로의 비행은 손상을 입은 전투기가 제법 있었던 데다가, 결정적으로 연료가 부족했던 덕분에 상당히 불안했다. 마지막으로 착륙했던 것은 나였는데, 활주로 끝에 멈춰서자 연료탱크는 완전히 비어 있었다. 파일럿, 정비사, 사병 할 것 없이 달려와 조종석에서 나를 끌어낸 후 등을 두드리며 환호성을 울렸다. 마치 방금 결승골을 따낸 풋볼 선수 같은 기분이랄까. 바버 중위도 엄청난 환호를 받았다. 그는 폭격기뿐만 아니라 제로기 2대도 더 격추시켰던 것이다. 반면 우리쪽 전사자는 한 명이었다. 홈스 중위의 윙맨이었던 레이몬드 하인 중위였다.
그날밤 우리는 직속상관인 조 콜린스 장군이 베푼 죽순과 스테이크, 찬 맥주를 곁들인 저녁을 즐겼다. 남태평양지구 미해군 사령관인 홀시 제독도 축하메시지를 보내왔다. "미첼 소령과 그의 대원들에게 축하를 보낸다. 귀관들이 사냥한 오리들 가운데에는 공작(peacock)이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우리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바버 중위가 바다 위에서 격추시켰던 폭격기에 타고 있던 우가끼(宇垣) 제독과 키타무라(北村) 제독은 구조되었으나 심한 부상을 입었다. 그리고 밀림에 추락한 다른 폭격기에서는 야마모토 제독이 지휘도를 양손에 꽉 쥔 채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의 유해가 도쿄로 돌아오자 그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고, 수백만의 일본인들이 장례식에 참여했다. 트라팔가 해전에서 전사한 호레이쇼 넬슨 자작의 장례가 국장으로 런던에서 치러진 이래로 나라 전체가 제독 한 사람의 죽음을 그렇게 대대적으로 애도한 일은 없었다.
야마모토가 죽고 1개월이 지난 후에야 도쿄 라디오 방송은 겨우 그의 죽음을 시인했다. 그러나 미군은 종전까지 아무런 세부사항을 공개하지 않았다. 그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우선 첫 번째로는 이 작전이 사전에 치밀히 계획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경우 일본이 그들의 암호가 해독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나 때문이었다. 나에게 얽힌 지극히 개인적인 사연 때문이었다.
이 사건이 있은 지 2개월 후, 1943년 6월 19일 이미 4기의 제로기를 격추시킨 기록을 기수에 새기고 있었던 나의 동생 찰스는 8대의 커세어기를 이끌고 부갠빌 카힐리 기지로의 폭격 임무에 나섰다. 이 출격에서 찰스는 내가 야마모토를 격추시켰던 바로 그 지점에서 제로기들과 교전했고 격추 당했다. 다행히도 야마모토와 달리 찰스는 비상탈출에 성공했지만 일본군에게 붙잡혔고 라바울 섬의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미국 정부는 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일본측이 찰스에게 가할 보복을 우려한 나머지 그의 형인 내가 야마모토를 죽였다는 사실을 숨겼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해병대가 라바울에 상륙하기 불과 2주 전에 포로수용소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나 버렸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알링턴 국립묘지에서 가족과 함께 찰스의 영결식에 참석한 나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전쟁의 비극과 허무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카일리 상공에서 내가 야마모토 제독의 폭격기를 격추시키고, 바로 그 장소에서 동생 찰스의 전투기가 격추당하다니. 이 얼마나 야릇한 운명의 장난인가. 원자시대를 이룩한 인류의 지혜가 언젠가는 참다운 평화로의 길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슬픔에 젖어 비통함을 씹으며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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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실화입니다. EBS에서 해주는 2차대전 다큐멘터리에서 저 내용을 살짝 봤었던 적이 있는데, 당시 야마모토의 참모진들은 호위기 6대로는 부족하다고 더 늘릴 것을 주장했었다더군요. 그러나 야마모토 본인이 "아군 기지에 시찰 가는데 무슨 호위기가 그리도 많이 필요하냐"라면서 무시했다는. 역시 사람은 남의 충고를 잘 들어야 하나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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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야마모토를 격추시켰다 - 토마스 G. 랜피어 2세
I shot down the Yamamoto - By Thomas G. Lanphier, Jr.
비가 뿌리는 을씨년스러운 날의 알링턴 국립묘지, 동생의 관을 덮은 성조기가 차가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묘소 곁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내가 나란히 서 있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것은 4년 전이었으나 내 동생 찰스의 유해는 그때서야 남태평양에서 돌아왔던 것이다. 조사를 읽는 군목의 엄숙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동생과 나의 인생이 솔로몬 군도의 외딴 섬, 부갠빌 섬과 우리 두 형제가 한 번도 직접 만난 적이 없었던 사나이,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와 얼마나 기구하게 얽혀졌던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이 태평양전쟁에 말려들게 되자, 1차대전 때 항공장교였던 부친을 가진 나와 찰스가 파일럿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찰스가 해병대 전투조종사 훈련을 받고 있을 무렵 나는 육군 P-38 전투비행중대의 일원으로 과달카날에 배속되었다. 그리고 1943년 3월경, 전투정찰임무에서 귀환하던 중 나는 귀에 익은 목소리가 무전기에서 들려오는 것을 들었다. 찰스였다. 그도 과달카날 상공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 후 우리는 비행 중에 자주 마주쳤었다. 한 번은 함께 일본군의 제로전투기 편대와 공중전을 벌였던 적도 있었다. 또 언젠가 동생이 일본군 점령하의 솔로몬 군도의 산타 이사벨 섬 상공에서 비상탈출했을 때 나는 동생의 구조를 도왔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지금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게 아니다.
1943년 4월 17일 오후 늦게 나는 핸더슨 필드 기지의 지하 작전 참호에 보고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제339전투비행중대장으로 과달카날에서 손에 꼽는 에이스인 존 미첼 소령과 함께 그곳에 들어섰다. 지하 특유의 곰팡내가 나는 참호에 들어섰을 때, 무언가 중요한 일이 이야기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과달카날에 배속된 모든 고급장교들이 다 와 있었던 것이다. 긴장된 얼굴의 해병대 소령이 1급 기밀 표시가 된 전문 한 장을 건네주었다.
전문에는 야마모토와 그의 고위 참모장교들이 4월 18일 비행기편으로 부갠빌에 도착한다고 알리고,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이를 포착하여 격추시켜야 함, 대통령도 이 작전을 대단히 중요시"라고 적혀 있었다. 이어 야마모토 일행이 제로전투기 6대의 엄호를 받는 2대의 베티 폭격기를 이용할 것이라고 밝히고 그들의 비행스케줄도 상세히 나와 있었다. 그리고 전문 끝에는 프랭크 녹스 해군 장관의 서명이 되어 있었다.
실내에 긴장감이 감돌았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야마모토야말로 일본 해군 최고 지휘관일 뿐만 아니라 진주만 기습공격을 몸소 계획하여 태평양함대를 절름발이로 만들고 2000명 이상을 죽게 만든 장본인이 아닌가! 미첼 소령과 나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부갠빌까지 거리는 약 300마일. 과달카날 기지에 있는 미군기 중 야마모토 일행을 요격하고 돌아올 수 있는 항속거리의 항공기는 우리 중대의 록히드 P-38 라이트닝뿐이었다.
당시 59세였던 야마모토는 땅딸막하고 표정이 없는 인간으로 현대 일본 해군을 건설한 인물이었다. 그는 야간전투와 어뢰공격전술을 이용하여 미 해군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또한 그는 일본의 항공 전술 개척자로서, 제로전투기의 개발에 기여했으며 항공모함에 크게 의존하는 전술로 해전 양상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사실 야마모토는 미국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하버드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으며 워싱턴 주재 일본 대사관부 무관으로 재직할 때에도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영어 실력이 뛰어났으며 포커와 야구를 즐겼다. 일본 군부의 극단적인 군국주의자들이 그를 친미주의자로 여기고 암살해버리겠다고 협박한 일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일본과 미국 사이에 전쟁이 터지고 나자, 그는 헌신적으로 일본 해군을 이끌어 미군에 대항했다.
야마모토의 탑승기를 요격하기로 한 결정은 결코 가볍게 내려진 것이 아니었다. 그를 공격할 수 있는 기회는 미국의 암호 전문가들이 일본측 암호를 해독해내 적의 비밀 메시지를 낱낱이 풀이한 데서 얻어졌는데, 이는 2차 세계 대전 중 최고의 비밀이었다.
암호 해독 이후 야마모토가 우리의 공격 거리 안에 들어온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 군부는 즉시 루즈벨트 대통령 및 어네스트 J. 킹 해군참모총장과 협의를 거쳤다. 문제의 핵심은 야마모토가 탄 비행기를 격추시키는 것이 전쟁 수행인지, 아니면 그저 살인에 불과한지로 좁혀졌다. 마침내 체스터 W. 니미츠 제독이 가장 적절한 질문을 제기했다. "일본에 그의 자리를 대체할만한 인물이 있나?"
결론은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일본의 전쟁 수행에 있어 반드시 있어야 할 인물이었고, 따라서 우리는 그를 없애야만 했다.
일단 결정이 내려지자 과달카날의 지하 작전실에서는 가장 효과적인 작전계획을 둘러싸고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야마모토는 다음날 아침 9시 45분에 부갠빌의 카힐리 공군기지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우리는 그의 도착 예정 시각 10분 전에 카힐리 공군기지 북방 35마일 상공에서 그를 요격하기로 결정했다. 모험이었다. 우리 중대에서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던 P-38기는 고작해야 18대뿐이었으나 일본군이 카힐리 공군기지에 배치한 전투기는 100대가 넘었다. 또한 보조연료탱크를 탑재하여 연료를 가득 싣고 출발한다 할지라도 목표지점에서 적기와 교전하며 시간을 끌만큼의 충분한 연료를 확보할 수 없었다. 결국 필요한 것은 시계바늘보다 더한 정확성이었다.
작전계획 이후, 활주로 근처의 풀밭에 중대원들을 모두 불러모은 미첼 소령이 우리들에게 짤막한 지시를 내렸다. "아침 7시 25분에 이륙한다. 내가 지휘하는 14대가 2만 피트 고도에서 카힐리에서 이륙하는 일본 제로기들을 맡겠다. 그리고 랜피어 대위가 지휘하는 4대가 1만 피트에서 야마모토 일행의 비행기를 요격한다."
뒤이어 육군 정보장교 한 사람이 야마모토가 일본에서 얼마나 중요하며, 또 그가 죽게 되면 적의 사기에 얼마나 큰 타격을 줄 것인지에 대해 강조했다. 그는 야마모토가 철저한 완벽주의자라는 사실을 주지시키며, "우리가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그는 시간관념이 아주 철저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정시에 그곳에 도착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4월 18일 일요일, 작전 개시일에 과달카날의 하늘은 맑았으나 습도는 높았다. 애기를 몰고 진흙투성이의 철판 활주로 위로 택싱하는 동안 내 윙맨인 렉스 바버 중위가 나를 향해 싱긋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미첼 소령의 라이트닝이 활주로 위로 떠오른 것은 7시 25분 정각이었다. 그 다음이 바버 중위였고 내가 그 뒤를 따랐다. 그러나 내 편대의 4대 가운데 2대는 이륙에 실패했다. 한 대는 활주로의 이물질에 타이어가 터져버렸고 다른 한 대는 연료공급펌프에 고장이 생겼던 것이다. 작전을 개시하기도 전에 2대가 피격당한 꼴이었다. 할 수 없이 미첼 소령은 자기 휘하의 제2편대의 베스비 홈스 중위와 레이몬드 하인 중위에게 나의 편대에 합류하도록 손짓으로 지시했다.
일단 이륙하고 나자 우리들은 일본군의 레이더망을 피해 파도를 스칠 듯한 초저공비행으로 북을 향했다. 편대는 카힐리 상공의 랑데부 지점을 향해 갈지(之)자 형태로 비행하기 시작했다.
한낮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밀집진형으로 비행중인 우리 편대의 16기의 라이트닝기들은 일체의 무전 교신을 끊고 철저한 침묵을 유지했다. 거의 2시간 이상 육지가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에서의 초저공비행. 여느 때처럼 전투 이전에 느끼는 순간적인 불안감이 좁은 콕핏 안의 온몸을 엄습해왔다.
그때까지 100회 가까이 출격하면서 전투에 임하는 조종사의 용기는 때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어떤 때에는 극도로 용감해져 목숨을 건 도박을 감행할 용기가 솟아나는가 하면 또 어떤 때는 그렇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날만은 모두가 모든 것을 바칠 결의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트레저리 섬(보물섬? -_-)이 서북쪽 수평선에 나타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뒤에 부갠빌 섬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거진 밀림이 해안까지 덮은 거대한 섬이었다. 부갠빌의 해안선을 지나고 나자 미첼 소령은 작전계획대로 급상승하며 2만 피트 고도로 치솟아올랐다. 나의 편대도 그 뒤를 따라 1만 피트까지 상승했다. 계기판 시계는 9시 33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작전 개시 2분 전이었다.
9시 34분. 작전 개시 1분 전. 광활한 하늘에 보이는 것은 오직 몇 조각의 한가로운 뭉게구름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힐리 기지 주변의 일본군 전투기들이 우리를 포착해낼 것이었다. 그런데 완벽주의자라던 그 제독은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건가?
바로 그때, 한 파일럿이 침묵을 깨트렸다.
"적기, 10시 방향 고고도에(Bogeys, Ten o'clock high)."
과연 멀리 V자 대형을 이룬 검은 점들이 보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것들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6대의 제로전투기의 호위를 받으며 비행중인 녹색으로 위장한 2대의 쌍발 베티폭격기였다. 계기판 시계는 9시 3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야마모토 제독은 정확히 시간을 지킨 것이다. 그리고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 끝에 드디어 우리는 정확한 시간에 예정대로 광활한 태평양 상공의 정확한 목표지점에 도착한 것이었다. 이제 남은 모든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었다.
나는 무거운 보조연료탱크를 투하하고 공격 준비를 시작했다. 거리는 꽤 가까웠지만 일본기들은 우리를 미처 알아채지 못한 채 고고도에서 정면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대단한 행운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행운은 불운으로 변했다. 홈스 중위의 연료탱크가 분리되지 않았던 것이다. 보조탱크를 떼어내 보려고 기체를 이리저리 흔들고 돌리던 그는 결국 편대에서 이탈하여 해안 쪽으로 향했고 그의 윙맨이었던 하인 중위는 망설였지만 부득불 그를 쫓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제 임무를 수행할 사람은 나와 바버 중위의 두 사람뿐이었다.
바버 중위와 내가 일본기 편대에 돌진, 1마일 거리까지 접근했을 무렵 제로기들도 우리를 발견했다. 일본군 전투기들은 보조탱크를 투하하며 우리와 맞서려고 강하했다. 그런데 이때 2대의 폭격기 중 앞쪽의 폭격기가 고도를 낮추며 밀림 쪽으로 급강하하기 시작했다. 다른 한 대의 폭격기는 그대로 우리를 향해 왔지만, 나는 직감적으로 밀림 쪽으로 도망친 폭격기를 쫓기 시작했다. 그런데 3대의 제로기가 나를 향해 돌진해 내려왔다.
나는 즉시 제일 앞의 제로전투기에 기관포를 퍼부었다. 거의 정면충돌할 정도의 거리에서 적기는 오른쪽 날개가 떨어져나갔고, 내 기체 아래로 떨어져 내려가더니 뱅글뱅글 돌면서 화염과 연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거의 수직으로 상승하면서 기체를 뒤집어 제로전투기들과 교전하느라 놓쳐버린 폭격기를 찾기 시작했다. 인간은 극한상황에서 놀라운 능력을 발휘한다고 했던가. 남은 두 대의 적기가 여전히 나에게 날아드는 것을 보면서도 옆에서 바버 중위가 3대의 제로기와 교전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도 명확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아래쪽으로 밀림 위에 무언가 검푸른 물체가 스쳐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나무 위를 스치듯 지나가며 도망치는, 아까 놓쳐버렸던 그 폭격기였다.
나도 나무에 닿을 만큼 급강하하여 쫓아가면서 쉴새없이 기관포탄을 퍼부었다. 포탄 세례에 명중당한 오른쪽 엔진과 날개가 화염에 휩싸였고, 결국 오른쪽 날개가 떨어져 나가면서 폭격기는 밀림 속에 추락했다.
그 사이 바버 중위도 나머지 한 대의 폭격기를 바다 속으로 집어넣고 있었다. 이제 그곳을 급히 빠져나가야만 하는 것이다. 나는 밀림 위로 미끄러지듯 선회하면서 추격해오는 제로기들을 떼어버리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먼지가 일면서 눈앞을 가렸다. 엉겁결에 카힐리 공군기지 바로 위까지 와 버렸던 것이다. 일본 전투기들이 우리를 요격하려고 벌떼처럼 이륙하는 통에 일어난 먼지였다. 당황한 나는 곧장 항구를 가로질러 바다로 나갔다. 그리고 라이트닝기의 목적에 걸맞는 고속 상승을 시도했고, 우리를 쫓던 제로기들은 하나둘씩 뒤로 떨어져 나갔다.
귀로의 비행은 손상을 입은 전투기가 제법 있었던 데다가, 결정적으로 연료가 부족했던 덕분에 상당히 불안했다. 마지막으로 착륙했던 것은 나였는데, 활주로 끝에 멈춰서자 연료탱크는 완전히 비어 있었다. 파일럿, 정비사, 사병 할 것 없이 달려와 조종석에서 나를 끌어낸 후 등을 두드리며 환호성을 울렸다. 마치 방금 결승골을 따낸 풋볼 선수 같은 기분이랄까. 바버 중위도 엄청난 환호를 받았다. 그는 폭격기뿐만 아니라 제로기 2대도 더 격추시켰던 것이다. 반면 우리쪽 전사자는 한 명이었다. 홈스 중위의 윙맨이었던 레이몬드 하인 중위였다.
그날밤 우리는 직속상관인 조 콜린스 장군이 베푼 죽순과 스테이크, 찬 맥주를 곁들인 저녁을 즐겼다. 남태평양지구 미해군 사령관인 홀시 제독도 축하메시지를 보내왔다. "미첼 소령과 그의 대원들에게 축하를 보낸다. 귀관들이 사냥한 오리들 가운데에는 공작(peacock)이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우리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바버 중위가 바다 위에서 격추시켰던 폭격기에 타고 있던 우가끼(宇垣) 제독과 키타무라(北村) 제독은 구조되었으나 심한 부상을 입었다. 그리고 밀림에 추락한 다른 폭격기에서는 야마모토 제독이 지휘도를 양손에 꽉 쥔 채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의 유해가 도쿄로 돌아오자 그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고, 수백만의 일본인들이 장례식에 참여했다. 트라팔가 해전에서 전사한 호레이쇼 넬슨 자작의 장례가 국장으로 런던에서 치러진 이래로 나라 전체가 제독 한 사람의 죽음을 그렇게 대대적으로 애도한 일은 없었다.
야마모토가 죽고 1개월이 지난 후에야 도쿄 라디오 방송은 겨우 그의 죽음을 시인했다. 그러나 미군은 종전까지 아무런 세부사항을 공개하지 않았다. 그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우선 첫 번째로는 이 작전이 사전에 치밀히 계획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경우 일본이 그들의 암호가 해독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나 때문이었다. 나에게 얽힌 지극히 개인적인 사연 때문이었다.
이 사건이 있은 지 2개월 후, 1943년 6월 19일 이미 4기의 제로기를 격추시킨 기록을 기수에 새기고 있었던 나의 동생 찰스는 8대의 커세어기를 이끌고 부갠빌 카힐리 기지로의 폭격 임무에 나섰다. 이 출격에서 찰스는 내가 야마모토를 격추시켰던 바로 그 지점에서 제로기들과 교전했고 격추 당했다. 다행히도 야마모토와 달리 찰스는 비상탈출에 성공했지만 일본군에게 붙잡혔고 라바울 섬의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미국 정부는 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일본측이 찰스에게 가할 보복을 우려한 나머지 그의 형인 내가 야마모토를 죽였다는 사실을 숨겼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해병대가 라바울에 상륙하기 불과 2주 전에 포로수용소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나 버렸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알링턴 국립묘지에서 가족과 함께 찰스의 영결식에 참석한 나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전쟁의 비극과 허무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카일리 상공에서 내가 야마모토 제독의 폭격기를 격추시키고, 바로 그 장소에서 동생 찰스의 전투기가 격추당하다니. 이 얼마나 야릇한 운명의 장난인가. 원자시대를 이룩한 인류의 지혜가 언젠가는 참다운 평화로의 길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슬픔에 젖어 비통함을 씹으며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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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실화입니다. EBS에서 해주는 2차대전 다큐멘터리에서 저 내용을 살짝 봤었던 적이 있는데, 당시 야마모토의 참모진들은 호위기 6대로는 부족하다고 더 늘릴 것을 주장했었다더군요. 그러나 야마모토 본인이 "아군 기지에 시찰 가는데 무슨 호위기가 그리도 많이 필요하냐"라면서 무시했다는. 역시 사람은 남의 충고를 잘 들어야 하나 봅니다. ^^
Our last, best hope for peace.
그 이유하나. 바로 진주만 공습때 항공모함을 한대도 처치하지 못하자 "이재 일본은 졌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이후 솔로몬 해전을 겪으면서 야마모토 재독은 더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고 합니다.
야마모토는 이미 개전전부터 미국과 싸우는 것에 대해 엄청난 반대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청년장교들이 암살협박을 해대고, 이들로부터 야마모토를 구하기 위해 상관들이 그를 해상부대로 보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망망대해에 뜬 함정에서는 외부인에 의한 암살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미국과의 개전이 불가피해짐을 안 야마모토는 만일 미국과 개전하려면, 진주만을 습격해야 한다고 파격적인 주장을 해서 또 한바탕 반대의 회오리에 휩싸입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사직하겠다고 위협해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게 됩니다.
(하려면 확실하게 하자는 것이지요. 미 태평양함대를 먼저 손을 봐주지 않으면 남하작전시 옆구리를 찔릴 우려가 있거든요. -.-)
하지만, 천황이 이 전쟁이 어떻게 될 것인가 물었을 때, 야마모토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개전 후 1-2년간은 미친척하고 전쟁을 수행할 수 있지만, 그 이후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야마모토도 희망을 가진 때는 있었습니다. 비록 항공모함을 잡지는 못했지만, 진주만 기습에서 승리하고 일본이 파죽지세로 남하작전에 성공하자, 잘 하면 파국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하지만,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배하자, 더 이상 승산은 없고, 이미 점령해놓은 점령지에서 최대한 시간을 끌며 지연작전을 펼쳐 적을 소모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가달카날 전투에서 밀려나고, 점차 전선이 라바울로 다가오자, 사실상 그는 반쯤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명예로운 죽음 (전사)를 마음 한 구석에서 원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참모들이 말려도 정시에 출발하고, 호위기도 적게 둔 것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미국과의 개전이 불가피해짐을 안 야마모토는 만일 미국과 개전하려면, 진주만을 습격해야 한다고 파격적인 주장을 해서 또 한바탕 반대의 회오리에 휩싸입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사직하겠다고 위협해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게 됩니다.
(하려면 확실하게 하자는 것이지요. 미 태평양함대를 먼저 손을 봐주지 않으면 남하작전시 옆구리를 찔릴 우려가 있거든요. -.-)
하지만, 천황이 이 전쟁이 어떻게 될 것인가 물었을 때, 야마모토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개전 후 1-2년간은 미친척하고 전쟁을 수행할 수 있지만, 그 이후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야마모토도 희망을 가진 때는 있었습니다. 비록 항공모함을 잡지는 못했지만, 진주만 기습에서 승리하고 일본이 파죽지세로 남하작전에 성공하자, 잘 하면 파국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하지만,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배하자, 더 이상 승산은 없고, 이미 점령해놓은 점령지에서 최대한 시간을 끌며 지연작전을 펼쳐 적을 소모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가달카날 전투에서 밀려나고, 점차 전선이 라바울로 다가오자, 사실상 그는 반쯤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명예로운 죽음 (전사)를 마음 한 구석에서 원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참모들이 말려도 정시에 출발하고, 호위기도 적게 둔 것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겠지요.